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사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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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사랑이었을까?
  • 허회숙
  • 승인 2020.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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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허회숙 / 전 인천시의회 의원
인일여고 교정
인일여고 교정

오랜 만에 캐나다에 사는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캐나다에도 코로나 때문에 교회 예배도 못하고 모임도 못 갖는다 한다. 넓은 땅 덩어리에 인구 밀도가 낮아 캐나다의 코로나 사정은 우리나 뉴욕보다 훨씬 나으리라 예상 했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더욱이 2년 넘게 눈만 뜬 채 의식도 없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병상에 누워 있는 친구 남편이 있기에 마음은 더욱 무겁다. 잠시 후 문자만으로는 발동 걸린 친구들과의 수다떨기가 미진했던지 그룹 통화 싸인이 울린다. 친구 넷이 서로 번호표 받으려 애쓰며 앞 다퉈 소식 전하다 보니 30여 분이 훌쩍 지난다.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그 옛날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과 그 이후 오늘까지의 인생길이 주마등같이 머릿속에 스쳐 지난다.

우리 학교는 동인천역에서부터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교문까지 백여 미터 되는 긴 해군 병원 돌담길이 있었다.

봄이면 그 돌담 위로 노오란 개나리 꽃이 활짝 피어나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 주곤 했다. 중학교 때 까지 해군 병원이 있었는데 개나리 꽃 가지를 얻어 교실에 꽂고 싶어 하는 우리가 해군 병사들에게 꽃가지를 좀 달라고 하면 ‘언니 있는 사람만 이리와’하며 차별하여 꽃가지를 주며 약을 올리곤 했다. 교실 뒷편으로는 오정포 산이라고도 하는 기상대 산이 있어 봄이면 뻐꾹새가 뻐꾹 뻐꾹 울곤 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구슬프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였는지 그때마다 소녀들 마음도 어디 먼 곳으로 날아가곤 했다.

학교 뒷산의 진달래가 지고 나면 벚꽃과 목련이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5월이면 학교 울타리를 겸한 아카시아 숲에서 나는 꽃향기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윙윙대며 나는 꿀벌 소리도 요란했다. 만 평이 넘는 학교 부지 곳곳에 자리 잡은 큰 느티나무와 소나무들, 철따라 피어나는 장미를 비롯한 온갖 꽃들은 감성 풍부한 우리에게 비밀의 정원을 상상하게 해 주었다.

가을이면 교문에서부터 늘어선 코스모스 꽃길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꽃’이라고 어느 시인이 읊은 국화 꽃 무더기들이 노오란 은행잎과 빠알간 단풍과 섞여 무더기 무더기 피어 소녀들의 시심을 자극했다. 우리는 꽃잎과 은행잎, 단풍잎들을 따서 책갈피에 눌렀다가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보내곤 했다.

겨울이 오면 요즈음보다 훨씬 많은 눈이 자주 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등교 할 때면 어제까지 앙상했던 겨울 나목들이 요정의 흰 옷을 입고 늘어서 있곤 해 어느 낯 선 세계에 발을 디딘듯한 신비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낮에 눈이 내리는 날도 많아 낮 사이 내린 눈이 하교 길 학생들 발에 밟히면 언덕길은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변하곤 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에는 없는데 무슨 잘못인가를 저질러 반 전체가 책상위에 무릎 꿇고 반성하는 단체 기합을 받은 일이 있었다. 전교생이 모두 하교한 후 벌이 풀려 밖에 나와보니 언덕길이 빙판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왕에 버린 몸인데 복수나 하자하고 의기투합하여 셋씩 한 팀이 되어 썰매 타듯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구석구석까지 길을 매끄럽게 다져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조회 시간에 담임선생님께 넌지시 어제 어떻게 댁에 가셨느냐고 묻자, “말도 마라 수십 번 넘어져 허리 부러지지 않은 것만 다행이다.”라고 대답을 하신다. 박장대소하는 우리들을 보시며 문득 우리들의 장난 끼 때문에 그 길이 그리 미끄러웠구나하고 깨달으시는 선생님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모른다. 그 이후 눈 내리는 날 학생들 벌주기를 조심하신다는 전설이 우리 학교에 전해져 내려오게 되었다. 아무튼 우리 학교의 사계절은 어느 계절 할 것 없이 수많은 추억거리를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생각해 보면 정서적으로 가장 민감하던 사춘기 시절 6년을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환경 속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라고 여겨진다.

