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 신흥동 와룡소주, 배다리 참외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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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신흥동 와룡소주, 배다리 참외전거리
  • 권근영
  • 승인 2020.01.0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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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숙과 형우의 일터

 

2020년도 인천in의 두 번째 새 기획을 시작합니다. 이번 기획연재(격주)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글입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가 봅니다.

 

 

남숙과 형우는 혼인하고 송림1181번지에 터를 잡았다. 흙으로 벽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깎아 대문을 걸었다. 집을 지으면서 배가 불렀는데, 1955년에는 첫째 아들 인구를 낳았다. 인구는 눈이 똘망똘망하고 영리하게 생겼고, 자라면서 공부도 곧잘 했다. 인구가 태어나고 4살 터울로 딸 도영을 낳았다. 도영은 새하얀 피부에 얼굴이 작고 예뻐서 동네 사람들이 이쁜아~”하고 불렀다. 도영이 태어나고 동네 사람들은 남숙을 이쁜이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도영 밑으로 딸이 하나 더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때는 어렵고 가난해서 이런 경우들이 종종 있었는데, 남숙과 형우는 아이를 잃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남숙은 더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덜컥 막내 상규가 들어선 것이다. 남숙은 겁이 났다. 무엇도 바라지 않으니, 제발 건강하게만 태어나주길 기도했다. 상규는 아주 튼튼하고, 씩씩했다. 겨울날 팬티 한 장만 입고 마룻바닥을 뛰어다녀도 감기 하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형우를 아주 많이 닮았다.

 

형우는 강화도 사람이었는데, 남숙의 사촌언니 소개로 처음 만났다. 남숙은 형우를 처음 만났을 때 사내가 참 이쁘다고 생각했다. 형우의 얼굴은 반듯하고 곱상하게 생겼고,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았다. 힘이 좋아 쌀자루든 과일상자든 거뜬히 들었다. 힘이 장사였다. 형우는 배다리 참외전거리에서 일했다. 참외전거리에 깡으로 들어오는 과일이며 채소들을 구루마에 실어 이리 나르고 저리 나르며 돈을 받았다.

 

형우가 일하는 참외전거리는 주로 과일을 깡으로 팔았는데, 김장철이 되면 배추가 들어왔다. 형우는 배추를 눈여겨보았다가 꼭 꼬랭이(꼬랑이)가 있는 조선배추를 샀다. 경종배추라고도 부르는 조선배추는 길쭉하고 뚱그렇고 밑에 뿌리가 달렸다. 이걸 100포기씩 사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에 구루마로 실어 왔다. 남숙은 조선배추를 쪼개지 않은 채로 소금을 뿌려서, 큰 도라무통(드럼통) 두 개에다가 절였다. 배추 속을 싸는 날이면, 동네 여자들 대여섯 명이 와서 일을 거들었다. 남숙은 동태와 쇠고기를 사다가 시원한 배춧국을 끓여 대접한다. 동네 여자들 여럿이 붙으니 김장 100포기가 반나절 만에 끝난다. 경동 엄마는 어느새 자기 집에서 김치를 가져와서는 바꿔 먹자고 한다. 그냥 한 포기 가져가라고 해도 꼭 바꿔 먹자며, 여자들은 자기네 김치를 들고 온다. 그러면 온 동네 김치를 다 먹어보고, 찌개도 끓여 지져 먹고 그랬다.

