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인천사람’으로서의 화교(華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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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칼럼] ‘인천사람’으로서의 화교(華僑)
  • 고재봉
  • 승인 2019.12.3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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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봉 / 자유기고가
인천 차이나타운 제1패루
인천 차이나타운 제1패루

  

인천 사람에게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타고난 혈통과 지역을 근거로 제각기 본새를 드러내며 살지만, 인천은 그런 점이 유난히 약한 고장이 아닐까 한다. 토박이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유입한 사람들이 더 많기에 도드라지는 지역색이 없어 보인다. 오죽하면 선거철마다 인천이 전국의 선거결과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말이 나올까.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지방색 없는 것이 지방색이라는 말도 안되는 역설도 가능하겠다. 서로가 다른 말씨와 습속을 가졌어도 그것을 유난히 드러내지 않고 잘 어울려 산다고 하면 지나친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할까?

하지만 이러한 인천의 특성은 인천의 역사와 함께 하기에 그 의미가 자못 간단치 않다. 비단 한국사람 뿐만이 아니라 구한말 개항과 동시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 겯고틀며 인천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왔다. 당장 인천 중구청의 거리만 하여도 중국인거리와 일본인 거리가 계단 하나를 경계로 하나로 이어져 있다. 여기 살던 사람들을 외세나 침략자로 생각해야지, 이웃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나 몰역사적인 생각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일부는 그렇지만, 하지만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도 또한 엄연한 인천 사람들이다. 바로 화교(華僑)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인천에 화교로 정착한 사람들 중에는 산동반도에서 넘어온 가난한 노동자가 다수 있었다. 쿨리(苦力)라고 불리던 이 사람들은 선착장에서 하역 작업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 몰려 있었던 여관과 음식점들이 지금의 차이나타운의 전신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삶은 여느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과는 다른 순탄치 못한 길을 걸어야했다. 노동자의 삶이야 우리도 어려웠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근대사가 기박한 만큼이나 화교의 처지 역시 기구하였다.

앞서도 언급하였거니와, 화교는 거개가 산동반도, 즉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리면서 이들은 뜻하지 않게 자신의 국적을 바꿔야 했다. 중국이야 우리와 수교를 하지 않았던 공산권 국가였기 때문에 이들은 본토가 고향임에도 중국을 국적으로 선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자유중국이었던 대만을 자신들의 국적으로 삼아야했다. 차이나타운 언덕마루에 있는 화교 학교에 대만을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는 것도 같은 연유이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이유로 이들은 국적을 강요받은 것인데, 여기서 이들의 곤란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 외교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에 하나인 한중수교가 1992년에 이었으니 당시 화교들이 느꼈을 불안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중국과 수교를 하면서 이들은 고향이나 국적과 같은 정체성의 문제를 겪게 된 셈이다. 중국이 현재 하나의 중국이라는 슬로건을 국제사회에서 강하게 피력하기에, 또한 지금 한국으로 유입하는 중국인 대다수가 중국과의 경제 관계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화교의 입지는 역시 예전만하지 못하다.

비록 화교가 인천에서 노동자의 삶을 살아온 시간이 백여년 가까이 되었지만 정체성의 문제에 있어서 이들은 여전히 주변인에 가깝다. 나는 이러한 화교의 역사적 성격을 돌출시켜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같은 인천사람으로서 인천사람의 가장 주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토박이가 아니라 노동을 위해 이주해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상당수의 인천 사람과 화교는 공유하는 바가 크다. 오히려 이들이 갖고 있는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인천의 문화가 더욱 풍부해지고 개항장 도시라는 역사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한 핏줄이기에 가족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기에 한 핏줄이다.”라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트>(2000)의 유명한 대사가 떠오른다. 노년의 백인 작가와 흑인 청년의 우정을 다룬 이 영화는 제 족속만을 따지는 이기적인 핏줄중심주의를 날카롭게 뒤집어 이야기한다. 우리 속담의 이웃사촌이라는 말과 진배없으니, 서로 차별 없이 어울려 사는 인간적 애정이야말로 핏줄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이는 화교들이 처음 와서 열었던 여관이었던. 지금은 짜장면의 발원지라고 말하는 공화춘(共和春)’의 가게의 간판에도 잘 드러나 있다. 사람마다 간판의 뜻을 두고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글자만 놓고 보면, ‘다 함께 어울려 사는 화락한 봄과 같은 세상이고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저기서 만든 짜장면은 중국음식이라고 부르면서도, 기실은 한국의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먹어온 음식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모여서 서로 어울려 사는 인천이라는 고장을 대표하기에 짜장면은 결코 모자란 음식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화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라, 백여년을 함께 살아온 인천사람들이다. 간혹 핏줄이나 혹은 민족이라는 말을 앞세워 험담을 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살며 겪어야했을 정체성의 문제를 십분이라도 이해한다면, 적어도 인천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는지. 그래야 인천(仁川)이라는 이름 그대로 어진() 고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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