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당한 동생 살려놓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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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당한 동생 살려놓으니...
  • 권근영
  • 승인 2020.06.24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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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13) 송림동에 살게 된 남숙의 동생, 경수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1977년. 왼쪽부터 혜숙, 남숙, 경수, 가운데 아이는 경수의 막내 딸 명화.

1971년 봄. 초저녁에 한 남자가 다급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와 남숙을 찾았다. 남자는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남숙의 동생 경수가 지금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교통사고였다. 트럭에 치여 뼈가 많이 부서졌고,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소식을 듣고 남숙은 하늘이 노래졌다.

남숙에게 경수는 4남매 중 하나뿐인 남동생이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지만, 제가 먹고살길 알아서 꾸려가는 영특한 동생이었다. 어려서 월미도 미군 부대를 드나들며 영어를 익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 부대에서 통역 일을 하며 돈도 제법 모아 장가를 갔다. 결혼하고 나서는 서울 흑석동 중앙대학교 앞에서 부부가 구멍가게를 하며 아이 셋을 키웠고, 굶지 않을 정도로 벌이를 이어가던 터였다. 가끔 아들 인구를 데리고 놀러 가면 깡통 햄과 소시지 같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음식에 버섯을 넣고 달달 볶아서 미국식 요리를 맛보이곤 했다.

인구는 그 미국 요리가 아주 맛있었다. 구멍가게에 진열된 빵, 사탕, 초콜릿, 후레쉬 민트 껌보다 깡통 햄 볶음요리가 가장 맛있었다. 하지만 자주 먹을 수는 없었다. 깐깐하고 야무진 경수의 부인이 있을 땐 아무것도 얻어먹을 수 없었다. 경수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인구는 앞으로 경수의 요리를 못 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낙섬으로 데리고 다니며 낚시를 가르쳐주던 삼촌이었다. 바다에 들어갈 때 주위에 뭐가 있는지 잘 봐둬야 한다고, 고랑에 물이 차진 않았는지 확인하며 움직여야 갯가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고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런 삼촌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인구 옆에서 동생 도영도 울었다. 도영은 사고 소식 다음 날 강화 전등사로 6학년 마지막 소풍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남숙은 도영에게 소풍비를 줄 수 없다고 했다. 김밥도 사줄 수 없으니, 소풍을 가지 말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도영이 일 년 중 가장 기대하는 날이었다. 창영초등학교와 같은 날에 소풍을 가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는데, 마침 내일은 겹치지도 않았다. 게다가 소풍을 빠지면 개근상도 못 받았다. 도영은 소풍을 보내 달라고 말도 꺼낼 수 없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속상했다.

남숙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옷가지와 돈을 챙겨 서울로 갔다. 집 안에 유일한 외아들, 남동생 경수를 살리는 것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날부터 서울과 인천을 출퇴근하는 남숙의 삶이 시작됐다.

동인천역 앞에는 한진 고속 터미널이 있었다. 1969년에 경인고속도로가 뚫리고 제일 처음 생긴 고속버스다. 고속버스는 동인천역 터미널에서 출발해 배다리를 지나 문화극장, 송림동, 가좌IC를 타고 서울역까지 갔다. 외국에서 들여와 생전 처음 보는 수입 버스들이 인천과 서울을 왔다 갔다 했다. 배다리 철길 아래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고속버스가 췩! 소리를 내며 출렁거리면, 아이들은 매우 신기해했다. 한진 고속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삼화고속도 동인천에 터미널을 만들었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남숙은 아침 일찍 경수가 입원해 있는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서울역 한진고속 터미널까지 10분 거리를 걸어갔다. 고속버스를 타고 동인천에 도착하면, 시내버스를 타고 와룡 회사에 일하러 갔다. 일이 끝나면, 동인천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서울 적십자병원에 가서 동생 병간호를 했다. 경수는 수술하고 의식이 돌아왔지만 6개월은 누워 있어야 했다. 남숙은 뼈가 붙는 데 좋다는 약과 음식을 수소문해 구하러 다녔다. 송림동에서 약을 잘 짓기로 소문난 이약국에 가서 조제하고, 몸에 좋다는 미제 영양제를 찾아 양키시장을 돌아다녔다.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6개월, 일반 정형외과에서 6개월 치료를 받고 퇴원한 경수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퇴원한 지 며칠 만에 경수는 이혼했다.

“누이!!!”

경수가 송림1동 181번지 마당을 들어서며 큰 소리로 누이를 불렀다. 경수는 11살 첫째 딸과 9살 둘째 아들 그리고 4살 막내딸을 데리고 남숙네로 들이닥쳤다. 빈털터리가 돼서 아이 셋을 데리고 몸만 왔다. 남숙은 기가 찼다.

1972년, 경수는 남숙네 방 한 칸을 빌려 아이 셋과 송림동 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 왼쪽부터 경수의 막내 딸 명화, 둘째 아들 명근, 오른쪽에 강아지를 안고 있는 중학교에 갓 입학해 머리를 빡빡 민 남숙의 아들 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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