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플 때에 이웃을 사랑한다
상태바
몸이 아플 때에 이웃을 사랑한다
  • 최종규
  • 승인 2011.04.17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읽기 삶읽기] 미우라 아야꼬,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

- 책이름 :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
- 글 : 미우라 아야꼬(미우라 아야코)
- 옮긴이 : 김갑수
- 펴낸곳 : 홍성사 (1988.11.5.)

 (1) 몸과 마음

 새벽부터 밤까지 집일을 붙잡다 보면, 잠자리에 들 즈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쑤신 곳이 없습니다. 손끝 발끝에다가 머리카락 끄트머리마저 욱씬욱씬합니다. 이렇게 쑤시고 결리며 저릴 때에는 그저 꼼짝없이 드러누워 아이고 아이고 읊을 뿐입니다. 이렇게 몸이 고단해서야 어찌 살아가나 싶으며 겨우 눈을 감습니다.

 그러나 아직 내 몸이 제법 튼튼하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잠든 지 너덧 시간이 흐르면, 또는 대여섯 시간이나 예닐곱 시간이 흐르면, 어느 만큼 새힘이 솟습니다. 욱씬거리던 몸이 제법 풀립니다.

 새벽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며 아이 오줌기저귀를 갑니다. 둘째를 밴 옆지기 몸을 조금 주무릅니다. 새벽녘에 새힘으로 일어나 맞이하는 새날을 곱씹습니다. 하늘이 내려준 고마운 목숨을 하늘이 베푼 새삼스러운 하루를 즐겁게 맞아들입니다. 사람은 죽지 않고 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죽을 때가 되면 죽겠지만, 살아야 할 때에는 이렇게 몸을 움직일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떻게든 사는 목숨이고, 어떻게는 살아가면서 내 길을 내 나름대로 걷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 나는 군국주의 시대의 여학생으로서 여러 차례 신사참배라는 것에 끌려나갔다. 전교생 천 여 명이 신사의 뜰에 정렬하여, “경례!” 하는 구령으로 일제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그렇게 머리를 숙일 때 우리 학생들의 가슴속에는 대체 무엇이 떠올랐을까. 오직 구령에 맞추어 머리를 숙이는 것일 뿐, 진심으로 기도하는 자는 없지 않았을까. 남의 구령에 따라 머리를 숙이는 ‘기도’란 아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 참된 신이란 어떤 분인가, 신 앞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고 있다면 우리 일본인의 생활은 좀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  (8∼9, 10쪽)

 내 몸이 요즈음보다 한결 튼튼하다고 느낄 때에는 옆지기 몸을 꽤 오래 꾹꾹 누르며 주물렀습니다. 내 몸이 차츰 힘들어진다고 느끼며 옆지기 몸을 못 주무르기도 하고, 애써 주물러도 조금만 주무르고 맙니다. 제 몸이 옆지기보다 더 안 좋은 몸이라면 어찌 되었을까 하고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보살필 노릇이었을까요. 아픈 사람끼리 골골거리며 복닥였을까요.

 믿음이란 늘 내 곁에 있다고 느낍니다. 믿음이란 언제나 내 몸이라고 느낍니다. 내 곁에 있는 모든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가 믿음이라고 느낍니다. 봄을 맞이해 새롭게 돋는 풀과 새로 피는 꽃 모두 믿음이라고 느낍니다. 겨울날 꽁꽁 얼어붙는 날에도 새벽바람으로 일어나 먹이를 찾으며 재잘거리는 멧개가 곧 믿음이라고 느낍니다. 도시에서도 참새나 까치나 비둘기가 먹이를 찾으러 부산을 떱니다. 도시사람은 도시 비둘기를 가리켜 닭둘기라고 비아냥거리곤 하는데, 도시사람 스스로 자연을 잃고 오로지 돈만 벌면서 밥·옷·집이 어디에서 비롯하여 어디로 흐르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두고는 그닥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습니다. 닭둘기라는 이름은 닭한테도 비둘기한테도 몹쓸 말이요 모진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들 사람은 스스로 사람다움을 잃거나 잊은 채 살아가면서, 정작 내 삶과 내 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이제는 하나도 안 아름답게 망가뜨리가를 느끼지조차 못하지 않나 싶습니다.

