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꺽정 생가터와 아름다운 백화암 소재
서울의 본산대놀이에서 영향을 받아 대략 200여 년 전에 중부지역에 형성된 것이 산대 탈놀이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서울지역의 본산대놀이를 받아들여 18~19세기 중엽에 현지에서 재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양주에서 본산대를 초청해서 연희한 시기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 초로 알려져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현지 정착과 관련하여 김성대의 증언과 이두현의 조사는 18세기 후반인 1760~1800년대 정착설을 뒷받침하며, 이 밖에 채록자 미상의 1957년본은 19세기 초반인 1820~1830년대 정착설, 송석하와 최상수의 기록에 바탕을 둔 19세기 중반인 1850~1860년대 정착설 등이 있다.
위의 세 가지 견해는 양주 별산대놀이의 정착 시기가 대체로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에 걸쳐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정착했다는 견해는 문맥으로 보아 정착보다는 산대놀이를 시작했다는 시각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19세기 초반에는 양주의 산대놀이가 확실히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서울의 본산대놀이 중에서 각각 아현 산대, 사직골 딱딱이패, 구파발 산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세 가지 영향설이 존재한다. 양주 지역에서 세 곳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언이 나오는 것을 보면, 양주 지역에 온 본산대패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본산대패들이 지방 공연으로 공연 날짜 약속을 지키기 어려웠고, 특히 초파일이나 단오, 추석 등과 같은 세시 명절이 끼어 있을 때에는 여러 지역에서 초청하는 관계로 본산대패들이 중복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다양한 본산대패들이 다녀갔던 것으로 보인다.
양주에서 산대놀이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에 이을축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민들이 적극적으로 전승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관에서 산대놀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관아가 있는 읍치 지역이라는 특성 등이 두루 영향을 미쳤다. 한편 하급 관리뿐만 아니라 거사・한량들도 전승에 참여하였다.
특히 양주에서 놀이가 성행할 때에는 곳곳에서 많은 구경꾼과 장사치들이 모여, 상인들에게 자릿세나 찬조금을 받아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연희자 김성대는 1910년대 놀이판의 분위기를 증언하면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크게 떠드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엿장수・임시 술판 등의 움막이 형성되어 난장이 형성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양주 별산대놀이가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8년 무렵에 퇴기 박옥화가 당시 성행하던 양주 별산대를 기녀들에게 연습시켜 상업적인 전국 순회공연을 시도했으나 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실패하였다. 한편 1926년에서 1927년 무렵에는 서울 성북동, 지금의 동구마케팅고등학교 밑에 있는 넓은 마당에서 탈춤공연이 있었으며, 1929년 9월 12일 조선박람회 개장 시기에는 동대문 밖의 붕어우물 근처에서 수차례 공연하였다. 또 그해 겨울에는 조 대비의 거처인 경복궁의 자경전에서도 탈춤 공연 등이 있었다는 점에서 양주 고을 이외의 비정기적인 외부 공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일제강점기 말에 강제로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단오 행사로 복원되었으나, 6・25전쟁으로 탈이 소실되고 다수의 연희자들이 사망하면서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1964년 사직당 주변이 산사태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고 8명이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이후 사단법인 양주 별산대놀이 보존회가 결성되고 전수관이 건립되었으며, 체계적인 전수 교육과 놀이마당에서의 정기적인 공연이 이루어져 전승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시대에 따른 양주 지역 공동체와 별산대놀이의 변화양상을 보면, 크게 5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인 19세기에는 관과 민의 밀접한 관련 속에 산대놀이가 지역 공동체 문화로 정착이 되었다. 연희 주도층은 관아의 하급 잡역부와 상인 계층이었다. 당시 초파일 공연의 실시와 무계의 핵심적 참여로 산대놀이는 무속・불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녔다. 따라서 이 당시 양주 별산대놀이는 지역의 세시적 대동놀이로 전승되었다.
2기는 갑오개혁 이후부터 1920년대까지의 시기로, 산대놀이가 민 중심의 상업적 성격을 지니며 지역 공동체 문화의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상업성이 강화되면서, 지역의 판주와 상인층이 개최를 주도하면서 난장도 형성되었다. 또한 종교적 성격이 약화되고 연희 시기가 다양화되어, 상대적으로 놀이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시적으로 외부 공연이 시도되었지만, 지역에서 벌이는 세시적 대동놀이의 구심체 역할을 여전히 수행했다.
3기는 1930년대 이후의 일제강점기 후반기로, 일제의 억압에 의해 세시적 공연이 중단되고, 마을이 빈한한 농촌으로 바뀌게 되어 전승이 침체되었다. 당시 산대놀이는 일부 주민들의 내적 욕구에 의해 자발적인 신명풀이의 형태로 전승되었다.
4기는 광복 이후부터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전의 시기로, 복원과 중단이 반복되면서 전승력이 약화되었다. 광복 후에 비세시적인 상업적 공연을 통해 복원하려는 시도는 전쟁으로 타격을 입었으며, 산대놀이는 지역 문화의 구심체에서 마을 단위의 놀이로 축소됨과 동시에 공동체적 성격도 약화되었다.
5기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후로, 관의 재정적 지원이 증가하면서 체계적 전승이 이루어지고 외부 공연이 점차 증가한 시기이다. 하지만 관의 영향력 증가와 자체 전승 기반의 약화, 탈지역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지역민의 공동체 문화로서 지녔던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다.
양주 별산대놀이를 관람하려면 미리 양주시청에 문의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