 

6년을 같은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추억을 공유하는 동안 특별히 친구 네 명이 짝꿍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친구들 중에서 가장 성격이 착하고 헌신적이었던 현자는 세 살 연하인 남자를 만나 지금도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하는 삶을 잘 살고 있다.

새침하고 깍쟁이어서 친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 시간도 아까워하고, 노트 한번 빌리려도 눈치 보며 해야 했던 부의는 남편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가더니 신학을 다시 전공해 영혼을 구원하는 목사로 봉사하다가 지금은 원로 목사님으로 살고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철학적인 사색을 즐기고 신앙도 깊어 내가 지나치게 앞서 갈 때마다 적절히 내 옷깃을 잡아 앉히던 군자는 지금도 내 신앙과 인생길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성급하게 앞 뒤 가리지 않고 일을 벌이곤 해 ‘천둥벌거숭이’라는 별칭을 들으며 선생님들께 걱정을 듣곤 하던 나는 지금도 현실감각이 둔한 병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

우리 네 명은 거의 비슷비슷한 가정 형편에 집들도 가까워 서로 집에 놀러가기도 하고 등하교 길과 수업이 끝난 후 교실에 남아 늦은 밤까지 하던 자습도 함께 하곤 했다. 모범생 그룹이었지만 착실하게 자습하는 틈틈이 극장에도 몰래 가고 도너츠 집에 가서 단팟죽도 먹으며 함께 몰려다니곤 했다. 가랑 잎 굴러가는 모습에도 웃음을 터트렸던 그 시절이었다.

고 2의 겨울방학이 다가온 어느 날 과외라고는 받아 본 적 없는 우리에게 현자가 “얘들아 내 조카가 이번에 S상대에 무시험 합격을 했는데 우리 걔한테 석 달만 수학 과외 받아 볼래?” 하고 슬며시 충동질을 했다. 특히 수학이 약했던 나와 군자는 물론 수학에 자신 있어 하는 부의까지 승낙을 하여 우리 넷은 대학 새내기에게 그룹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율목동 골목 끝 조그마한 기와집의 건넌방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그 당시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안방에는 새내기 과외선생의 어머니가 몸이 편치 않으셔서 요양 중에 계셨다. 그 어머니는 일제시대 때 일본 유학을 하시며 연애결혼을 하신 분으로 조그마한 병원을 개원하고 계셨다. 단란했던 그 가정에 6〮 25동란의 광풍이 불어 닥치자 지식인층이었던 남편이 행불자가 되고 어머니 홀로 병원을 운영하시면서 세 자녀를 기르시느라 지치셔서 쉬고 계신 중이었다.

우리는 수학 공부도 중요하긴 했지만 말도 어눌하고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지곤 하는 애기 선생님 놀려 먹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로 내가 앞장서서 무슨 문제로든 선생님을 놀리면 열을 받아 얼굴이 빨개진 선생님이 반론을 제기하고 내가 다시 허점을 찌르면서 우리 넷이 까르르 웃음판을 벌이는 일이 잦았다.

나중에 들으니 그 때 병상에 누워 무료한 날들을 보내시고 계신 어머니에게 아들이 과외하는 날 찾아오는 여학생들의 발랄한 재치가 큰 즐거움을 주었다고 한다. 과외가 끝나고 몇 달 후 어느 날 현자가 나에게 속삭였다.

“얘, 〇〇 어머니가 내일 너만 데리고 오라고 하시네”

내가 무슨 일이냐고 하자 조카 생일인데 모두 부를 수는 없고 나만 대표로 데리고 와서 저녁 먹자고 하셨다고 한다. 다음 날 조심스럽게 방문한 나를 보며 어머니가 석 달 동안 내가 많이 웃겨 주어서 즐거웠다고 하신다.

