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끼는 삶을 고운 그림책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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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끼는 삶을 고운 그림책 하나로
  • 최종규
  • 승인 2011.04.1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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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히라이데 마모루·이자와 마사코, 《집요한 과학씨, 야생 고양이를 찾아가다》

 겨울이 되어 날이 꽁꽁 얼어붙으면 뭇 풀은 모조리 숨을 죽입니다. 풀싹과 풀잎과 풀줄기는 바싹 말라서 죽습니다. 그러나 풀씨는 살며시 흙으로 내려앉은 채 겨울나기를 합니다. 곰이나 다람쥐가 겨울잠을 자듯이 풀씨 또한 겨울잠을 새근새근 잡니다.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면서 아주 가느다랗게 숨을 쉬며 겨울잠을 잡니다.

 풀씨가 겨울잠을 자는 줄 느끼거나 헤아리거나 살피는 사람은 아주 드물거나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대로 겨우내 옷을 두툼하게 껴입으며 겨울나기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입니다. 풀씨 하나야 살든 죽든 마르든 비틀어지든 아랑곳할 겨를이 없습니다.

 풀씨는 겨울잠을 자며 목숨을 잇고, 풀씨가 맺히기까지 햇볕을 쬐고 물을 마시고 바람을 들이마신 풀줄기와 풀잎과 풀뿌리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스스로 숨을 끊으며 흙기운을 북돋우는 거름이 됩니다.

 거름이 된 풀줄기와 풀잎과 풀뿌리는 새 풀씨가 새봄에 새싹을 틔워 새롭게 푸른삶을 이어가도록 밑바탕이 됩니다. 밑거름이 되어 줍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늙은 사람이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며 모든 새 어린 사람이 태어나 흙을 디디며 살아갈 수 있게 하듯이, 늙은 풀은 거름이 되고 늙은 사람은 슬기를 남긴 채 뒷사람 삶을 도우려 합니다.

.. 나는 고양이를 연구해요. 고양이가 어떻게 사는지 조사하기 위해 하루 종일 고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죠.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스스로 먹이를 찾아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고양이나 똑같은 고양이입니다. 하지만 사는 모습은 아주 다르지요 ..  (4쪽)

 봄이 되어 차츰 풀리는 날씨에 따라 온 들판에 작고 앙증맞은 풀잎이 돋습니다. 도시에서도 시멘트와 아스팔트 틈바구니 한켠에서 풀씨가 뿌리를 내리며 풀잎 고개를 내밉니다.

 시골사람은 산들바람을 느끼며 푸른 잎사귀를 뜯고, 도시사람은 바쁜 도시살이에 찌드느라 발밑 들풀을 느끼지 못합니다. 도시사람은 민들레라도 노란 꽃을 피워야 비로소 발밑을 내려다볼는지 모르지만, 막상 노란 민들레 꽃봉우리가 소담스레 방긋방긋 웃어도 발밑은커녕 흙 둘레조차 둘러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자동차를 모는 이들이라면 자동차 바퀴가 자그마한 꽃봉우리를 우지끈 짓밟는 줄조차 못 느끼겠지요.

 전쟁이란 자동차가 작은 풀잎과 꽃송이를 짓밟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못 느끼는 사이에 가녀린 목숨을 밟아 죽이듯, 우리 스스로 총칼을 들고 싸움터에 나가서 누군가를 해코지하거나 죽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낸 세금으로 사들이거나 갖춘 전쟁무기로 자꾸자꾸 군대가 커지고, 이 군대는 끝없이 적군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킵니다.

 봄이 와도 봄이 깃들지 않는 총부리요, 봄이 되어도 봄기운이 스미지 못하는 탱크요 전투기요 군함이요 대포입니다.

..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처음 본 고양이는 모래 색깔의 긴 털을 가진 고양이였어요. 가슴이 두근거렸지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며 지켜보았더니 한가로이 길을 걷다가 정육점을 기웃거리고 있었어요. 우리 마을 고양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요 … 캥거루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인데, 모습이 정말 신기했어요. 또 타조와 비슷하게 생긴 커다란 에뮤도 봤어요. 고개를 앞뒤로 흔들면서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귀여운 동물들과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는 어떤 모습일가요? ..  (8, 10쪽)

 그림책 《집요한 과학씨, 야생 고양이를 찾아가다》(웅진주니어,2008)를 읽습니다. 혼자서 읽고, 잠자리에 아이를 무릎에 앉히며 읽습니다. 아이는 그림책 첫머리에서는 좀 따분해 합니다. 첫머리는 그닥 재미나지 않거든요. 그러나 첫머리에서 글쓴이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날까 하고 꿈꾸는 모습’을 지나, 글쓴이가 이제 막 오스트레일리아에 닿아 들판을 누비며 들고양이를 찾아다니는 그림이 나오면, 아이는 눈빛을 반짝입니다.

