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어떤 사진과 삶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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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어떤 사진과 삶이 있을까
  • 최종규
  • 승인 2011.04.1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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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채승우, 《사진을 찾아 떠나다》

 사진작가나 사진기자로 일하는 분들이 으레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그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진 이야기를 글이나 사진으로 엮어 사진책으로 묶는 일이란 아주 드뭅니다. 주머니에 돈이 있다면 혼자서라도 사진책을 내놓겠지요. 주머니에 돈이 없이 사진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사진찍기를 할 때부터 무척 고단합니다.

 주머니가 가난하대서 사진을 못 찍을 수 없습니다. 주머니가 넉넉하대서 사진을 잘 찍을 수 없습니다. 주머니가 가난하기에 스스로 사진을 익히면서 스스로 내 몸과 살림에 맞게 사진을 받아들입니다. 주머니가 넉넉하기에 이름난 사진학교에도 들어가고 나라밖으로 사진마실을 다녀옵니다. 수많은 사진책을 걱정없이 사서 읽을 만하겠지요.

 주머니가 가난한 사진쟁이나 사진즐김이는 사진책 사는 일을 엄두를 못 냅니다. 그나마 도서관에서 사진책이라도 갖추어 주면 좋으련만, 사진책을 찬찬히 갖추는 도서관이란 없습니다. 사진갤러리 같은 데에 찾아가면 온갖 사진책을 마음껏 돌아볼 수 있나요. 사진갤러리에서는 어떤 사진책을 얼마나 갖추려나요.

 다른 나라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사진은 으레 ‘돈과 이름과 힘이 있는’ 사람들 테두리에서 이루어지곤 합니다. 작게 조용히 즐기는 사진이 문화나 예술이나 삶으로 이루어지기에는 퍽 빠듯합니다.

 1995년에 사진기자가 되어 열 몇 해 만에 여섯 달짜리 ‘휴가 또는 외국연수’를 누릴 수 있었다는 채승우 님이 내놓은 사진책 《사진을 찾아 떠나다》를 읽습니다. 채승우 님은 당신이 사진기자로 일하던 곳을 신문사 아닌 ‘회사’라고 말합니다. 사진기자를 쓰는 ‘신문사 아닌 회사’에서 사진기자 한 사람을 여섯 달 동안 ‘휴가 또는 외국연수’를 보내 줄 만한 곳이 몇 군데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예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채승우 님은 사진마실을 떠났고, 《사진을 찾아 떠나다》가 태어납니다. 채승우 님은 돈을 마음껏 쓸 수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유럽으로 가는 편도 비행기삯뿐 아니라 마땅한 사진기나 필름이나 메모리카드 하나 살 만한 주머니가 안 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필름값은 메모리카드값보다 비싸다지만, 메모리카드가 있으려면 저장장치 부피가 넉넉한 셈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필름사진이나 디지털사진이나 장비값에 들여야 하는 돈은 매한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사진을 하자면, 나를 낳아 기른 어버이한테 돈이 많다든지, 내가 용케 돈 많이 받는 일터에 들어가 일할 수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채승우 님은 “유럽을 여행하며 사진을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 땅의 분위기와 냄새는 사진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9쪽).” 하고 말합니다. 마땅하고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도 똑같습니다. 내 이웃을 알려면 내 이웃을 찾아가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내 이웃을 다룬 책을 찾아서 읽는다든지 방송이나 기사를 읽는다고 내 이웃을 알거나 느낄 수는 없어요. 아니, ‘책에 적힌 모습’은 알겠으나, 막상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조차 못하기 일쑤입니다. 유럽을 마실하면서 유럽 냄새와 숨결을 맡을 수 있을 때에, 나로서는 ‘유럽에서 빚는 삶에 걸맞게 사진을 이루는 길’을 느끼거나 배웁니다. 이 나라 곳곳을 차근차근 디디며 이 나라 이웃을 마주한다면, 나로서는 ‘한국에서 일구는 삶에 알맞게 사진을 즐기는 길’을 느끼거나 배웁니다.