그 해 10월 경희대에서 전국고등학생 학력경시대회가 열리고 내가 운 좋게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친구들이 모두 일류대에 진학하는 와중에 나만이 경희대로 진학하게 된 것이 너무도 괴롭고 다른 방법도 찾을 길 없는 답답한 마음을 지닌 채 입학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복잡하게 꼬인 심사로 학교 정문인 등용문 앞에 이르니 뜻밖에 새내기 과외선생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서 있었다. 웬일인가 물으니 어머니가 내가 제일 외로울테니 나에게 가 보라고 하셨단다. 그 날 점심도 사주고 생전 처음으로 남산 길 산책로도 걸었다.

그 날 이후 주말이면 창경원에도 가고, 극장도 가고, 도봉산 등산도 가곤 했다. 그는 매번 어머니가 짜 주신 스케줄과 용돈의 범위 내에서 나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한 학기 동안 데이트를 하면서 파악한 그는 고집과 자아가 강하고 대등한 대화를 즐기면서도 자기를 위한 내조자로서의 여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위로 서울의대 다니는 형과 밑으로 인일여고 우리 후배인 여동생 사이의 둘째 아들인 그는 외모도 반듯하고, 공부도 잘 하는 수재 급이어서 내가 점쳐 보아도 성공적인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 상상속의 낭만적인 사랑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서툰 만남, 내가 정신적으로 푸근히 기대기에는 너무도 어린 그와의 만남을 끝내려고 결심할 즈음 그는 그 학기를 끝낸 후 공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나는 몇 번인가 보내오는 그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별을 고했다. 그런 몇 달 후 저녁 결에 다리를 절룩이며 우리 집을 찾아오신 어머니가 그가 배치된 부대의 주소를 전해 주고 가셨다. 내가 존경하던 어머니의 지극하신 마음을 결국 배신하게 된 나를 자책도 하고 괴로워도 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마음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친구가 “연애 못하는 우리 조카가 굳이 우리 동기만 소개해 달라고 해서 〇〇를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그 친구는 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을 하는 애였다.

그 때 우리는 아직 아무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던 때였다. 결혼 후에는 명동에 나올 일도 잘 없을테니 모임 장소를 명동으로 하자고 해서 곧잘 명동 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그런 어느 날 앞에서 오고 있는 꼬마과외선생 커플과 만나게 되었다.

우리 넷이 설레발치며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그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나를 쏘아보기만 한다. 그의 옆에 선 친구에게만 얼렁뚱땅 인사를 마치고 그들과 헤어져 걷는 동안 우리 넷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후 친구가

“얘, 너 〇〇이와 잘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어?”

하며 한숨을 쉬었다.

모두들 결혼 한 후 친구들 14명이 모이는 그룹 속에 과외선생과 결혼한 친구도 합류하게 되었다. 항상 바쁜 나를 빼 놓고 친구들끼리 단체 관광으로 떠난 해외여행지는 과외선생의 성공적인 사업장이 있다는 쓰리랑카였다.

너무도 아름다운 곳에서 훌륭하게 성공했더라는 친구들의 말이 마음속으로는 얄밉기도 했지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될 밖에 없었다.

요즈음도 우리 친구들은 매달 모인다. 그럴 때 주 메뉴는 남편 일찍 보낸 몇몇 친구들 눈치 보며 남편 흉보는 일이다. 한 친구 왈 ‘나는 너무 미워 남편 꼴 안 보려 이불을 푹 씌웠더니 아이구 숨 막히게 이불은 왜 덮어 주냐고 하더라’ 한다. 깔깔 거리는 와중에 새내기 과외선생의 강남 사모님이신 친구의 한 마디 “야, 여자가 선생하는 꼴도 못 보아준 남편인데 더 말할 사람 있으면 나와 봐” 그 날의 왕중왕은 그 친구가 되었다.

은연중 마주치는 단짝 친구들과의 눈 길속 대화.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 옛날 그 것도 사랑이었을까?

허회숙

 

 

 

 

 

인천북부교육지원청 교육장

인천시의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인천부의장 역임.

에세이포레 등단(2018), 에세이포레운영이사.

수필집《칼국수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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