 아이는 제 아버지와 함께 들판과 나무숲 사이에 고양이가 어디어디 숨었는가를 찾습니다. 귀를 찾고 꼬리를 찾습니다. 토끼가 맴돌며 노는 사이 자는 척하다가 덥석 한 마리 물어서 잡아먹는 모습을 봅니다.

 들고양이는 들토끼를 사냥해서 새끼한테 먹입니다. 사람 어버이는 밥을 지어 아이한테 먹입니다. 토끼는 풀을 뜯어 스스로 배를 채웁니다. 저마다 제자리에서 제 삶을 돌봅니다. 여우는 틈틈이 들고양이 사냥을 노리지만, 꾀바른 들고양이는 제 새끼를 잘 건사하면서 지키기도 하지만, 때때로 여우 또한 제 새끼를 먹이려는 사냥을 훌륭히 해내어 새끼 고양이 한두 마리를 잡기도 하겠지요.

 다 함께 살아가는 터전에서는 다 함께 고마운 밥을 얻어, 다 함께 고마운 하루를 보냅니다. 내 배가 고프듯 네 배가 고프며, 내 잠자리가 그립듯 네 잠자리 또한 그립습니다.

.. 사실 고양이들은 토끼 굴에서 살아요. 토끼에게는 반갑지 않은 이웃이죠. 하지만 새 보금자리를 찾는 것은 더 힘든 일이에요. 다행히 토끼 굴은 미로같이 복잡하기 때문에 토끼도 그리 쉽게 붙잡히지 않죠 … 완전히 자란 새끼들은 독립해서 자신만의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갔어요. 먹이도 물도 구하기 힘든 험한 계절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합니다. 새끼 고양이만이 아닙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유독 가뭄이 심한 해가 있어요. 그때는 어른 고양이도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땅을 찾아나섭니다. 몇 백 킬로미터나 되는 먼 곳까지 걸어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가 살기도 하지요 ..  (22∼23, 39쪽)

 그림책 《집요한 과학씨, 야생 고양이를 찾아가다》에 그림을 넣거나 글을 쓴 이들은 언제나 ‘고양이 꽁무니를 좇아다니며 고양이 삶 들여다보기’를 즐깁니다. 고양이 앞에서 고개를 내민다든지 옆에서 같이 걷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고양이끼리 조용히 살아가고프지, 옆에서 누가 알짱거리면 걸리적거리거나 귀찮으니까요. 사람들은 얌전히 고양이 둘레에서 고양이처럼 해바라기를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밥을 먹으면서 고양이 한삶을 지켜봅니다. 오래오래 고양이를 바라보며 한삶을 들여다보기에 《집요한 과학씨, 야생 고양이를 찾아가다》 같은 그림책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로서 하루 내내 제 아이를 들여다보며 가만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한삶을 그림책이나 글책으로 알뜰히 여밀 만합니다. 내 아이를 사랑하는 넋으로 내 아이 삶자락을 사진으로 날마다 한 장 두 장 담는 사람은, 꼭 이름난 사진쟁이가 아니더라도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사진책 하나를 빚습니다. 이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사진책은 ‘사진첩 한 권짜리 사진책’으로 될 수 있고, 누군가 책으로 내놓아 줄 수 있을 텐데, 따로 사진책으로 나오지 않고 ‘사진첩 한 권’으로 끝나더라도 빛깔 고운 이야기가 배어들기 마련입니다.

 책이란 남 앞에 드러내는 이야기꾸러미가 아니라, 나 스스로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믿는 좋은 삶을 적바림하는 이야기꾸러미이니까요.

 우리 나라에서도 누군가 들꽃 한 송이를 여러 해에 걸쳐 물끄러미 살펴보며 사랑하는 이야기를 그림책 하나로 그릴 수 있으리라 꿈을 꿉니다. 한국에서도 누군가 작은 멧새라든지 도시 한켠 참새 한 마리를 오래오래 마주하며 살갑거나 포근한 이야기를 일구어 그림책 하나로 여밀 수 있으리라 꿈을 꿉니다.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거미를 바라보는 그림책도 좋습니다. 우리 집 멍멍이 이야기를 담는 그림책도 좋습니다. 텃밭에서 벌레 잡거나 풀 뜯는 그림책도 좋겠지요. 아침저녁으로 학교를 오가며 마주하는 동네나 골목이나 이웃이나 동무 이야기를 싣는 그림책도 좋아요. 나 스스로 내 삶을 살포시 담는 자그마한 이야기 한 자락이면 즐겁습니다. 아이 기저귀를 빨래하는 나날을 그림책으로 그릴 수 있어도 재미나요.

― 집요한 과학씨, 야생 고양이를 찾아가다 (히라이데 마모루 그림,이자와 마사코 글,조영겸 옮김,웅진주니어 펴냄,2008.1.28./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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