 채승우 님은 “축제가 끝날 때쯤, 나 역시 사진이 대중과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실험이란 적어도 저널리즘 사진에는 무의미할는지 모른다(39쪽).” 하고 말합니다. 이 또한 마땅하며 옳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대중이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중이란 또 누구일까요. 나는 대중 가운데 하나일까요, 민중 가운데 하나일까요. 또는, 나는 국민인가요 시민인가요. 나는 여느 사람인가요, 또는 읍민이나 면민인가요, 아니면 군민이거나 시골사람이거나 도시사람인가요.

 실험이란 어떤 일이고, 실험은 왜 할까요. 함께 가는 길이라 할 때에 ‘함께 가는 길을 가는 까닭’이란 무엇이고, 함께 가는 길은 어느 때에 즐거울까요. 마냥 함께 가기만 하면 언제라도 좋을는지요.

 채승우 님은 “사진가들이 사진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 대중에게 보이고 반응을 얻을 공간이 전시장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전시장과 잡지의 지면은 말하기 방법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전시장에서 말하기 위해서는 사진의 모양새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46쪽).” 하고 말합니다. 지난 2010년 사진잡지 《포토넷》이 사진잡지를 더 펴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에 사진잡지가 아예 없지 않습니다만, 참말 사진을 이야기하거나 사진을 사랑하거나 사진을 보여주거나 사진을 나누려 하는 사진잡지는 이제 없다고 말하더라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른 몇 가지 사진잡지를 깎아내리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몇 가지 사진잡지들이 사진잡지다운 모습과 뜻과 넋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누가 찍고, 사진은 누가 보며, 사진은 누가 즐길까요. 아무개가 찍으면 프로사진가 좋은 작품이고, 저무개가 찍으면 아마추어 풋내기 습작이 될는지요. 사진으로만 바라보아도 참으로 아름답기에 꾸준하게 태어나는 사진책일까요. 사진쟁이 이름이 없이 사진만 훌륭할 때에도 얼마든지 사진책을 엮어서 내놓는 한국 사진밭인가요.

 “지금 패션사진은 현대 사진 예술의 중요한 한 갈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어떤 사진가가 대중에게 인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술가로 취급받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244쪽).” 하는 말을 가만히 되씹습니다.

 ‘사진은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고 느낀다는 채승우 님이라 한다면, 이 말은 스스로 어긋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스스로 느낀다 하더라도 스스로 살아가려는 길은 다를 수 있어요. ‘대중한테 사랑받는 사진을 찍는다지만, 이이는 그저 상업사진을 하는 사람일 뿐, 예술사진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고 말할 만합니다. 또한, 상업사진이래서 굳이 예술사진으로 나아갈 까닭이 없고, 상업사진은 상업사진으로도 훌륭합니다.

 상업사진이란 돈을 버는 사진입니다. 처음부터 ‘돈을 벌겠다’고 해서 찍을 때에 상업사진입니다. 패션사진이란 상업사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옷차림을 살피는 사진이라 한다면 상업사진이 아닐 터이나, 오늘날 한국에서든 나라밖에서든 이루어지는 모든 패션사진은 돈을 버는 뜻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옷을 더 많이 팔아 돈을 더 많이 벌려는 회사에서 일감을 맡기는 패션사진이지, 돈하고는 동떨어진 채 예술을 이루려는 패션사진이란 없어요.

 생각해 보면, 돈벌이를 꾀하는 사진을 ‘사진이라 말해야 하는가’부터 따져야지 싶습니다. 예술사진이건 아니건, 사진인가 아닌가부터 따져야지 싶습니다. 상업사진이 ‘장사’로만 그치는지 ‘장사를 하며 즐기는 사진’인지를 따져야지 싶어요.

