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를 걷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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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를 걷는 사랑
  • 인천in
  • 승인 2020.02.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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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어름사니 - 박남희

 

 

 

어름사니*

                                - 박남희

 

 

위험한 노래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

네 뒤에 숨어 출렁이는 기억을 만날까

너의 그림자를 만날까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타고 오르는 거미처럼

바람이 두고 온 길을 걷다 보면

뜻밖에도 지워진 기억을 만날까

 

노을 위를 걷다 보면 나를 만날까

얽히고설킨 노을 밖의 길을 만날까

길이 놓친 달빛을 만날까

달빛이 버린 꽃을 만날까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데

기억의 들판이 자꾸 낯선 길을 새로 만들고

기억이 버린 것들이 무심히 너를 기다리는데

네가 떠나보낸 나를 기다리는데

 

구름아

바람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

너와 함께 무심히 흘러온 나를 만날까

출렁이는 밧줄이 붙잡고 있는 바람을 따라

아득한 벼랑 위를 걷다 보면,

 

남사당패에서 줄을 타는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

 

 

어름(줄타기),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놀음)으로 구성된 남사당놀이는 많은 기예를 자랑하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남사당은 사당거사굿중패와 함께 조선 후기 연희자들의 후예이다. 우리나라 신라 원효의 무애희가 연희자에 의해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고 그 후 조선 후기까지 계승되었다. 유랑예인들은 일정한 주거없이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의 기예를 파는 천민들이었지만 우리 한국 전통 연희 수준을 한층 끌어올린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구문명이 들어오는 개화기를 기점으로 차츰 인기 있는 판소리나 악기 잡이로 직업을 전환하여 지금은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그 맥을 잇고 있다.

 

어름사니는 줄 타는 사람이다. 그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에 균형을 잡으며 외줄을 탄다. 줄타기를 하다가 발을 잘못 딛으면 어찌될까?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TV나 영화에서 어름사니의 공연을 볼 때마다 가슴을 졸인다. 어름사니는 줄 타는 사람이니까 대체로 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름사니도 처음부터 줄을 잘 타지는 못 하였을 터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어지지 않고 유연하게 줄을 타기까지 얼마나 미끄러지는 일을 반복하였을까. 그럴 때마다 제 스스로의 고독에 직면했을 어름사니. 자신의 몸과 체화된 외줄에서 마음대로 걷고, 마음대로 돌아서고, 마음대로 텅텅 튕기는 모습은 승화된 외로움의 실체가 아닐까.

 

어름사니를 투영하여 이 시를 읽어보면 더 공감이 간다 위험한 노래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네 뒤에 숨어 출렁이는 기억을 만날까/너의 그림자를 만날까.” 자조적인 질문으로 시작해서 이 시가 끝나도록 계속되는 만날까라고 반복되는 시구는 외줄타기의 외양과 닮아있다. 외줄타기는 아슬아슬 건너가는 과정이 전부이다. 바람이 두고 온 길처럼. 얽히고설킨 노을 밖의 길처럼, 줄 위에서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아무래도 화자는 외줄타기와 같은 짝사랑을 하는 건 아닐까. “길이 놓친 달빛을 만날까 / 달빛이 버린 꽃을 만날까와 같은 시행에서 그 단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어름사니가 외줄을 탈 때 떨어지지 않고 가느다란 줄을 건너는 모습은 지켜보는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의 공중 묘기는 너른 하늘을 찰나적으로 끌어오고, 흘러가는 구름을 정지화면으로 가져오기도 한다. 인간과 자연의 몰아일체를 어름사니에서 감지한 시인은 자신의 짝사랑을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타고 오르는 거미처럼어름사니에 투영시킨다.

 

기다리고 기다려도오지 않는 사랑이 능숙하게 줄을 타는 지경에는 승화되는 기억이 있다. 사랑도 아득한 벼랑 위를 걷다 보면 발효의 순간이 온다. 섬세하게 줄(시행)을 타는 시인을 읽으면 독자는 마음이 설렌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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