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가버린 호성, 사진 한 장에서 발견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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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가버린 호성, 사진 한 장에서 발견한 이름
  • 권근영
  • 승인 2020.04.01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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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7) 남숙과 형우의 수양아들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1966년 상규 돌잔치 사진. 맨 위 왼쪽이 형우이고 형우의 오른쪽에 호성이 있다.

남숙은 수도국산 언덕 너머 터를 다듬는데 송장이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무서웠지만, 궁금해서 언덕을 넘어 그곳에 가보았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 널이 꺼내어져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집터에서도 시체가 나올까 봐 두려웠다. 남숙은 동인천 역전에서 여인숙을 하는 동생 혜숙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가슴이 뛰었다. 그런 남숙에게 혜숙은 “성, 터 다듬어 놓은 데서는 안 나왔잖아 괜찮아 성”하면서 안심을 시켰다. 남숙을 항상 ‘성’이라고 부르는 혜숙은 대범하고 당찬 구석이 있었다.

혜숙은 영종 출신 남자와 혼인을 했다. 남자네는 집도 으리으리하게 크고, 마당에 저수지가 두 개나 있을 정도로 넓은 땅을 갖고 있었다. 가족과 친척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고, 머리가 좋았다. 영종 남자는 면 사무실에서 서기를 하고 있었는데 착하고 유식했다. 혜숙은 이 남자를 놓치기 싫었다. 둘은 살림을 꾸리며 동인천으로 넘어와 역 앞에 여인숙을 하나 차렸다.

동인천역에 차가 정차하면 사람들이 잔뜩 쏟아져 내렸다. 봄이면 구경한다고 경상도 전라도 같은 먼 데서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왔다. 고향에서 암만 일찍 출발한대도 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인천에 도착하면 시간이 늦었다. 하루 만에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기는 시간도 빠듯하고 아쉬워서 숙소를 잡아야 했다. 그런 손님들을 꼬이려고 동인천역 광장에 여인숙 여자들이 왔다 갔다 했다. 혜숙은 여인숙 이름을 크게 적은 박스를 목에 걸고, 광고했다. 손님을 뺏기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달려들어 끌어들였다.

 

남숙과 혜숙
남숙과 혜숙

 

그해 남숙과 혜숙은 둘 다 아이를 낳았다. 남숙은 형우와 혼인하고 10년 만에 얻게 된 첫 아이라 더없이 귀했다. 형우의 누이는 남숙더러 애도 못 낳는 여자라며 구박을 해댔고, 그때마다 수양아들 호성이 들을까 봐 가슴 졸이기도 했다. 호성은 남숙과 형우가 수양아들 삼은 혜숙의 아이다. 1947년에 태어나, 남숙과 형우의 첫 아이 인구보다는 8살이 많다. 혜숙이 스무 살 무렵에 남자를 하나 사귀어 아이를 가졌는데, 남자는 한국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했다. 혜숙은 막막했다. 그리고 영종 출신 남자와 새 시작을 하고 싶었다. 남숙은 동생의 아이를 데려다 키우기로 했다. 그 아이가 호성이다.

호성은 동명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녔다. 일반 국민학교도 못 보낼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아이를 맡기는 곳이었다. 육성회비도 못 내고, 도시락도 싸 들고 가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 굶지 말라고 종종 쌀밥과 새우젓을 줬다. 호성은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매번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남숙이 야단을 치면 굴뚝 밑에 쑤셔놓은 책가방을 들고나와 혼도 많이 났다. 수업 일수가 한참 모자랐는데 다행히 동명 학교를 졸업하고 라이터 공장에 취직했다.

