만화로 다시 태어나는 예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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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다시 태어나는 예쁜 이야기
  • 최종규
  • 승인 2011.03.2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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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이향원, 《플랜더스의 개》(산하,2002)

 이향원 님이 그린 《플랜더스의 개》에 나오는 개는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맞닿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한식구로 지내며 우유수레를 끄는 개’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향원 님 그림에 나오는 개라든지 사람은 ‘서양사람을 그려도 서양사람 아닌 이향원 님이 그리는 한국사람’으로만 보입니다. 아마 다른 분이 《플랜더스의 개》를 그리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 보면 재미있으나 어찌 보면 모두들 ‘내 그림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내 그림틀이 있는데 내 그림틀을 벗어던지고 어수룩하게 ‘서양사람 모습을 잘 드러내는 모습’으로 그리려 하면 외려 어줍잖기 일쑤입니다. 그림이든 만화이든 정물그림이 아니요 판박이그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도 한국사람이 서양사람을 찍을 때하고 서양사람이 서양사람을 찍을 때에는 느낌이 달라요. 서양사람이더라도 네덜란드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을 찍을 때하고 덴마크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을 찍을 때하고 미국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을 찍을 때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벨기에사람은 벨기에사람 눈길과 손길에 따라 그림과 글과 만화와 사진을 빚으면 되고,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눈길과 손길에 따라 그림과 글과 만화와 사진을 일구면 돼요.

 명작을 만화로 다시 그린다 할 때에 으레 ‘명작 느낌을 살린다’는 테두리에 갇혀 그만 ‘내 그림틀’을 잊거나 잃곤 하는데, 이렇게 하면서 명작 느낌을 살리려 해 보았자 명작 느낌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명작은 명작 그대로 둘 때에만 명작 느낌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명작을 누군가 만화로 다시 그린다 한다면, ‘만화로 다시 그리는 사람 숨결’에 따라서 새로운 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명작을 다시 그린 만화’는 ‘명작을 다시 그려서 좋은 만화’가 되어야지 ‘명작 느낌 살아나도록 하는 만화’가 되어서는 죽도 밥도 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명작도 만화도 ‘명작 닮은 만화’도 되지 못합니다.

 이향원 님이 그린 《플랜더스의 개》는 다른 사람 아닌 이향원 님 빛깔과 숨결과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난 ‘이향원 만화’여야 비로소 아름다우면서 눈물겹고 사랑스러운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 “할아버지, 모두들 루뱅 쪽으로 가는데 우리만 반대쪽으로 가고 있네요.” “저 사람들은 루뱅 축제에 가고 우린 집으로 가니까.” (19쪽)
- “파트라슈, 잘 알려줘.” “멍멍.” “넌 영리하니까 배달할 집을 모두 알고 있겠지?” “멍멍.” “새벽 바람이 이렇게 매서운 줄은 몰랐네.” “멍멍.” “호, 호. 추워. 아! 호, 호. 얼어붙는 것 같구나. 이렇게 추울 수가. 그동안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42∼43쪽)

 늘 바지만 입던 ‘이향원 만화 여자아이’가 모처럼 치마를 입고 나온 《플랜더스의 개》를 보니 좀처럼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안 예쁘지는 않으나,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싶습니다. 이향원 님이 가끔은 ‘이향원 만화 여자아이’한테 치마를 입혀 주었다면 《플랜더스의 개》에서도 조금은 어울린다 느낄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원작을 생각하면서 치마를 입힐 수밖에 없었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치마 아닌 바지 입은 알로아’가 나오는 새로운 만화가 태어날 수 있었는지 모르고, 치마 아닌 바지를 입은 살짝 왈가닥이거나 말괄량이 알로아가 나오도록 그렸어도 퍽 재미났거나 아름답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아직 만화영화로 〈플랜더스의 개〉를 보지 않은 어린이라면 이 만화책 줄거리를 모르겠지만,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를 장만하여 읽을 어른이라든지 이 만화책을 아이들한테 읽히려 하는 어른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를 만화로 새로 마주하는 셈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에서는 원작 하나를 놓고 여러 사람이 새롭게 만화영화로 담곤 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우주소년 아톰》이나 《블랙잭》은 데즈카 오사무 님이 살던 때에 손수 만든 만화영화가 있기도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 님이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이 새로운 느낌과 그림으로 새롭게 만든 만화영화가 있기도 합니다.

