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 초선(初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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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초선(初銑)이
  • 김희중
  • 승인 2020.02.2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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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중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회원

 

내 책상 위엔 그리 크지 않은 쇠 덩어리가 하나 있다. 우리 식구들이 언제부턴가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 초선이이다. 얼핏 듣기에 옛날의 기녀들 이름 같으나 전연 다른 놈이다. 전면 큰 원안에 P제철소 NO.1 B.F. 1973. 6. 8.이라고 둥그렇게 쓰여 있다. 그 글자들 밑의 작은 원 안에는 알파벳 Z를 거꾸로 세워서 비스듬히 한 S자 비슷하게 보이는 회사 마크가 선명하게 보인다. 뒷면은 아무표시도 없는 평범한 쇳덩어리일 뿐 이다. 바로 요놈이 우리 집 가보 1호다.

이놈은 가끔 출장을 나간다. 이 출장은 주로 아내가 주관한다. 친척, 친지 누구라도 해산을 할 때면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데 아내는 마치 자기 자신이 신통력을 지닌 듯 온갖 거드름을 다 피운다. 이 초선이의 전력을 소개하고 주의사항까지 일러주며 반환 일자는 어기지 말 것을 당부하고 나서야 이들에게 건네준다.

 

제철소에 새로 용광로를 건설하게 되면 그 용광로에서 처음 받아낸 쇳물은 영물로 생각하는 속설이 있다. 새로 건설한 용광로에서 처음으로 철광석을 녹여 만든 쇳물의 초탕을 부어 만든 쇠 덩어리를 출산하는 산모가 안고 있으면 산고를 줄여주고 순산하게 해 준다는 이야기이다.

이 가보 1호를 내 아내가 안고 두 아이를 순산하였고 이를 빌려갔던 친척들의 기대도 저버리지 않아 그 신통력의 신뢰도가 지금까지는 상당히 높은 샘이다. 건강하게 잘 자라 이제는 독립들을 한 아이들도 언젠가는 또 필요로 할 것이기에 지금까지 잘 모시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197368. P제철 제 1 고로 화입식 날. 출선구로부터 쏟아지는 쇳물이 홈을 따라 흐른다. 모든 이의 시선이 이를 쫓아간다. 흘러내려간 쇳물은 레들 카에 실려 제강공장 쪽으로 보내지거나 주선기에 투입되어 선철 괴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축조된 현대식 대용량의 용광로 1호에 불을 붙이고 처음으로 쇳물을 생산해 내는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탕을 부어 만든 것이 바로 이 초선이이다. 특별한 이름이 없는 이것을 나는 처음 만들어진 선철이라는 의미로 초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멋드 건(쇳물을 다 빼고 난 후 그 구멍을 다시 막는 기계)이 원위치 되었을 때, 우리들 모두의 가슴속은 나름대로의 감동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제철소 앞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돈도, 지식도 아무것도 없어서 겪었던 굴욕은 이 것 앞에서 무화되었다. 지난 수년의 세월 속에 어렵게 얻은 결과들은 성취감으로 바뀌어 분노도, 원망도, 슬픔도, 모두 함께 섞여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날의 성취와 영광이 담겨있는 이 쇠덩이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마다 용기를 불러내주는 신묘한 힘을 담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의 가보 1호인 것이다. 기실은 신묘한 힘이 정말 초선이 에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있다고 믿어왔다. 어려움을 만나면 이 쇳덩이를 보고 그 어려움을 녹여내었다. 더 야무진 내일을 만들고야 말겠다고 한 번 더 이를 악물곤 했다. 그렇게 실패를 경험할 때도 오늘까지 기 죽지 않고 줄달음질 쳐 온 것이다.

 

나에게 이 초선이가 자랑스러운 이유는 또 있다. 조국의 근대화시기에 내가 운 좋게 참여할 수 있었던, 내 평생에서 제일 빛나고 아름다운 한때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때 함께했던 훌륭한 상사, 동료, 후배, 부하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많이 부족했지만 나 또한 최선을 다 했던 그때의 그 영광스러운 기억을 되살려본다. 비록 부족한 나지만 변함없이, 여생도 너 자신을 믿으며 분발해야 한다고, 항상 가능성을 믿고 힘을 내라고, 여기 이 초선이가 격려와 응원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월 내가 겪었던 실망과 좌절의 경험을 자식들에게는 대물림하기 싫어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지금까지 자식들에게 간섭 하지 않고 내 힘자라는 대로 지원을 해왔다. 그런데 나에게는 독립을 했다고는 하나 공부를 계속 해야 한다면서 아직도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오십을 바라보는 아들 녀석, 쉽게 상대를 골라서 결혼했다가 이혼하게 되면 책임질 거냐며 미혼으로 남아 초등학교 교사를 하는 딸이 있다. 아직도 내 눈에는 뒤뚱거리며 서툴게 걸어가는 이 녀석들이 미덥지 않아 늘 노심초사한다. 그렇지만 믿고 있다. 언젠가는 내게 떡 두꺼비 같은 손자, 손녀들을 안겨주며 이제는 저희가 다 해드리겠다고 나서줄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석양이 눈부신 이른 저녁 살그머니 집을 나와 두 블럭 지난 코너에 있는 포장마차로 왔다. 그 포장마차는 우리 또래 늙은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그들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무슨 일을 했느냐보다는 어떤 일을 열심히 해서 마침내 성공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나도 한때는 잘 나가는 시절이 있었다는 걸로 끝난다. 그러나 오늘은 유난히 거리가 한산하여 아예 두 손을 내려놓고 우리는 코로나 19 얘기를 하며 걱정만을 나누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바이러스가 온통 세계를 웅성거리게 만들고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아직도 수많은 지구인을 우왕좌왕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 할 때도 나의 초선이는 출장을 가고 집에 없다. 생명을 앗아가는 나쁜 바이러스가 있다면 생명을 잉태하는 좋은 기운도 있다. 별 기대는 할 수 없을 지라도 나는 여기저기 초선이의 도움이 필요할 만한 곳을 기웃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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