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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민나
  • 승인 2019.12.1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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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졸브 - 손현숙

 

 

디졸브

                -  손 현 숙

 

 

매니큐어는

도마 위에서 지워야 한다는

뉴스가 한 줄 떴다

 

내가 한 일이라곤

한 스푼의 설탕을 휘젓다

솥에 안친 곰국을 태워버린 것,

 

,

불의 성질로 태어나는 바람이다

 

디졸브란 두 화면이 교차하면서 앞의 화면이 점차 사라지는 연출 기법을 말한다. 화자는 문득 메니큐어는 도마 위에서 지워야 한다라는 티비 뉴스를 보게 된다. 언뜻 음식을 만들 때 손의 모양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족의 건강과 맛의 즐거움을 갖게 하는 음식은 주방에서 만들어진다. 매니큐어를 칠했다고 해서 음식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매니큐어를 칠한 하얗고 긴 손가락을 가진 사람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보다 피아노를 치는 예술가나 부잣집의 공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대개의 어머니 손은 그와 반대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요리하는 손은 반짝이는 메니큐어를 칠한 날렵하고 세련된 손이 아니라 투박하고 동글동글한 어머니의 손이다. 어떤 재료를 가지고도 탁탁탁탁자르고 조물졸물묻혀서 가족들 앞에 턱 내놓는 음식은 다 그렇게 두툼하고 복스러운 손으로 만들어진 어머니표 음식들이었다.

 

매니큐어는 도마 위에서 지워야 한다그래서 굳이 이런 뉴스가 떴을까? 하지만 시인은 티비 뉴스를 보다가 마음속으로부터 새로운 장면을 페이드인(fade-in)한다. “내가 한 일이라곤/한 스푼의 설탕을 휘젓다/솥에 안친 곰국을 태워버린 것…… 솔직한 자기 성찰이지만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 같지는 않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여성들은 자신이 갖는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고 성적 역할이 바뀌는 경계의 시간에서는 더 많이 그러했다. 그래서 한 여자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과정을 실화로 그린 영화도 나오고 책으로도 출판되는 상황도 많아지게 되었다.

 

대개의 경우 한 사람은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지 않는다. 여성은 집안에서는 어머니이자 아내이고 누나이자 고모이고 또한 조카일 수 있다. 밖에서는 회사의 과장일 수 있고 교회의 집사일 수 있고 어떤 모임을 주도하는 그 단체의 수장일 수도 있다. 여러 정체성에 걸쳐 있는 여성은 그 어느 한 것에만 충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매니큐어는 / 도마 위에서 지워야 한다는 여성을 향한 이 정언명령은 이 시대에서 적합한 말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일자리와 임금이 넉넉지 않은 불확실한 현실에서 젊은 남성들은 여성들이 함께 경제활동을 하기 바란다. 한 두 명의 형제자매로 태어나 똑같이 교육을 받은 여성들 역시 결혼을 한 뒤에 평등한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하여 여성은 한 가정의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지만 그녀는 사회에 나가 남성과 똑같이 일을 한다. 그녀는 매니큐어를 바르고 정장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퇴근하면 부엌에 들어가 도마 위에서 칼을 드는 주부일 수밖에 없지만 주부는 이미 단일한 그녀의 정체성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이 시대 여성들의 모습이다.

 

그런 여성들에 대해 아직도 가부장적인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시 속 화자를 통해 내가 한 일이라곤/ 한 스푼의 설탕을 휘젓다/솥에 안친 곰국을 태워버린일이다 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녀는 매니큐어를 지우는 대신 솔직하고 당당하게 살아있는 꽃을 내미는 것이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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