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 제국 순황제 고려 기황후 대청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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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제국 순황제 고려 기황후 대청도에서?
  • 이한수
  • 승인 2020.01.3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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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수의 팩션 인천사 ]
(12) MBC 드라마 [기황후], 조정우 웹소설 [기황후]

 

14세기 후반 동아시아는 세계사적 대격변기를 맞았다. 유라시아 대제국을 이뤘던 원나라의 국세가 저물어갈 무렵 중국 대륙에서는 한족(漢族)이 몽고족을 밀어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고려 왕조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국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세계사적 격변기였던 만큼 지배 집단의 이합집산이 극심했고 체제 질서가 붕괴되면서 평민들의 고통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극심했다. 한편으로는 신진 세력이 등장하여 새로운 지배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경합하면서 역사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 무렵 한국사 또한 풍전등화의 위기 국면에 빠졌다. 원 나라의 부마국이었던 고려의 한 여인이 원 제국의 황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아시아 판도를 휘저은 기황후 등극은 격변기 대표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 서술의 역린(逆鱗)이라고 할 만큼 그 평가 또한 매우 혼란스럽다. 제국의 공녀(貢女)로 끌려가 황후가 되어서는 조국 고려를 배신한 행위를 대표적인 매국 행위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존명(尊明)과 일제강점기 친일(親日)과는 구분해야 하는 동족상잔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드라마 [기황후]가 방영되면서 일어난 역사 왜곡 논란은 이 문제가 얼마나 예민한 문제인지 여실히 보여줬다.

 

MBC 드라마 [기황후] 대청도 장면

 

드라마 [기황후]가 방송될 때 역사적 사실을 너무 심하게 왜곡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사실 따지고 들자면 MBC 드라마 [기황후]는 사극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허구적 요소가 너무 많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원 나라 순제는 태자 시절에 대청도에 1년 반 정도 유배된 적이 있는데 그때 나이가 11살밖에 안 된 어린 애였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타환’(순제의 본명)이 대청도에서 기승냥’(기황후의 본명)과 만나 로맨스에 빠지는 것으로 그렸으니 얼핏 보면 참 허무맹랑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기승냥이 원나라 공녀로 끌려가 황궁의 궁녀로 일하다가 황제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되어서는 조국 고려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 것으로 그렸지만 기록에 의하면 자기 집안의 권세를 위해 전쟁까지 일으켰던 악녀로 평가받았다는 게 중론이다. 작가는 사극을 왜 이렇게 그렸을까. 먼저 스토리 대강을 살펴보자.

 

젊은 시절 기승냥왕유와 궁술 시합을 하며 친하게 지내다가 나중에 왕고의 수하에 들어가 뛰어난 무예로 명성을 얻는다. 드라마 제작진은 극중 인물이 실존 인물과 관련 없다고 했지만 왕유는 충혜왕, ‘왕고는 심양왕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그려낸 인물로 보인다. ‘왕고는 충선왕의 조카로 충혜왕의 숙부뻘이 되는 인물로 원나라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만주 지역의 심양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고려 태자인 왕유와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기승냥왕고의 수하에 있다가 나중에는 왕유와 가까워지면서 고려 왕족들의 세력 다툼에 껴들게 되고 대청도에 유배 와있는 원나라 황태자 타환(순제)을 만나면서 원나라 황족들의 세력 다툼에도 휘말려들게 된다. 당시 원제국을 휘어잡고 있던 연철(엘테무르)’이 대청도에 유배와 있던 타환을 암살하기 위해 첩자를 보내는데 기승냥타환을 도와 도피시킨다. ‘타환암살 시도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왕유’(충혜왕)는 폐위를 당하고 원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태자(玉子)가 들어온 곳 옥죽포(玉竹浦) 전경

 

원 태자 궁궐터 대청초등학교 전경

 

기승냥은 원나라 공녀로 끌려가는 도중에 왕유의 도움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원나라 황궁의 시녀로 들어가게 된다. 유배지에서 돌아와 허수아비 황제가 된 타환은 그녀가 대청도에서 자신을 도운 기승냥임을 알게 되고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기승냥왕유를 좋아하고 결국 왕유의 아이까지 갖게 되지만 황제 타환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그에게도 마음이 빼앗기게 된다. 황후 타나실리의 박해를 받으면서 갓낳은 아이까지 잃고 자신도 죽음의 위기에 빠지지만 황실 내부 세력 다툼 틈바구니에서 점차 입지를 확보하게 되고 황후 타나실리가 죽고 난 뒤에는 궁중의 실세로 자리잡게 된다.