 도시에 살거나 도시를 좋아하는 일이 궂을 수 없습니다.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내 삶을 읽어야 합니다. 도시를 좋아하든 시골을 좋아하든 내 사람됨을 사랑해야 합니다. 착한 넋으로 착한 몸을 보살피고 착한 말을 나눌 때에 비로소 한 사람 목숨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나님의 청정함을 모르면 자신의 추악함을 모르는 법이다 … 얼굴을 씻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씻어 하루를 출발한다는 것은 얼마나 상쾌한 일이겠는가 … 상대방과 헤어질 생각이라면 몰라도 일생을 같이할 사람이라면 역시 기도할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을까. 아니, 기도 드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법이 아닐까 …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당했을 때 사람은 단지 슬퍼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을까. 슬퍼해도 좋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다, 좋고 나쁘고를 따질 겨를이 없다. 슬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  (23, 24, 32, 51쪽)

 도시에는 논밭이 없습니다. 논밭 하나 없는 도시이지만 온갖 곡식이 골고루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안 나는 블루베리 같은 먹을거리도 있고, 한겨울에도 수박이 있으며, 딸기철이 되려면 멀었으나 벌써부터 딸기가 백화점이든 마트이든 길거리이든 수북합니다.

 도시에는 짐승우리가 없습니다. 도시에서 소를 치거나 돼지를 치거나 닭을 치거나 개를 치지 않습니다. 도시사람은 짐승우리에서 똥오줌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을 모를 테고, 짐승 한 마리 기르는 일이란 ‘사람 하나 건사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손이 많이 가야 하는 줄을 모릅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도시사람은 오직 돈만 벌고 돈만 쓰면서 갖은 곡식과 고기를 즐깁니다. 삼치 한 마리나 참치 한 마리를 어떻게 낚는 줄을 알까요. 갈치 한 마리와 오징어 한 마리를 어떻게 잡는 줄을 느낄까요.

 벼 한 포기가 자라기까지 햇볕과 물과 흙과 바람을 얼마나 맞아들여야 하고, 이 벼를 어떻게 베고 깎아 쌀로 만들어야 비로소 밥거리가 되는가 하는 흐름을 어느 만큼 알는지요. 같은 10킬로그램 쌀자루라 할 때에 몇 만 원 더 얹으면 유기농 쌀을 사다 먹을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유기농 쌀은 돈 몇 만 원이 아닙니다. 유기농 푸성귀 또한 돈 몇 만 원이 아니에요. 유기농이란 똥과 오줌을 삭혀 거름으로 쓰고, 풀약을 안 치면서 사람이 손으로 풀을 하나하나 뽑으며 짓는 흙일굼입니다.

 돈을 치르지 말고 스스로 흙을 만져 볼 노릇입니다. 삼성이라는 재벌회사를 꾸리는 분이든, 한 해에 7억 원을 받는다는 운동선수이든, 은행에서 일하는 분이든, 7급 공무원이든, 초등학교 교사나 교장이든, 누구나 밥을 하루 세 끼니씩 먹는다 한다면, 한 해에 한 번쯤이라도 내가 비우는 밥그릇이 어디에서 비롯하여 어떻게 손질하여 내 밥상에까지 오르는가를 깨닫도록 몸을 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에는 가을철이면 ‘농번기 방학’을 열흘쯤 두어 가을걷이와 가을일에 아이들도 품을 거들도록 했는데, 오늘날에도 도시사람들은 누구나 가을날 한창 바쁠 때에 열흘쯤 회사일을 쉬면서 ‘내 밥을 마무리짓는 가을일’이라도 스스로 겪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그러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영혼의 문제를 놓고 만족할 만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은 그렇게 흔치가 않다. 그것이 언제까지나 나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 때문에, (나는 그들(부모)에게 무엇을 해 드렸단 말인가) 하며 후회하는 것이다 … 진정으로 사람의 생명을 애석해 한다면 그 죽음을 계기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영혼의 문제와 맞서서 무엇인가를 새롭게 파악하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생명을 아끼는 일이 아닐까 … 한 사람의 죽음에 의해 자신이 크게 변화되는 것이 참으로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을 몇 사람씩이나 사별하면서도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56, 57쪽)

 몸으로 움직이지 않고서야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깨닫습니다. 몸으로 아파하지 않고서야 마음으로 아파할 수 없겠다고 깨닫습니다.