 어느 작품이든 원작이 있되, 원작 멋과 맛을 살리면서 ‘새로 그리는 사람 손길과 이야기’가 살며시 깃듭니다. 원작은 원작대로 다시금 맛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새로운 만화영화는 새로운 만화영화로 거듭 마주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 (네로 할아버지는 정직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우유 배달을 맡겼다. 그러나 일이 힘든 만큼 보수는 많지 않았다. 두 식구는 한 번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다.) (26쪽)
- (네로는 아주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끼니를 굶는 고통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건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네로는 이를 악물었다. 우유 배달을 멈출 수 없었다.) (46쪽)
- (두 폭의 그림은 루벤스의 대표작이었다. 그 그림엔 휘장이 늘 처져 있었다. 많은 돈을 내지 않으면 그림을 볼 수 없었다.) (61쪽)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에서는 네로와 알로아가 있으며, 네로네 할아버지와 알로아네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사이에 파트라슈라는 개가 있습니다. 네로와 알로아는 오랜 소꿉동무요 사랑을 꽃피우는 단짝이며, 네로네 할아버지는 착하며 바지런한 분이고 알로아네 아버지는 돈은 많으나 마음이 메마른 분입니다. 파트라슈는 이 사람들 사이에서 기쁘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하고, 네로네 할아버지처럼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기운이 줄어듭니다. 네로와 알로아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파트라슈는 늙은 개가 되니까요.

 네로는 어버이를 여의고 할아버지하고 살아가면서 언제나 가난합니다. 가난하면서 굶주리고, 굶주리지만 착한 마음씨를 잃지 않습니다. 굶주리며 지내니 착한 파트라슈한테 줄 먹이도 모자라는데, 그래도 셋은 서로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결을 예쁘게 잇습니다. 아무것 없는 살림이기에 집삯조차 내기 빠듯하고, 집삯조차 못 낼 뿐 아니라 밑천 하나 없으니 흙을 일군다든지 다른 어떤 일을 한다든지 꿈꾸지 못합니다.

 할아버지 뒤를 이어 우유배달 일을 하는 네로는 어느 때부터인가 ‘그림’을 봅니다. 배고픔을 잊게 해 주는 아름다운 그림을 물끄러미 보면서, 네로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아름다운 터전을 그림으로 아름답게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밥과 따뜻한 집과 좋은 일자리보다, 힘들며 고단한 삶에 가느다랗지만 어여쁜 빛줄기처럼 스며든 착한 그림을 꿈꿉니다.

 마음이 절로 움직이고 손이 절로 움직이기에 그리는 착한 그림입니다. 돈을 받고 파는 그림을 그리려는 네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보금자리와 하늘과 들판을 그림으로 그리려는 네로입니다. 가난한 살림이어도 밝으며 씩씩한 네로 그대로, 누구한테든 따사로우며 애틋한 그림을 그리려는 네로입니다.

- “그림물감이 없으면 숯으로 그려도 되고요.” “숯은 금방 지워져 버릴 텐데. 화가는 돈을 벌지 못해. 늘 가난해.” “헤헷, 할아버지도. 돈은 일을 해서 벌면 되잖아요. 두고 보세요. 전 훌륭한 화가가 되고 말 거예요.” (51쪽)
- “출렁이는 저 파도를 색으로 칠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질 텐데. 파트라슈, 나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보고 싶어. 아! 그림물감만 있으면 저 고동 소리도 그림 속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은데.” (56∼57쪽)
- (네로는 틈만 있으면 숯부스러기로 눈에 띄는 것을 모두 그렸다. 하지만 그것들을 아름다운 색깔로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63쪽)
- ‘알로아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그냥 보고 말 수는 없어.’ “알로아, 그대로 가만 있어.” “나를 그리려고?” “아주 아름다워. 멋지게 그려 볼게.” (65쪽)
- (정성 들여 그린 알로아의 그림을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파트라슈, 그 돈을 받았으면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하지만 알로아의 그림을 돈을 받고 판다는 건 이상해, 그렇지?” (68∼69쪽)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는 네로가 네로네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착한 마음에다가 파트라슈라는 개를 아끼는 사랑스러운 마음과 그림 하나에 담는 고운 마음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이끕니다. “파트라슈, 그 돈을 받았으면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하지만 알로아의 그림을 돈을 받고 판다는 건 이상해” 하는 말처럼, 언제나 돈에 쪼들려 그림을 배운다든지 훌륭한 그림을 구경한다든지 엄두를 못 내는 네로인데, 정작 네로는 네로가 그린 그림을 돈을 받고 팔 엄두 또한 내지 않습니다. 네로한테는 네로라는 아이가 살아가며 익히거나 받아들인 사랑을 네로가 그리려는 그림에 살포시 담을 수 있으면 기쁩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림이 아니라, 스스로 즐겁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면 넉넉합니다. 남한테 내보이려는 그림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저절로 스며나오도록 온힘을 쏟아서 이루는 그림이면 됩니다.

