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지 않은 사진, 엉성하지 않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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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지 않은 사진, 엉성하지 않은 삶
  • 최종규
  • 승인 2011.04.26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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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les Americanis》

 커다란 새가 하늘을 날아갑니다. 시골집 창문으로 새를 올려다봅니다.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는 새는 거룩하지도 않으나 엉성하지도 않습니다. 봄날을 맞이해 왜가리며 해오라기며 곧잘 만납니다. 이 새들은 봄을 맞이해 깨어난 개구리를 즐겁게 잡아먹습니다. 멧기슭에 보금자리를 튼 멧새 또한 개구리랑 개구리알까지 즐겁게 잡아먹습니다. 개구리는 엉성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습니다.

 사진책 《les Americanis》(Delpire,2007)를 읽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다 읽고 나서 또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책상맡에 다섯 달쯤 꽂아 놓고는 틈틈이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나는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이든 유섭 카쉬이든 요제프 쿠델카이든, 이런 사람들 사진을 사진잔치에서 구경해 보지 않습니다. 아니, 사진잔치에서 로버트 카파이든 안젤 아담스이든 만나지 못합니다. 다만 한 번,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은 사진잔치에서 만났습니다. 도무지 사진책으로 만나기 힘들다고 느끼던 어느 날, 마침 서울에서 살던 때에 살가도 사진잔치가 가까운 곳에서 열렸거든요.

 살가도 사진잔치를 보고 나서 십만 원을 웃도는 살가도 사진책을 두 권 장만했습니다. 하나를 먼저 사고 두 달 뒤에 살림돈을 추슬러 새로 하나 샀습니다. 로버트 카파도 안젤 아담스도 요제프 쿠델카도 유섭 카쉬도 푼푼이 살림돈을 그러모아 사진책을 장만해서 천천히 천천히 읽었습니다.

 썩 좋다 하기 어려운 사진장비를 쓰는 내 삶을 헤아립니다. 내가 사진책을 장만하는 데에 돈을 들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이 ‘마크 투’이니 ‘파노라마’이니 ‘핫셀’이니 ‘롤라이’이니 ‘라이카’이니 번쩍거리며 들고 다닐 때에 군침을 흘릴 까닭이 없습니다. 그동안 사진책에 들인 돈이라면 이 모든 사진장비를 두루 꿰차고도 남을 테니까요.

 나라밖 사진책 열 권이면 백만 원이 거뜬히 나옵니다. 나라밖 사진책 백 권이면 천만 원이 가벼이 나옵니다. 새책도 비싸고 헌책도 비쌉니다. 몇 천 권에 이르는 사진책을 이래저래 장만하면서 내 주머니는 어느 하루라도 넉넉한 적이 없습니다. 내 사진감을 필름으로 찍는 동안 필름값 떨어지는 소리를 안 들은 날이 없습니다. 찍고 싶은 만큼 실컷 사진을 찍은 때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필름사진을 찍을 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필름사진을 찍기 때문에 스스로 가리거나 추리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디지털사진을 찍을 적마다 가슴이 아립니다. 그렇지만 가슴이 아린 채 디지털사진을 찍으니까 ‘요 작은 녀석으로 내가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아낌없이 담습니다.

 사진책 《les Americanis》를 찬찬히 넘깁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이 담은 《미국사람들》에는 미국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진책에 실린 사람이 영국사람이거나 일본사람이거나 한국사람일 까닭이 없습니다. 모두들 미국사람입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은 숨겨지거나 감춰진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은 꾀죄죄하거나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은 뒷골목 사람이 아니요, 앞골목 사람 또한 아닙니다. 그저 미국사람을 담은 《미국사람들》입니다.

 미국사람이라 해서 더 대단하거나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그냥 미국에서 살아가니 그 모양과 결대로 미국사람입니다. 티벳사람이라 해서 더 대단하거나 어설프지 않습니다. 그저 티벳에서 살아가니 이 모습과 무늬대로 티벳사람이에요. 네팔에 간대서 인도에 간대서 버마에 간대서 파키스탄에 간대서 이란에 간대서 몽골에 간대서 …… 무슨 사진을 무슨 사람을 무슨 삶을 무슨 사랑을 얻거나 마주할는지요.

 잘 찍어야 할 사진이 아닙니다. 잘못 찍어도 될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찍을 사진입니다. 내가 싫어하지만 돈을 벌어야 하기에 찍을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보는 자리에서 찍으면 되는 사진입니다. 내가 보지 않았으나 내가 본 듯 꾸며서 찍을 사진이 아닙니다.

 잘 나거나 못난 사람이 아닌 나와 내 둘레 사람을 즐거이 찍으면 넉넉한 사진입니다.

 내 사진은 내 삶입니다. 내 사진에 담는 사람은 내 모습이거나 내 둘레 사람들 모습입니다. 내 사진에 깃들이는 사랑은 내가 나 스스로와 내 이웃한테 깃들이는 사랑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꾸릴 삶입니다. 내가 썩 좋아하지 않지만, 돈을 벌어야 하니까 억지로 얄궂은 매무새로 꾸릴 삶이지 않습니다.

 참을 밝힌다든지 거짓을 까밝힌다든지 하는 내 손이 아닙니다. 보이는 그대로가 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참이 아니며, 보이는 그대로가 거짓일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어떤 거짓이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배부르겠지요. 누군가는 배곯겠지요. 누군가는 힘겨이 일할 테지요. 누군가는 하느작거리며 노닥거리겠지요. 힘겨이 일하는 모습을 찍는대서 사회고발이 아닙니다. 노닥거리는 모습을 담는대서 한갓진 놀음놀이나 예술이 아닙니다.

 사진은 그대로 사진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진이면서 대단한 사진입니다. 엉성하지 않은 삶이면서 어수룩한 삶입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은 그예 미국사람을 사진으로 담아 《미국사람들》을 내놓습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이 살아가는 결대로 마주한 미국사람 이야기가 《미국사람들》에 깃듭니다. 이 책 하나로 미국사람 삶을 마무르지 않습니다. 이 책 하나가 미국사람 모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패션모델만이 미국사람이지 않고, 권력자나 문화예술인만이 미국사람이지 않습니다. 이름난 운동선수를 찍어야 미국사람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또한, 이름 안 났다는 여느 농사꾼이나 청소부를 찍는대서 새삼스럽거나 훌륭한 미국사람 사진이 되지 않아요. 모두 미국사람이고, 한결같이 사람이며, 똑같이 사랑스러운 목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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