 책방 일을 하는 사람이나 책을 만드는 책마을 일꾼을 헤아려 봅니다. 책방 일꾼이나 책마을 일꾼이나 책을 팔아야 합니다. 언제나 장사를 합니다. 그러나, 책방 일꾼이 장사만 꾀한다든지 책마을 일꾼이 장사에만 마음을 빼앗긴다면 ‘우리가 즐겁게 마주할 만한 아름다운 책’은 만날 수 없습니다. 돈벌이를 꾀하기에 자꾸자꾸 베스트셀러 목록과 스테디셀러 책시렁을 마련합니다. 돈벌이는 돈벌이대로 해야 먹고살 수 있다는 뜻에서 하는 장사랑,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가멸차고 싶대서 하는 장사는 아주 달라요.

 돈을 버는 일이 나쁠 수 없습니다. 돈만 벌어들이니까 나쁘고, 돈벌이에 빠져 내 삶을 놓치거나 잃으니 나쁩니다. 돈은 벌지만 마음은 갈고닦지 못한다면, 돈을 벌면서 사랑과 믿음을 잃는다면, 이러한 장사꾼 삶이란 ‘상업’이라고만 해야지 ‘상업사진’이라 하면 안 됩니다. 예술사진이라 하기 어렵다 말하기 앞서, 사진이라 말하기부터 어려워요.

 우리는 사진을 이루는 바탕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다스리는 밑뿌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길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진을 마주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들어섰을 때, 저 안쪽에서 선명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잘생긴 청년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화려한 문명과 눈 마주치기가 부끄러워 몰래 한 장 찍었다(343쪽).”는 대목을 읽으며 아차 싶습니다. 그저 즐겁게 바라보며 사진 한 장 슬쩍 찍은 다음, 나중에 국제우편으로 사진을 보내 주면 되잖아요. 부끄러울 까닭이든 달리 무어라 느낄 까닭은 없어요. 스스럼없이 찍은 다음 스스럼없이 ‘너희들 참 예뻐 보여 찍었다. 괜찮지?’ 하고 말을 걸면 됩니다.

 ‘화려(華麗)한 문명’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으레 한자말을 써 버릇하니까 말뜻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인데, ‘화려’란 “환하게 빛나며 곱고 아름답다”를 뜻한다 합니다. “곱고 아름답다”를 함께 적는데, 곱다와 아름답다는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요. ‘곱다’는 모두 일곱 가지 뜻으로 쓰인다는데, 첫째로 “산뜻하고 아름답다”이며, 둘째로 “빛깔이 밝고 산뜻하여 보기 좋다”입니다. 말뜻을 놓고 살피자면, “환하게 빛나며 아름답다”는 고스란히 ‘곱다’ 뜻하고 같습니다. 그런데 ‘곱다’를 풀이하면서 ‘아름답다’를 말하기 때문에 한자말 ‘화려’를 풀이하는 말마디는 앞뒤가 어긋납니다. 겹말이에요. 그러니까, 한자말 ‘화려’로 가리키려 하는 모습이란 ‘곱다’는 모습이거나 ‘아름답다’는 모습입니다.

 사진기자 채승우 님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책방에 들러 이곳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참으로 보기 좋다’고 느꼈을 테지요. 참으로 보기 좋은 ‘아름다운 삶’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무지 사진으로 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구나 싶은 모습이었을 테며, 몰래찍기·훔쳐찍기·도둑찍기를 안 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몰래찍기·훔쳐찍기·도둑찍기를 다른 이름으로 나타내자면 ‘스냅 샷’입니다. 누군가는 ‘결정적 순간’이라 할 테지요. 내 마음속으로 사무치도록 파고드는 아름다운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사진을 찍습니다. 내 마음에만 담기에 더없이 크며 어여쁘기에 사진으로도 옮깁니다. 나 혼자만 보고 즐기기 아쉬워 여럿한테 보여주려고 사진에 싣습니다.

 사진이란 내가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면 아주 따분합니다. 달품을 받는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찍어야 하는 사진이라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거나 ‘내 가슴이 사무치게 저리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찍’어야 합니다. 돈을 받고 찍으니까요.