 사람이라는 짐승은 생각을 한다기에, 생각으로 ‘아픈 이웃’을 어림하곤 합니다. 가난한 이웃이 얼마나 고될까 하고 생각한다든지, 불쌍한 이웃이 얼마나 힘들까 하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내 이웃이 얼마나 고되거나 힘든지 몸으로는 모르지만 머리로는 생각하면서 ‘불우이웃돕기’를 합니다. 저기 멀리, 이웃나라 일본으로도 따스한 손길을 보내자고 이야기합니다. 막상 집 잃고 식구 잃으며 모든 삶뿌리를 잃은 사람한테 물 한 병 보내 주자고 이야기합니다.

 돌이켜보면,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이 살아숨쉬는 동안 틈틈이 이웃돕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쓴 글이 책으로 되어 나올 때에 퍽 많은 사람이 사서 읽어 준 터라, 이렇게 당신이 뜻밖에 벌어들이는 돈을 푼푼이 모은 다음 우체국에서 찾아 십만 원이고 이십만 원이고 그때그때 나누었습니다. 때로는 꽤 목돈이다 싶을 돈을 이런저런 곳에 이름없이 맡기기도 했습니다.

 돈을 벌었기에 돈을 맡긴다 여길 수 있지만, 돈을 벌지 않던 때에도 사랑과 믿음을 나누며 살아오셨기 때문에, 돈이 있을 때에는 돈을 나눌 줄 알던 권정생 할아버지라고 느낍니다. 돈이 없을 때에는 돈이 없는 대로 무엇을 나누며 살아야 좋은가를 알았겠지요. 내 몸이 아프면서 내 이웃 몸이 얼마나 아파 힘들까를 느낍니다. 머리로 품는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깨닫는 느낌입니다. 밥을 굶고, 또 밥을 굶으면서, 배고픔이란 얼마나 사람을 미치도록 갉아먹거나 쓰러뜨리는가를 깨달은 사람은 배고픈 이웃한테 내 밥그릇을 내밀어 줍니다. 돈이 있어 밥 한 그릇 사먹으면 되지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밥 한 그릇에 얼마나 고마운 목숨이 깃드는가를 몸이 알기에 살며시 내밉니다.

 안다는 일이란 부질없습니다. 지식을 갖춘다는 일이란 덧없습니다. 더 알든 덜 알든, 사람이라면 살아야 합니다. 삶이란 지식으로 꾸리지 않습니다. 요리 지식이 있대서 밥하기를 잘 해내지 않습니다. 밥을 할 때에 쌀알을 낱낱이 세거나 무게를 꼼꼼이 재면서 하지 않습니다. 밥물을 비이커에 몇 그램인지 따져서 맞추지 않습니다. 전기밥솥에 안치면 그만인 밥하기인 오늘날이라지만, 예부터 아주아주 오랫동안 밥하기는 불을 지펴서 했고, 불을 지필 때에 장작을 얼마나 쓴다든지 불을 몇 분 몇 초 동안 지핀다든지 하는 통계란 없습니다. 그저 나와 내 살붙이가 먹을 밥에 들이는 땀과 품과 사랑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란 삶이요 사랑이며 몸과 마음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란 돈이나 겉치레나 눈치레가 아닙니다.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누리는 삶이고, 몸으로 맞아들여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2) 미우라 아야코 님 문학

 미우라 아야코 님은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라는 책을 씁니다. 일본에서는 1978년에 마무리지은 글이고, 한국에서는 1988년에 옮겨집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은 모두 열두 꼭지로 나누어 열두 갈래로 돌아볼 만한 우리 삶자락에 따라 어떻게 내 삶을 들여다보고 어떻게 두 손길을 모아 비손하면 좋을지를 톺아봅니다.

 비손이란 돈바람이나 이름바람이 아닙니다. 비손이란 나 하나만 잘 되기를 비는 속좁은 꿍꿍이가 아닙니다. 비손이란 나 스스로 그닥 착하게 살아오지 못했다고 뉘우치면서, 이제부터 부디 착하게 살아가도록 힘을 보태어 달라고, 아니 이제부터 착하게 살아갈 테니까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나를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며 북돋우기도 해 달라는 다짐입니다.