 

어려운 살림에 딸린 식구가 많아, 남숙도 돈을 벌어야 했다. 남숙은 와룡회사에 취직했다. 와룡회사는 인천 신흥동에서 와룡소주를 만들던 공장이다. 남숙은 이곳에서 소주병 닦는 일을 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회사 건물 안으로 쭉 들어가면 사무실이 나오고, 한쪽에는 둥그렇게 솔이 달린 기계가 돌아가고 있다. 그 기계 앞에서 여자들이 앞치마를 하고 둘러 앉아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솔 안으로 병을 쑥 집어넣어, 병을 닦는 게 여자들의 일이었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기계 속도에 맞춰 병을 닦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와룡회사에는 이 홉짜리 병도 있고, 사 홉짜리 병도 있고, 됫병도 있었다. 크기마다 솔을 깊이 집어넣어 병을 깨끗이 세척해야 했다. 종종 병을 솔로 닦다가 병이 터지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됫병이 잘 터졌는데, 그럴 때면 병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와룡회사에는 제각각 다 하는 일들이 달랐다. 병을 닦는 사람, 닦은 병에 술을 담는 사람, 술병에 라벨을 붙이는 사람 등 담당이 있었다. 바닥을 청소하는 여자도 따로 있었는데, 수거된 소주병에 있는 네떼루(네임 택)를 떼어내면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치우는 일을 했다.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 안에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고가 나곤 한다. 한 번은 허리를 숙여 바닥을 청소하던 여자의 머리카락이 소주병을 닦는 솔에 감겨서, 기계를 정지시키고 병원에 가야 하는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다.

 

남숙은 큰 사고 없이 와룡회사에서 착실하게 일을 했다. 당시 고구마 주정으로 만든 와룡소주는 인천에서 인기가 좋았고, 강화나 바닷가 어선으로 많이 나갔다. 현대극장이나 미림극장에서는 와룡소주 광고도 했는데, 용이 멋들어지게 쏴아아악 나와서 흔들어대다가 와룡소주가 나오는 선전이었다. 공장은 겨울에 바쁘게 돌아갔다. 특히 크리스마스부터 음력 명일 때까지가 대목이었다. 그러면 공장에 여자들은 열하루 많게는 스무날까지 밤을 새워서 일을 하고 그랬다.

 

공장에서 밤을 새우며 일한 지 닷새쯤 지났을 때 열두 살 먹은 남숙의 딸 도영과 여섯 살배기 막내아들 상규가 찾아왔다. 상규는 엄마를 보자마자 울었다. 여섯 살 먹은 나이 때까지 엄마 젖을 떼지 못한 상규는 며칠 동안 내내 울었던 게 분명하다. 남숙에게 달려들어 치마꼬리에 매달려 놓지를 않았다. 돈을 쥐여 줘도 그냥 던져버렸다. 여러 날 시간 일로 지쳐있던 와룡회사 여자들은 눈이 뚱그레졌다. 그러면서도 이해했다. 여섯 살 상규에게 하루라도 엄마를 못 본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여자들은 충분히 알았다. 남숙은 사무실에 들어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영과 상규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 도영은 기분이 좋았다.

 

엄마 휴가 얻었어?” 하며 싱글벙글한 도영에게, 남숙은 말했다.

 

너 또 상규 데리고 오면 국물도 없어. 다신 데리고 오지 마.”

 

알았어~” 하고 대답하며 도영은 웃는다. 지금 엄마 손을 잡고 집에 가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이 지났다. 2020년 새해를 맞이하여 남숙과 인구와 상규는 거실에 둘러 앉아있다. 인구와 상규는 유리 글라스에 진로 소주를 콸콸 따른다. 남숙은 그런 인구와 상규를 보며, 화학소주를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냐며 한소리 한다. 오래전 와룡회사에서 갓 맞춘 술을 먹으면, 달큼해서 계속 먹게 되었다고, 그래서 술에 취해서 집에 오는 날이 많았다고, 그 술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남숙은 말한다.

 

상규가 소주잔에 포도주를 조금 부으면서, 화학주 싫으면 담금술을 먹으라며 남숙에게 내민다. 남숙이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가져다 댄다.

 

아구 써.”

 

남숙의 주름진 얼굴에 찡그림까지 더해지니 주름이 배가 되었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인구와 상규가 배꼽을 잡고 웃는다. 상규가 말한다.

 

엄마 오래오래 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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