배다리에서 송림로터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송림초등학교 옆에 우물이 있었다. 우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면 라이터 공장이 있고, 조그만 대폿집도 있었다. 호성은 그 라이터 공장에서 도금 기술자로 일했다. 사각형의 금속 라이터에 노란색 신쭈(신주, 황동)를 씌우는 거다. 갓 도금해서 나온 라이터는 황색인데, 사용할수록 손의 땀이 배 시커멓게 변했다. 호성은 금속 라이터를 까만색으로 도금하고 금방 벗겨지지 않는 기술을 개발했다.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돈도 제법 벌었지만, 가난한 남숙네서 그 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어느 날 남숙의 둘째 딸 도영이 “오빠 나 잠자리가 갖고 싶어”라고 말했다. 호성은 마당에서 쓰는 싸리비(싸리 빗자루)를 챙겨 들고 도영의 손을 잡았다. 둘은 가파른 언덕을 조금 내려가 경동네 앞마당으로 갔다. 동네에 너른 공터였는데, 바로 앞집이 경동네라 사람들이 ‘경동네 앞마당’이라고 불렀다. 잠자리들이 새까맣게 떼 지어서 바글바글 날아다녔다. 호성은 싸리비를 높이 쳐들고 마구 휘둘렀다. 싸리 사이사이에 잠자리들이 꼈다. 호성이 잠자리를 하나씩 빼서 도영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주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한 마리, 검지와 중지 사이에 한 마리, 중지와 약지 사이에 한 마리, 약지와 소지 사이에 한 마리. 양손 다해서 총 여덟 마리의 잠자리를 갖게 된 도영은 동네 아이들에게 뛰어가 자랑했다. “야~ 잠자리 봐라. 우리 오빠가 잡아줬다.” 그러면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나도 한 마리 줘, 나도 한 마리 줘”라고 했다. 도영은 손가락 사이를 하나씩 벌려, 아이들에게 한 마리씩 나눠줬다. 호성이 오빠가 잡아준 잠자리를 한 마리라도 놓칠세라 아이들에게 날개 잘 잡으라고 단단히 말했다. 잠자리 여덟 마리를 아이들에게 다 나눠주고 도영은 집으로 뛰어간다. 호성이 도영에게 잠자리 다 어떻게 했냐고 물으면, 친구들 나눠줘서 없다고 또 잡아달라고 한다. 그러면 호성은 싸리비와 도영의 손을 잡고 다시 잠자리를 잡으러 간다. 도영은 몸이 약하고 자주 아파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호성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그런 도영을 위해 잠자리를 잡아줄 수 있었다.

호성은 자신의 발등 위에 도영의 두 발을 올려놓았다. 양손을 마주 잡고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 하며 한 발 한 발 춤을 추듯 걸었다. 도영은 항상 재미나게 놀아주는 호성이 오빠가 좋았다. 그날도 호박밭으로 올라가는 호성을 보고 반가워서 달려갔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호성이 배를 움켜잡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도영이 배가 아프냐고 물었는데, 순간 호성의 주머니에서 약병 하나가 떨어졌다. 빨간색에 해골이 그려진 약병을 보자마자 어린 나이였음에도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직감했다. 도영은 그 병을 주워들고 남숙에게 달려갔다.

그게 도영이 호성을 본 마지막이다. 형우는 혼자 호성을 화장하고 왔다. 술이 잔뜩 취해서 수도국산 언덕을 다 올라오지 못하고, 경동네 앞마당에 주저앉았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로 짐승의 울음처럼 소리 내 울었다. 그 소리에 놀란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울고 있는 형우를 보았고, 경동이 엄마가 달려와 남숙에게 상황을 알렸다. 한 번도 큰소리 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고 얌전하고 남에게 흉잡힐 일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형우가 호성을 보내고 마음이 아파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울음을 토해냈다. 남숙과 인구와 도영이 내려가 형우를 부축해서 집으로 데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국산 저 언덕 너머에 호성과 연애하는 여자가 있었다고, 그 여자 집에서 둘을 심하게 반대했다고, 호성이 약을 먹은 걸 알고 여자도 따라서 약을 먹었다고, 쓰러진 여자를 일찍 발견해 목숨은 건졌다는 소문이 뒤늦게 도착했다.

어린 도영은 죽는다는 의미를 어렴풋이 알았지만, 잘은 몰랐다. 호성이 오빠가 어디 갔는지 궁금했지만, 그땐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며칠 뒤 상규의 돌잔치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에 호성이 있었다. 호성의 얼굴이 담긴 유일한 사진이 상규의 돌잔치 사진이라는 게 슬펐다. 새삼 기억에서 잊혀가는 이름을 사진 한 장에서 찾아낸다. 호성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을 모아본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부끄러워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도착한다. 남숙과 인구와 도영이 먼 기억을 더듬어 호성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함께 살았다는 증거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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