.. 남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유연성을 허용하지 않는 매서운 것이다. 자신이 받은 상처는 자신이 아파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함께 앓자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질병을 앓기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에 그친다면 질병이란 자신에게 단지 마이너스의 기간을 의미할 따름이다 … 내가 병에 걸린 이상 환자로서 생각해야 할 것은 완쾌에 대한 노력과 동시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  (26, 31, 42쪽)

 미우라 아야코 님은 머리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스스로 ‘머리로 글을 쓸 만큼 똑똑하지 않’기 때문이라 할는지 모르지만, 미우라 아야코 님은 오래도록 몸앓이를 하며 드러누운 삶에 따라 글을 씁니다. 당신이 몸으로 부대낀 삶만큼 글을 씁니다. 당신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 눈높이라든지, 당신보다 덜 아픈 채 살아가는 사람 눈높이로는 글을 쓰지 않습니다.

 당신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을 우러르며 글을 쓰지 않습니다. 당신보다 덜 아픈 사람을 얕잡으며 글을 쓰지도 않아요. 그저 당신이 겪는 아픔만큼 글을 씁니다. 당신으로서는 당신만큼이라는 무게와 깊이와 너비가 이만하다고 들려줍니다. 자랑도 아니지만 들추기도 아니에요. 그저 미우라 아야코 님 삶을 보여주기만 합니다. 아프기만 했던 삶에서 아픈 삶으로 나아지고, 아픈 삶에서 눈물나는 삶으로 달라지다가는, 눈물나는 삶에서 웃는 삶으로 시나브로 옮기는 모습을 글로 찬찬히 담습니다.

.. 기도란 이와 같이 점차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닐까 … 누군가에 대해 원한을 가지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설 수는 없다 … 인생의 가장 깊은 슬픔을 맞았을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우러러 기도할 수가 있단 말인가 …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결코 아니다 ..  (36, 37, 51, 97쪽)

 그렇지만 워낙 아픈 사람이다 보니, 웃는 삶으로 나아가려 하다가도 금세 첫자리로 돌아갑니다. 스스로 바보짓을 하고 난 뒤 내 바보짓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가를 새삼스레 부끄러워 하면서 이 모습 또한 고스란히 적바림합니다.

 예수님은 바보스럽거나 멍청하거나 어리석거나 형편없는 제자들한테 다시금 같은 사랑과 믿음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땅 숱한, 아니 이 땅 모든 어머님들은 당신 집식구한테 날이면 날마다 예순 해 일흔 해 여든 해에 걸쳐 하루에 두세 끼니 꼬박꼬박 밥을 차려 주었습니다. 집식구가 밥을 고맙게 먹든 그냥 입구멍에 퍼넣든, 이 땅 모든 어머님들은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청소를 하며 한삶을 보냈습니다.

.. 몇 해 전부터 나는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것은 사람들이 제공되는 요리를 거의 그대로 남겨 두기 때문이다. 그대로 남은 요리를 종업원은 아낌없이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쏟아 버린다. 음식을 남기는 자도 또한 남은 요리를 처리하는 자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조금도 아까움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 도대체 물질적 번영이 가져다준 것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황폐만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물품의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는 자들에게 인간 생명의 존귀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 도시로 나올 때는 타락하리라는 것을 당사자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자기만은 결코 그런 사람과는 다르다 하며 꿈을 안고 도시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몇 해 만에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만큼 인간이 변해 버릴 수 있을까. 사람은 곧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변한다고 한다. 집을 떠날 때 가장 가까운 자는 친구이다. 바로 그 친구가 때로 악의 유혹자가 된다. 도박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있으면 어느덧 자신도 도박을 즐기게 된다 ..  (89, 104쪽)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는 성경과 예배당에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은 틀림없이 성경에도 깃들고 예배당에도 깃듭니다. 성경에 하느님이 안 깃든다든지, 예배당에 하느님이 안 깃들 까닭이 없습니다. 목회자 말씀에도 하느님은 깃듭니다. 신학자 연구와 논문에도 하느님이 깃듭니다. 하느님은 성당에도 깃들고 교회에도 깃듭니다. 하느님은 절집에도 깃들고 여느 살림집에도 깃듭니다.

 우치무라 간조 님이 무교회주의를 외쳤다지만 ‘무교회’ ‘주의’란 없습니다. 하느님이 깃든 자리가 어디인가를 제대로 깨닫자는 외침일 뿐입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은 애써 하느님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도 하느님이고, 내 살붙이도 하느님이거든요. 내 밥 한 그릇 또한 하느님이고, 내 옷가지 한 벌 또한 하느님입니다.

 내가 디디는 땅을 이루는 흙알갱이 하나 또한 하느님입니다. 개구리와 뱀만 하느님이겠습니다. 도마뱀과 도룡뇽도 하느님입니다. 밥알 하나와 두부 한 조각과 깻잎 하나 또한 하느님입니다.

