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집에서 혼자 낳은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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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집에서 혼자 낳은 인구
  • 권근영
  • 승인 2020.01.22 0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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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숙과 형우의 첫째 아이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인구가 다녔던 시은고등공민학교. 중구 답동에 있었다.
인구가 다녔던 시은고등공민학교. 중구 답동에 있었다.

 

19561월 남숙은 송림1181번지 안방에서 첫째 아들 인구를 낳았다. 남숙은 배가 불러오는 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 동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낳아본 여자들에게 방법을 귀로 익히며 아이 낳을 준비를 했다. 남숙은 실하고 가위하고 대야를 챙겨 방으로 들어가, 혼자 아이를 낳았다. 아이 배에서부터 장 뼘 하나를 재서 태(탯줄)를 손으로 꽉 잡았다. 아이 쪽으로 태를 세 번 훑어서 피를 밀어내고, 실로 꽉 처맸다. 가위 들어갈 자리만 내놓고 이번에는 피를 반대쪽으로 훑어냈다. 그리고 실을 한 번 더 꼭 맸다. 실로 처맨 태의 가운데를 가위로 자르고, 아이와 연결된 태를 사리해서 배 위에 올렸다. 그 위에 솜을 대어 붕대를 둘렀다. 그렇게 삼을 가르고 아이를 포대기에 돌돌 말아서 뉘어 놓은 뒤에, 남숙이 힘을 주어 물컹하고 태를 낳았다. 남숙은 세숫대야에 아이의 태를 담아 형우에게 건넸다.

 

형우는 마당으로 가 장작더미에 불을 지폈다. 태를 태워서 재를 만드는 것이다. 형우는 누가 훔쳐 가지 못하도록 태를 꼭 지키고 있었다. 애기 태로 만든 약이 영양 덩어리라고 사람들은 누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그걸 달라고 난리였다. 남숙은 절대로 남에게 태를 줄 수 없다고 신신당부하며, 꼭 그 자리에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형우에게 말했다. 형우는 태를 태우고, 고추와 숯 그리고 흰 창호지를 달아 만든 인줄(금줄)을 대문에 걸어 놓았다. 남숙은 태를 태워 만든 재를 곱게 빻았다. 그걸 깨끗한 종이에 싸서 잘 뒀다가 아이 머리에 부스럼이 생기면 솔솔 뿌려주었다. 그렇게 해주면 헌 머리가 금방 괜찮아졌다.

 

형우의 누나는 남숙이 아들을 낳으니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러더니 조카를 수캐야 수캐야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을 수캐라고 지으라고 했다. 그때는 일부러 개똥이니, 수캐니 하는 막 부르는 이름으로 짓기도 했다. 한자를 쓰지 않으면 저승 명부에도 없고, 더러운 명칭을 저승사자가 꺼린다고 생각했다. 1년도 되기 전에 아이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오래 살라고 일부러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이고, 호적 신고를 늦게 하기도 했다. 남숙은 자신의 귀한 자식을 수캐라고 부르기 싫었다. 절대로 수캐라고 호적에 올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형우는 강화에 갔다.

 

형우는 1919년 강화도에서 1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우가 세 살 때 마을에 염병(장티푸스)이 퍼져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때 형우의 엄마가 죽었다. 형우가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형우는 석모도에 사는 큰누나를 찾아갔다. 시집을 간 큰누나네 집에 얹혀사는 건 너무 고달팠다. 구박이 심했고, 결국 열두 살에 인천으로 혼자 나와 살게 되었다. 형우는 아들의 이름을 얻으러 오랜만에 강화를 찾았다. 종친회를 찾아가 항렬을 따져 물어 이름을 지어왔다. 그래서 아이 이름이 인구가 되었다.

 

인구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숙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기운이 없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형편이 어려워, 의원을 만날 수도 없었다. 부족한 영양 상태에 아이를 낳다가 산모고 아이고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남숙은 사경을 헤맸다.

 

남숙이 몸져 누워있는 상황에서도 형우는 돈을 벌어야 했다. 형우는 갓난쟁이를 업고 참외전거리로 일을 나갔다. 그때 참외전거리 과일전 여자들이 아이를 챙겨줬다. 밥물을 끓여 아이를 먹이고 달랬다. 형우는 구루마로 짐을 나르는 일을 마치면 다시 아이를 업고 집에 갔다. 다음날이면 다시 아이를 업고 참외전거리로 나오는 날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형우는 장례사에 가서 칠성판을 사 왔다. 칠성판을 마루 밑에 두고, 언제 치를지 모를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숙이 정신을 차린 건 보름도 더 지난 후였다. 피부가 죽은 사람처럼 까맸다. 초상 치를 마음의 준비를 하던 가족들은 남숙이 눈을 뜨고 의식이 돌아오자 놀랐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남숙은 아이를 찾았다. 아이는 다행히 살아있었다. 하지만 개구리처럼 빼빼 말라 있는 꼴이 너무 가여웠다. 아이를 살리려면 자신이 어서 기운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남숙은 쌀을 끓여 아이를 먹였다. 젖 한 번 못 물리고, 밥물로 배를 채우게 했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가 마르고 작은 게 자기 때문이라고 탓했다.

 

남숙은 동인천 축현학교 위로 난 공원길을 올랐다. 홍예문을 넘어가면 한약방이 하나 있었다. 한약방 할아버지는 바짝 마른 인구의 맥을 짚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건강하게 살아있으니, 건강한 약을 먹이면 된다고 말했다. 남숙은 사슴뿔도 넣어 보약을 짓기로 했다. 남숙의 형편으로는 보약을 살 수 없었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앞집 순경 할머니가 돈을 보태줬다. 순경 할머니는 아들이 순경이라서, 동네 사람들이 순경 할머니라고 불렀다. 순경 할머니에게 돈을 꾸어다가 한약을 두 첩 지어와 인구를 먹였다. 남숙은 그 이후에도 어려울 때마다 동네 여자들에게 돈을 꾸고, 또 꾸어주면서 지냈다.

 

인구는 송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답동에 있던 시은고등공민학교에서 공부했다. 학급회장을 맡을 정도로 영특하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순경 할머니는 인구에게 돈을 쥐여주며, 이 돈으로 고등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다. 인구는 고민했다. 그러다 그 돈을 도로 돌려드렸다. 인구는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미국으로 수출하는 시계 케이스 공장에서 조각 기술을 익히고, 가구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48년째 나무 만지는 일을 하고 있다.

 

인구는 출근 준비를 하며 거울 앞에 서 있다. 머리 가운데가 듬성듬성 비어있다. 그 자리에 남아있는 얼마 되지 않는 머리카락이 소중한 듯, 정성껏 마사지해주고, 빗으로 이리 넘겨보고 저리 넘겨본다. 그 모습을 보던 남숙이 어딜 간다고 그렇게 멋을 부리냐, 라며 장난 섞인 말을 던진다. 부스럼이 나 빻은 태를 뿌려주던 머리가 동그랗게 커가고, 한때는 검고 풍성한 장발 스타일로 한껏 멋을 부리더니, 이제 인구의 머리는 어딘가 허전해 보인다. 인구는 몸을 돌려 남숙 앞에 선다. 그러더니 남숙의 머리를 두 손으로 꾹꾹 눌러 두피 마사지를 해준다. 이렇게 해야 머리카락도 안 빠지고, 치매도 안 걸린다고, 인구는 남숙에게 자주 하라고 당부한다. 남숙은 됐어, 저리 치워, 하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다. 인구도 따라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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