 이리하여, 웬만한 여느 신문사진은 웬만한 여느 패션사진과 다를 바 없이 예술사진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진이라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마음에서 샘솟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 사진기자 채승우 님이 여섯 달 동안 유럽으로 사진마실을 다녀오며 내놓은 책 《사진을 찾아 떠나다》를 들여다보면, 이 책 370쪽에 실린 사진 가운데 초점이 안 맞으면서 흔들린 사진은,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몰래 찍은 한 장뿐입니다. 맨 마지막 버스인지 자동차인지 창문으로 바라본 사진은 바람결이 묻는 사진이지 흔들린 사진이 아닙니다. 꼭 요 한 장만 초점 안 맞으면서 흔들린 사진입니다. 그런데, 370쪽에 이르는 채승우 님 사진으로서 ‘유럽마실을 다년 여섯 달 이야기’ 가운데 채승우 님 삶과 이야기와 가슴과 사랑이 묻어난 사진은 꼭 요 한 장뿐입니다.

 다른 사진들은 하나같이 ‘나 여기 갔다 왔어!’ 하는 느낌이 묻어납니다. ‘난 말이야, 이런 데까지 샅샅이 훑으며 돌아보았다구!’ 하는 몸짓이 깃듭니다. 그래요, 유럽을 갔다왔으니 유럽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줄 만하겠지요. 이런 길도 보여주고 저런 사진관이나 전시관도 보여줄 만합니다. 이름난 이런 사람들 모습이라든지, 손꼽히는 저런 작품 모습을 얼마든지 사진으로 내놓을 만합니다.

 여섯 달 동안 떠난 사진마실은 ‘구경하기’로 그칠 수 있습니다. 구경하기로 그친대서 나쁠 일이 없습니다. 여섯 달 동안 유럽사람 사진삶을 훔쳐보아도 괜찮습니다. 여섯 달 동안 하는 일 없이 유럽 맥주를 마시면서 후끈후끈한 밤을 보낸대서 나쁠 까닭이 없어요. 사진이란 굳어진 작품이나 틀에 박힌 예술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살아온 한 사람 발자국이고, 저렇게 태어나 저렇게 부대낀 한 사람 손때입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고흐한테 일본 판화 같은 그림을 그리라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판화쟁이한테 고흐처럼 그림을 그리라 할 수 없어요.

 덴마크사람은 덴마크땅에서 사진을 합니다. 중국사람은 중국땅에서 사진을 합니다. 북녘사람은 북녘에서, 남녘사람은 남녘에서 사진을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은 틀림없이 한국보다 사진 솜씨나 문화나 예술이나 문명이나 기술이나 재주나 제도나 정책이나 교육이나 잡지나 책이나, 어느 모로 보나 한국보다 빼어나거나 뛰어납니다. 한국 사진밭은 나라밖에서 배워야 할 대목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배우거나 저것을 배우거나, 한국에서 사진을 할 사람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말을 하면서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삼는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사진을 합니다.

 채승우 님은 무슨 사진을 어디에서 어떻게 하고플까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찾아 유럽으로 여섯 달을 떠났다가 돌아왔는데, 막상 한국에서 하고픈 사진이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 유럽나라 사진 이야기를 풀어내든, 유럽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 이야기를 묶어내든,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사람은 한국땅에서 살아갈 한국사람이고 한국 사진쟁이입니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이 《사진을 찾아 떠나다》를 읽을 일이나 까닭은 하나도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니, 남한테 읽히기 앞서, 채승우 님 스스로 되읽을 때에 《사진을 찾아 떠나다》라는 책으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를 곰곰이 새겨야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사진을 찾아 떠났습니다. 길을 떠났기에 보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도 사진을 했고, 오늘도 사진을 합니다. 오늘 하루, 채승우 님은 어디에서 누구하고 즐겁게 나눌 사진을 어떠한 넋과 손길과 마음밭으로 마주하시는가요.

― 사진을 찾아 떠나다 (채승우 글·사진,예담 펴냄,2010.6.10./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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