- ‘나의 그림 솜씨는 알로아 아버지의 재산에 비길 수 없는 숭고한 거야. 나는 반드시 훌륭한 화가가 되고 만다.’(82쪽)
- (그림을 접수시키고 난 네로는 힘이 쭉 빠졌다.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색한 수많은 그림 속에서 송판 위에 그린 목탄 그림은 너무 초라했다.) ‘난 글도 모르고 겨울에 양말도 신을 수 없는 가난뱅이야. 이 주제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건 맞지 않는 건지도 몰라.’ (89쪽)

 ‘위다(Ouida/Marie Louise de la Ramee)’ 님은 1872년에 《A Dog of Flanders》를 쓰고, 일본사람은 1975년에 만화영화로 만들며, 이향원 님은 2002년에 만화책 한 권으로 《플랜더스의 개》를 내놓습니다. 소설과 만화영화와 만화책은 다 같은 이야기이면서 저마다 조금씩 다른 흐름으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네로와 파트라슈가 얼마나 애틋하게 서로를 아끼며 보살폈는가를 보여주면서, 저마다 다 다른 빛깔과 흐름으로 둘 사이가 어떻게 따스한가를 밝힙니다.

 네로한테 젖을 얻을 소나 염소가 한 마리라도 있었으면 조금이나마 돈을 모을 만했을 테고, 조금이나마 돈을 모을 만했다면 할아버지이든 네로이든 파트라슈이든 끼니 한 번이라도 배불리 먹어 보고 숨을 거두었겠지요. 아니, 추운 겨울날 양말 한 켤레라도 신어 보았겠지요.

 그러나 가난과 굶주림과 추위를 온몸으로 껴안으며 시달린 네로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따스하며 사랑스러운 손길로 따스한 그림결과 사랑스러운 그림무늬를 베풉니다. 물감 한 번 써 보지 못한 네로인 만큼 나무판대기에 숯으로 그렸을 뿐이지만, 눈부신 그림빛을 길어올립니다. 네로가 물감을 쓸 수 있었다면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처럼 무지개빛 아름다운 그림을 빚었을는지 모르지만, 네로는 네로대로 숯그림만 그릴 수 있었기에 ‘흑백 빛깔’로 이룰 수 있는 눈물겨운 그림꽃을 피웁니다.

 살림이 넉넉한 이들은 ‘넉넉한’ 마음결로 그림을 빛내지 못합니다. 살림이 넉넉한 이들은 ‘넉넉한’ 마음씨로 어려운 이웃을 돕지 못합니다. 살림이 쪼들리는 이들은 힘겨이 쪼들리는 마음결로 그림 하나에 사랑을 담고 매무새와 말씨 하나에 사랑을 싣습니다.

- (사람들은 지금 네로에게 모두 베풀어 주려 한다. 네로가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네로와 파트라슈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진실되게 살았다. 조용히 눈을 감는 순간에도 둘은 꼭 끌어안았다. 둘은 마치 한몸처럼 꼭 붙어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152∼153쪽)

 만화책을 그린 이향원 님은 책머리에 “책을 보고 운다는 것은 삶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당신 만화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사람이 있기를 꿈꿉니다.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사람이라면 만화영화나 소설 《플랜더스의 개》를 마주하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겠지요. 책 아닌 사람을 마주하는 자리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마주할 때에 눈물이 샘솟을 수 있을 테고요.

 한 사람이 살아가자면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하고 사랑은 얼마나 있어야 할까요. 예쁘게 태어난 이야기가 백서른 해 만에 한국에서 만화옷을 새로 입으며 우리한테 예쁜 삶이란 어떤 모습인가를 가만히 들려줍니다.

― 플랜더스의 개 (이향원 그림·글,위다 원작,산하 펴냄,2002.2.27./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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