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미도 야유회와 비어홀 뒤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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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도 야유회와 비어홀 뒤풀이
  • 권근영
  • 승인 2020.05.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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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11) 남숙의 일터, 와룡소주
 팔미도 야유회에서 사무실 직원들과 찍은 사진. 윗줄 왼쪽 첫번째 한복을 입은 남숙이 있고, 그 옆에 양갈래 머리의 임양이 있다. 

1960년대, 40대인 남숙은 와룡회사에 취직했다. 와룡회사는 인천 신흥동에서 ‘와룡소주’를 만들던 공장이다. 남숙은 이곳에서 소주병 닦는 일을 했다. 이 홉짜리 병, 사 홉짜리 병, 됫병까지 크기가 다른 병에 솔을 깊이 집어넣어 병을 깨끗하게 세척해야 했다. 말갛게 헹군 병에 술을 따랐는데 조금이라도 이물질이 끼어있는 것을 발견하면, 사정없이 내다 버렸다. 그만큼 청결이 중요했다. 남숙은 야무진 성격으로 꼼꼼하게 병을 닦았다.

화룡회사에는 일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남숙과 같이 일하는 여자들은 병을 닦고, 닦은 병에 술을 담고, 술병에 라벨을 붙이고, 공장을 청소하는 일들을 나눠서 했다. 사무실 직원들은 술을 대량으로 가게에 납품하고, 물건에 대한 셈을 하고, 직원에게 월급을 주는 일들을 했다. 사무실에서 급사(심부름꾼)로 일하는 임양은 남숙 옆에 꼭 붙어 다니며, 무슨 일이든 떠들어댔다. 한 날은 사무실 직원들의 식사를 해주던 여자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새로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사무실 직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나와서 아침과 점심을 회사에서 먹었는데, 당장 식사를 준비해 줄 사람이 없자 임양은 짜증 난다고 투정 부렸다. 남숙은 사람을 구할 때까지 자기가 아침에 조금 일찍 나와서 식사를 준비해주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남숙은 아침 일찍 시장에 들러 장을 보았다. 식당 주방에는 솥이 세 개 있었다. 왼쪽에는 국 끓이는 솥이 있고, 가운데는 밥솥이 있었다. 나무를 때서 조선솥에 밥을 안치면 냄새가 구수하고 맛이 아주 좋았다. 오른쪽 솥에는 물을 팔팔 끓여서, 필요한 곳에 더운물을 대주는 데 사용했다. 밥과 국, 조물조물 간장과 깨소금에 무친 나물 반찬이 사무실 직원들 입맛에 아주 잘 맞았다. 사장은 남숙에게 앞으로 식당에서 일해달라고 부탁했다. 남숙은 ‘맛이 있니, 없니’ 하는 평가가 두려워, 사람을 구할 때까지만 하겠다고 했다. 사장은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남숙이 차려주는 음식을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남숙은 자연스럽게 오전에는 식당에서 음식을 하고, 점심시간 이후에는 소주병 닦는 일을 하게 되었다.

사무실 직원들은 종종 회식도 하고 야유회도 갔다. 임양이 이번 야유회 때는 남숙도 꼭 참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사무실 직원들끼리 가는 야유회에 혼자 끼기가 어색하고 민망했다. 임양은 더 큰 목소리로 자꾸 부추겨, 남숙이 동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남숙은 한복을 꺼내, 단정하게 나들이복으로 챙겨입었다.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팔미도였다. 팔미도에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새하얀 등대가 있었고,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이라 깨끗하고 박하지(돌게)도 많았다. 남숙은 양동이에 박하지를 잔뜩 담아오고 싶었지만, 직원들과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 통에 궤(게)를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팔미도 구경을 마치고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왔다. 남숙은 직원들과 숭의동에 있는 비어홀에 갔다. 사무실 직원인 김 씨는 기타와 피아노를 치는 연주자들에게 돈을 주고, 남숙에게 노래를 한 곡 하라고 했다. 남숙은 박자를 잘 못 맞춰서 노래를 부르기 싫다고 했다. 키가 쪼그맣고 예쁘장하게 생긴 피아노 연주자는 자신을 이미자라고 소개하더니, 자기만 믿으라고 했다. 피아노로 박자를 잘 맞춰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부르라고 했다. 떨리는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나훈아 노래를 불렀다. 비어홀의 다른 테이블 손님들이 가까이 와서는 손뼉을 치고, 몸을 들썩였다. 남숙이 노래를 마치니, 여기저기서 환호를 보냈다. 김 씨가 장난을 치며, 어디서 노래를 배웠냐고 물었다. 남숙은 민망해서, 여자가 배울 데가 어디에 있냐며, 그냥 아무렇게나 부른 거라고 말하고는 목이 타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튿날 출근하니 식당에 박스 세 개가 놓여있었다. 박스 하나를 열자 튀긴 닭 5마리가 있었다. 정종이 든 박스 하나와 와룡소주가 든 상자 하나에 남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좀 있으니 사장이 오더니, 남숙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비어홀에서 노래를 부른 게 소문이 나서, 식당에서 재주가 썩는 게 아깝다고 야단이었다. 남숙은 극진히 대우해주는 직원들에게 고마웠다. 마침 이날 김 씨가 김포와 강화 쪽으로 배달 가야 한다며, 박스를 집까지 실어다 준다고 했다. 남숙은 저녁에 식구들과 닭튀김을 맛있게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박스를 실은 차가 송림동 집에 도착하니 동생 혜숙이 와있었다. 남숙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박스의 내용물을 들키면 안 되었는데,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남숙은 자신의 엄마와 동생 혜숙에게 단단히 일렀다. 회사에 갔다 와서 술을 나눠줄 테니 절대 건들지 말라고 했다. 술병을 닦으면서도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남숙은 일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고, 혜숙은 이미 취해있었다. 그리고 남숙의 엄마가 머리에 피를 닦고 있었다. 술을 못 마시게 하자 혜숙이 술병으로 엄마의 머리를 친 것이다.

남숙은 배다리에 있는 병원으로 엄마를 모시고 갔다. 의사는 피부에 박혀 있는 유리 조각을 떼어내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엄마는 며칠을 더 병원에 다녀야 했다. 혜숙은 한동안 오지 않았다. 남숙은 혜숙의 술버릇과 폭력에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동생이 안쓰러웠다. 두 번이나 남편을 잃은 혜숙의 삶이 기구하게 느껴졌다. 남숙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는 와룡 회사에서 술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았다.

 

팔미도 야유회에서 여자 직원들과 찍은 사진.윗줄 세번째 한복을 입은 남숙이 있고, 그 오른쪽에 임양이 있다.
팔미도 야유회에서 여자 직원들과. 윗줄 세번째 한복을 입은 남숙, 그 오른쪽에 임양이 있다.
숭의동 비어홀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숙
숭의동 비어홀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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