 물 한 모금이 하느님이고, 바람 한 점이 하느님입니다. 구름과 무지개를 비롯해서, 큰 물결과 모진 비바람이 하느님입니다.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라는 이야기책은 믿음이 있는 사람한테나 믿음이 없는 사람한테나, 아니 예배당에 나가는 사람한테나 예배당에 안 나가는 사람한테나 곱게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이야기책인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입니다. 날마다 받아들어 내 배를 채우는 밥그릇 하나가 얼마나 고마운지 기도해 보시지 않겠느냐고 말을 거는 이야기책입니다. 날마다 마주하는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가를 깨닫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길잡이책입니다.

 (3) 몸이 아플 때에 이웃을 사랑한다

 몸이 아플 때에 이웃을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내 몸이 아플 때에 내 이웃을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몸이 그닥 안 아프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못 키운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에 쉽게 병원에 가고 쉽게 약을 사다 먹으니까 자꾸자꾸 이웃사랑을 놓치거나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 어떤 때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이마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젖먹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도 아름답고, 늙은이를 섬기며 돌보는 젊은이도 아름답다 … 하나님은 죽어야 하는 그 당사자나 주위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시기를 택하여 죽음을 내리시는 것이다 … 사랑이란 입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임도 ..  (7, 55, 124쪽)

 몸이 아프지 않고서야 내 몸을 알기 어렵습니다. 몸이 아플 때를 맞이해야 비로소 바쁜 걸음을 멈춥니다. 다리를 절뚝이지 않고서야 다리가 아프거나 다리가 없어 걸음이 더디거나 못 걷는 사람 슬픔과 아픔을 알 길이 없습니다.

 자가용 모는 사람은 자전거 타는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은 걷는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걷는 사람은 바퀴걸상에 앉은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바퀴걸상에 앉은 사람은 아파서 자리에 드러눕기만 하는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아파서 드러눕기만 하는 사람은 미처 태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숱한 목숨붙이 마음을 모릅니다.

.. 나는 내 자신의 머리속에 추악한 장면이나 더러운 말들이 이 이상 기억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축적된 기억들이 문득 마음에 떠올라 언제 어느 곳에서 나 자신을 악으로 이끌어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  (106쪽)

 모든 씨앗은 사랑씨입니다. 풀도 짐승도 사랑씨입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씨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랑으로 이루어진 씨앗이래서 늘 사랑스레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사랑으로 맺은 씨라지만 막상 태어났을 때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삶이 되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누구나 몸이 아플 때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몸이 안 아플 때에도 온누리를 옳게 깨닫거나 바라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거룩하거나 멋지거나 아름다운 사람도 어김없이 있다고 느낍니다. 참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요. 하느님다운 사람이랄까요, 하느님을 가슴에 예쁘게 품는 사람이랄까요.

.. 어린아이가 아무리 졸라도 어른이 주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세 살짜리 어린이에게 자전거를 사 주거나 집을 마련해 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권총이나 칼을 사 주는 부모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에게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극진한 사랑이 부모에게 있기 때문이다 ..  (118∼119쪽)

 아픈 사람은 사랑을 나눕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못 나눕니다. 아픈 사람은 믿음을 나눕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믿음을 홀로 차지합니다.

 아파 보아야 깨닫습니다. 아프지 않을 때에는 그저 ‘알기’만 합니다. 아프며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프지 않을 때에는 온갖 책을 잔뜩 읽으면서 ‘알기’만 하겠지요.

 앎은 삶이 아닌 앎입니다. 삶은 앎이 아닌 삶입니다. 사람은 삶을 일구지 앎을 일굴 수 없습니다. 앎을 일구는 나날도 보람이 있거나 뜻이 있다 하겠지요. 그런데 하루하루 내 삶을 일구지 않고, 이 앎 저 앎 가득가득 머리에 담기만 하는 나날이란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즐겁거나 좋다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처세책이나 경영책이나 자기계발책은 다 쓰레기입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경력증명서는 모조리 종잇조각입니다.

 돈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은 사람이지 기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늘 아파하다가도 깨어나고, 깨어나다가도 아파하며, 하루하루 슬프면서 고맙게 살아갑니다. 기쁘다가 아파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사람인 나머지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 하고 자꾸자꾸 말을 걸고 되뇌면서 살아갑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