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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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
  • 최원영
  • 승인 2020.02.03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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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바보같은 사랑

 

 

풍경 #133. 바보가 되어야 사랑을 할 수 있다

 

겨울인데도 겨울답지 않은 따스함 때문에 자주 걷곤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과거에 스쳐 지나간 사람들과 나누었던 즐거운 기억들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줍니다. 한때는 정의롭다고 여긴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운 짓이었다고 느껴지는 기억들도 꽤 있습니다. 그 기억들은 제 마음속에서 한참 동안 머물면서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제 마음을 가득 채운 뒤에야 비로소 떠납니다.

떠오르는 생각 중에는 실연당한 과거의 인연들에 대한 아픈 추억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랑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몰랐었던 것이 이별의 원인이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아직도 사랑에는 서툴지만, 그래도 젊었을 때의 사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조금은 더 사랑을 잘 나눌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도 해봅니다.

 

안순혜 선생이 쓴 바보 되어주기에 볼펜과 몽당연필이 나누는 대화가 나옵니다.

 

약이 닳아 못 쓰게 된 볼펜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합니다.

이젠 아무도 날 거들떠보지도 않는군.”

옆에서 지켜보던 몽당연필도 힘없이 중얼거립니다.

나도 한때는 열심히 쓰였는데.”

정말이지 둘은 아무 쓸모도 없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입니다. 둘은 등을 돌린 채 말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문득 슬픔이 밀려옵니다. 그때였습니다.

누군가가 오더니 볼펜 머리를 돌리고 볼펜의 심을 빼더니 그곳에 몽당연필을 끼웁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가 된 겁니다.

이제 잘 써지지?”

 

내가 너의, 네가 나의 부족함을 알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때 사랑은 쓸모없던 우리를 쓸모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해줍니다.

누구나 사랑을 간절히 원합니다. 사랑 때문에 울고, 사랑 때문에 웃기도 합니다. 삶은 곧 사랑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우리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게 사랑입니다.

이렇게 간절한 사랑인데도, 그래서 의 사랑을 그에게 주고 있다고 믿고 살지만 실제로 행복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겠지만 그 이유를 모두 묶어 한 가지로 요약하면 사랑의 방법이 서툴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스테디셀러로 갈채를 받고 있는 이기주 선생의 책, 언어의 온도에는 저자가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어느 해인가 글을 쓰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했더니, 그 말을 들은 선배가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기주야,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또는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산타할아버지는 사랑의 화신입니다. 문고리에 걸어둔 텅 빈 양말 속에 산타할아버지가 밤사이에 장난감을 잔뜩 놓아두었으면, 하고 잠을 청하던 일이 제 기억 속에는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극심한 가난 탓에 장난감이라고는 부잣집 아이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일 년에 딱 한 번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그동안 잊고 살았던 기도까지 간절히 드리곤 했습니다.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는 것,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사실 어릴 때부터 산타할아버지를 통해 사랑의 올바른 방법을 이미 배웠던 것이 아닐까요. ‘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이별은 참으로 아픕니다. 그것도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그래서 그 사람을 더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은 견뎌내기가 너무도 힘듭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죽고 싶을 만큼 아팠던 그 경험이 자신을 강하게 키워내기도 합니다. 수십 년 동안 온갖 풍상을 맞으면서도 온전히 자라난 나무의 나이테와도 같습니다. 나이테가 있어서 쑥쑥 더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키워낸 풍성한 잎사귀들이 만들어낸 그늘이 사랑이 되어 온갖 동물들이 한여름 더위를 이겨내듯이 말입니다.

 

샤를르 드 푸코가 쓴 <나는 배웠다>라는 시가 류시화 선생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을 올바로 나누려면 우리가 어떤 배움이 있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일.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나는 배웠다.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있음을.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을.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또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나는 배웠다.

두 사람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음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해서

내 전부를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아니 가르침입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혹시라도 만나면 아마도 그 사람은 바보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바보가 되었으면 하는 욕심을 내어봅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테고, 그래야 그 사람의 마음이 열려 그의 사랑이 제게로 오는 것을 느끼는 감동과 축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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