 

MBC 드라마 [기황후] 혼례 장면

 

기황후는 아들 아유시다라가 원나라의 황제가 될 만큼 최고 권력자가 되고 그녀의 집안은 고려에서 막강한 세도가가 되면서 자주 노선을 펼치는 공민왕과 대결하게 된다. 반원정책을 폈던 공민왕이 대표적인 친원 세력이었던 기황후 오빠 기철을 제거하려고 하자 기황후는 고려 왕실을 치기 위해 몽고 군사를 파병한다. 이 사건은 후대에 와서 기황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든 대표적인 이유이다. 조선 초에 편찬된 역사서 <고려사절요>에도 "기황후와 기철 4형제가 갖은 횡포를 일삼고 경쟁적으로 악행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했던 자들을 반역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처럼 기황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극들은 그들을 좋게 그리고 있을까.

기황후는 전쟁 직후에 고려 공민왕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외교 문서를 보냈다. 원나라에 있던 최유의 모략에 속아 고려를 침략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황후는 원나라의 고려 공녀 압송을 중단시켰으며 원나라에 고려 문화를 유행시켰으며 고려가 원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는 걸 막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한다. 기황후의 행적에 대한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기황후에 대한 역사 평가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사서에는 폐륜 행각이 주로 기록된 기황후와 충혜왕을 조국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쓴 인물로 그린 사극은 드라마 [기황후]말고도 여럿 있다. 조정우의 웹소설 [기황후]최정주 장편소설 [기황후]도 기황후가 원제국의 고려 합병을 반대하고 고려의 자주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쓰는 것으로 그렸다.

 

역사서에는 기황후와 충혜왕의 행태가 너무 나쁘게 기록되어 있고 사극에는 반대로 너무 좋게만 그려져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논란의 핵심이 되는 바람에 세계사적 격변기 시대사를 조망하기에는 좀 아쉬운 점이 있다. 드라마에서 그린 연철백안의 갈등, ‘왕유왕고의 세력 다툼은 전체주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잘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 서구 유럽에서는 로마제국 교황 중심의 단일 체제가 점차 붕괴되면서 르네상스 문화 혁명이 시작되었고 동양에서는 몽고 제국에 맞서 한족(漢族)의 홍건적 반란, 일본족의 왜구 침략 등 거대 제국이 해체되어 가는 큰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고려 왕실도 내부 분열의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강을 파악해보면 거대 제국에 편입되어 동화되려는 친원파와 자민족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자주파의 대립 구도였다. 제국이 분열 해체될 위기로 치닫는 원나라도 내부 사정이 비슷했다. 군벌 세력의 중심 엘테무르(연철)’와 황제의 외가 옹기라트 가문의 실세 바얀(백안)’ 세력이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이런 세력 구도의 변화 양상을 큰 그림으로 그려낸 작품으로는 조정우의 웹소설 [기황후]를 추천하고 싶다. 대강 내용을 살펴보자.

 

기완자’(기황후 인물 이름)가 궁녀로 있을 당시 원나라 황궁은 몇 대에 걸쳐 자식을 황후로 들인 엘테무르’(연철)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황제 토곤테무르’(순제)의 눈에든 기완자백안의 조카 탈탈을 추천하여 시위대장으로 세우면서 점차 기완자는 힘을 키워나간다. ‘기완자는 귀비(후궁)가 되고 황제의 사랑이 돈독해지면서 엘테무르의딸이자 황후인 타나실리기완자를 시기하기 시작하지만 두 가문의 실력자 탈탈탑자해’(엘테무르의 차남)는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녀에게 접근한다. 두 가문의 암투는 극에 달하고 결국 엘테무르 집안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며 이후 기귀비의 세력은 더욱 강해진다. 고려인들은 충혜왕의 호위병으로 원나라 대도에 와 있던 최영 장군을 중심으로 순제와 기귀비의 편에서 반란군과 맞서 싸워 황제와 기귀비를 보위한다. 엘테무르 집안이 제거되면서 원나라 황실은 백안을 중심으로 한 옹기라트 가문과 기귀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인이 양대 세력으로 갈등하게 된다.

 

14세기 말경 원제국의 실질적 지배 세력이 고려인이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로 봐야 한다. 기귀비는 황후가 되고 그녀가 낳은 아유시다라는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며 원제국을 지킨 일등 공신 또한 고려인 최영이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원제국 시대 고려가 일제강점기 조선과 다를 바 없었다고 평가하는 건 합당하지 않아 보인다. 대륙 남쪽의 한족(漢族)이 홍건적의 난을 일으켜 도처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원 황조는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고려는 최영 장군을 파견하여 홍건적을 막아낼 정도로 동아시아의 실질적인 패권 국가였는데 고려 사회가 점차 친원파와 친명파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화되고 고려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 원제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동아시아의 판도는 홍건적 세력이 세운 명나라가 주도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친명파의 거두 이성계가 세운 새 왕조 조선이 친명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도 이런 북방 유목 민족 분열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외침이 민족 흥망에 큰 변수가 되기는 하지만 결정적 요인은 내부 분열이라는 깨달음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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