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일출, 아름다운 계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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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일출, 아름다운 계양산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20.01.1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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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 북쪽 대곡동... 백제국의 시조 '비류국' 탄생지 추정
'어머니 젖가슴 같다'는 계양산
'어머니 젖가슴 같다'는 계양산

계양산은 과거 어머니 젖가슴을 닮은 산이라고 하여 "집안에 딸을 낳고 싶으면 계양산에 들어가 100일 정성 기도를 올렸다"는 설화가 전해져내려온다. "계양산 정상에 먹구름이 걸치면 큰 비가 내렸다"는 설화도 있다.

또한 과거 고려시대 계양산 서쪽에는 개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안동포구 장모루촌이 존재하여 약200여개의 창고가 딸린 여각(현재의 호텔)이 존재하였다고 하며, 그곳에서 세계 최초의 격구가 탄생하였고, 춘향전 보다도 아름다운 '장모루전'이 탄생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계양산은 인천광역시의 가장 대표적인 산으로, 옛 부평도호부의 진산이었다.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있으며 높이는 해발 395 m이다. 인근에 딱히 높은 산이 없다보니 인접한 김포시 시내·고촌읍, 부천시는 물론 한강 건너 고양시, 서울특별시 강서구, 구로구에서도 계양산을 볼 수 있다.

하늘이 깨끗하면 파주시 남단에서도 볼 수 있다. 고양시와 접해있는 파주시 조리읍 장곡리에서 이 산까지 직선거리로 24 km. 수도권에서 날씨가 맑고 미세먼지 등이 없을 때, 이론상 가시거리 30 km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보다 더 북쪽에서도 볼 수 있다.

계양산이란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고려 수주 때에는 수주악, 안남도호부 때에는 안남산이라 하였으나, 계양도호부 때 계양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남산, 경명산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계양산이란 이름은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아고 붙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조선 후기~일제강점기~한국전쟁 전후에 이르는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남벌로 황폐해진 것을 조림사업으로 다시 녹화하였기 때문에, 이름과 달리 계수나무와 회양목은 없다.

현재는 조림사업 때 심어진 리기다소나무나 아카시아 등이 많다. 하지만 조림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참나무와 자작나무, 전나무 등으로 수종이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자생 생태계도 상당히 많이 복구된 편이다. 198818일 인천 최초의 도시자연공원(계양공원)으로 결정되고, 그 후 계양산은 시지정 제1호 공원이 되었다.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 등산로로 유명하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덕분에 2시간, 빠르면 1시간도 안 되는 코스로 정상까지 찍고 내려올 수 있어 등산 초보자가 올라가기에도 적당하다. 봄에는 진달래가 많이 피어 한 번쯤 올라가 구경하기에 좋다.

도시철도를 이용할 경우 인천도시철도 2호선 검바위역 또는 인천 1호선 계산역에서 하차하여 5번이나 6번 출구로 나간 다음 5~10분 정도 올라가면 등산로 입구에 다다를 수 있다. 계양산 정상에서는 인천 시내가 한눈에 보일 뿐 아니라 맑은 날에는 인천 앞바다와 부천 시내, 김포공항, 더 나아가 서울 시내의 63빌딩, 남산타워, 롯데월드타워까지도 보인다.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주변에 이보다 높은 산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계양산 동쪽 능선을 따라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계양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유물발굴 작업 등을 통해 한성백제 시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성곽은 상당부분 훼손되어 일부 영역을 제외하면 성벽의 흔적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옆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 정자는 공식명칭이 '육각정'임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은 거의 모두가 '팔각정'이라 부른다. 계양구 내에서의 인지도는 거의 지역 랜드마크 수준으로 팔각정이라 하면 산 중턱에 있는 이 정자를 말하는 것이다.

계양산 인근에는 천마산이 있다. 효성동 쪽 거주자라면 계양산 보단 천마산에 가는 것이 더 가깝고 등산 코스도 별 차이 없기 때문에 천마산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도시가 품고 있는 호젓한 계양산에 남아있는 계양산성 성터. 성은 해발 394m의 계양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으며 5~6세기경 축조되었다.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석성으로 오랜 역사 때문인지 고산성이라고 한다. 테를 두른 듯하다 하여 테뫼식 산성이라고 하며, 둘레 1184m 높이 2~3m 규모의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계양산성은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는 치열한 싸움터였지만, 그 이후 고성이나 폐성이라 하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갔다.

발굴조사가 시작된 건 2000년대부터다. 조사 당시 이곳에서는 논어를 적은 목간을 비롯해 산성 내에서 석제품을 가공해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석경과 돌을 갈아 만든 납석제 뚜껑 그리고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부토라고 쓰인 기와가 나온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전략적 군사 요충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수입해 사용된 자기류와 고려시대 전기의 청자가 함께 출토되었다.겹겹의 세월 속에 아스라이 사라져 흔적만 남아있는 성 터지만, 여전히 계양산성은 옛 사람들의 찬란했던 절정의 순간을 담고 있다.

과거 미추홀은 인천이고 이곳에 터를 잡은 시조는 비류이다. 역사에서는 이를 비류백제라 한다. 삼국사기23권 백제본기 백제 건국 설화에는 온조를 백제의 시조로 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비류와 온조가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떠났는데, 비류가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려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이 하남(河南, 위례)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 한강)가 흐르고……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바다평야냐의 선택에서 바다를 선택하는 비류의 의지를 살필 수 있는 대목이며, 그가 당시 왜 바다를 택했을까 하는 의문점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들이 풀어내야 할 과제이다.

그로부터 2030여 년이 지난 지금 인천은 해양도시의 대표적 공간으로 바다와 함께할 운명이라는 것을 비류왕조가 미리 예언한 것은 아닐까? 이와는 달리 이 책의 별단에 "일설에는, 시조는 비류왕이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와의 사이에 낳은 유류가 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래서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어머니(소서노)는 집안의 전 재산을 내놓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공이 많았다.

우리가 여기 남아 답답하게 지내기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하면서, 백제의 시조를 비류라 하였다.

여기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31)에서는 "소서노가 뇌물을 바치고 서북 백리지 미추홀과 하북 위례성 등을 얻어 소서노가 왕호를 칭하고 백제라 하더라.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돌아가시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의 유일한 여제왕의 창업자일 뿐더러 곧 고구려와 백제의 양국을 건설한 자이다"라 하여 소서노를 고구려와 백제 건국의 여제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계양산 북쪽 한강유역인 인천 서구 대곡동에 20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비류국은 계양산 북쪽에 소재한 대곡동 부근에 비류국이 탄생되었을 것이며, 백제 수도는 향후 인천 대곡동 ~ 서울 잠실 몽촌토성 ~ 공주 ~ 부여 등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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