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사랑일 때에 바야흐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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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사랑일 때에 바야흐로 사진
  • 최종규
  • 승인 2011.04.2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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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조현애·박태희, 《사막의 꽃》

 나는 1998년에 사진찍기를 처음 배웠습니다. 사진읽기 또한 이때에 처음 배웠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며 먹고살던 나는 신문기자가 되는 길이 아니면 그저 신문배달만 하면서 먹고살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신문배달만큼 ‘쓰레기 안 만들면서 조용하고 착하게 땀흘려 일해서 살림을 꾸리는’ 좋은 일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런 제도권학교에서 시달리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느꼈지만 막상 고등학교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둘레에 아무도 고등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 주며 힘을 북돋아 준 동무 또한 없었습니다.

 어영부영 고등학교를 마치고 1994년에 대학교라는 데에 들어갔으나, 대학교 또한 고등학교와 다를 구석 없이 제도권학교였고, 대학생 선배라는 사람은 그닥 대단하지 않을 뿐더러, 대학 교수라 해서 지식이나 지성이나 슬기나 아름다움을 건사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한 학기는 버티자고 다짐했지만, 한 학기를 버티면서도 대학교는 지나치게 비싼 돈을 받으며 참배움을 나누지 못한다고 깨달아 몹시 갑갑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둘째 학기에는 강의는 거의 안 듣고 도서관과 학교 앞 새책방과 서울 시내 여러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배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대학교 강의실 울타리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1995년 가을에 스스로 영장을 받아 군대에 들어갑니다. 1997년 겨울에 군대에서 용케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옵니다. 군대 가기 앞서 하던 신문배달을 잇습니다. 이제 대학교에는 자퇴서를 내고 싶지만 어머니가 한 해를 더 다녀 보고 네 마음대로 하라 말씀하셔서 한 해를 더 다니기로 하면서, ‘고졸자도 신문기자로 받아 준다면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고 꾸는 꿈에 따라 신문방송학과 수업을 듣기로 하고, 이때에 보도사진 강의를 듣습니다. 이무렵 한국외대와 중앙대에서 강사로 뛰던 허현주 님이 보도사진 강의를 했고, 허현주 님은 ‘사진찍기’와 함께 ‘사진읽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사진글쓰기’를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찍기와 읽기와 쓰기, 여기에 듣기 한 가지까지 더했습니다.

 어버이한테서 고운 목숨 받고 태어난 아이가 듣기와 말하기와 읽기와 쓰기로 말과 글을 익히듯, 허현주 님 보도사진 강의는 네 가지를 고루 받아들이면서 ‘기계 같은 사진기자’가 아니라 ‘사람내음이 나는 사진쟁이’가 되도록 길동무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이무렵 보도사진 강의를 듣는 사람 가운데 나만 혼자 사진기가 없어 쩔쩔매다가 1회용 사진기를 쓰다가, 또 망가진 싸구려 사진기 하나를 3만 원 주고 고쳐서 쓰다가, 나중에는 후배한테서 낡은 사진기 하나를 얻어 5만 원을 들여 고쳐서 쓰는 동안 ‘사진기는 목걸이로구나’ 하고 배웁니다. 또, 사진을 찍는 사람은 다른 사람 눈에는 ‘사진이 보이’겠지만, 이렇게 보이는 사진에 사진쟁이가 담을 이야기란 곧 ‘내 사랑과 믿음’이요, 이리하여 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이 아닌 ‘내 사랑과 믿음이 깃든 이야기’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안목,2011)을 펼칩니다. 글 하나와 사진 하나가 예쁘게 어우러진 사진책입니다. 참 오랜만에 예쁜 사진책을 만났습니다. 아니, 참 오랜만에 ‘나라안 예쁜 사진책’을 만났습니다. 나라밖 예쁜 사진책은 수두룩하게 흔히 보지만, 나라안 예쁜 사진책은 더없이 드뭅니다.

 나라안 사진책들은 하나같이 조금 더 잘 팔리거나 한결 돋보이거나 더욱 이름값 높이려는 예술이나 작품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은 작품집이 아니요, 예술품이 아닙니다. 그저 사진책 하나입니다.

 조현애 님은 “나는 새벽 길을 좋아했다 / 자전거타기를 더 좋아했다 / 네게 가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12쪽).” 같은 글을 적바림했고, 박태희 님은 새벽 길을 좋아하고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며 너한테 가는 길을 좋아하는 느낌을 당신 사랑과 믿음을 사뿐히 실어서 사진 하나로 보여줍니다.

 조현애 님은 다시 “나에게 네가 없다면 삶이 없다(26쪽).” 같은 글을 적바림하고, 박태희 님은 나한테 네가 없으면 내 삶이 어떠한가 하는 이야기를 당신 사랑과 믿음에 따라 사진 하나로 드러냅니다.

 조현애 님은 거듭 “뉴욕은 내 꿈을 대변하였으나 / 어느새 내 꿈을 잡아먹은 도시가 되어 버렸네 /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추위와 / 택시 드라이버, 트레비스의 고독을 기억하는 동안 / 가난한 예술 혼이 내 꿈을 지켜주었지만 / 지하철을 버리고 택시를 타고 차를 몰고 /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부터 / 꿈은 조금씩 내 곁을 떠나 버렸네(125쪽).” 같은 글을 울먹이며 적바림하고, 박태희 님은 사랑길과 믿음길 결을 찬찬히 어루만지면서 사진 하나를 넌지시 내밉니다.

 조현애 님은 새삼 “나도 널 초대해서 좋은 시간 갖고 싶다 / ‘네 목소린 참 정겹다’ 말해 주고 싶다(138쪽).” 같은 글을 적바림했으며, 박태희 님은 당신한테 사랑스러운 님을 부르는 손짓과 목소리라 할 만한 사진을 하나 살그머니 내놓습니다.

 사진은 내 느낌입니다. 글은 내 느낌입니다. 그림은 내 느낌입니다. 노래와 춤과 연극과 영화 또한 내 느낌입니다. 밥하기와 빨래하기와 청소하기와 아이돌보기 모두 내 느낌이에요. 논일과 밭일과 바닷일도 하나같이 내 느낌이에요.

 나는 둘레 아이들한테고 어른들한테고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를 요사이에 꽤 자주 합니다. 어린 날 〈플란다스의 개〉라는 만화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한 이야기를 서른일곱 나이에 바야흐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열 살 안팎 어린이였던 내 지난날을 더듬으면, ‘네로가 그림을 좋아한’ 줄을 잘 떠올리지 못했어요. 아니,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프랑스가 맞닿은 곳에서 살아가는 예쁘장한 네로와 아로아와 파트라슈 이야기쯤으로만 떠올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들여다보니, 또 위다 님이 쓴 원작소설 《플랜더스의 개》(비룡소,2004)를 읽으니, 이 얘기에서 네로가 그림을 얼마나 아끼거나 좋아하느냐는 대단히 큰 자리를 차지하더군요. 가난하고 학교 문턱은 밟은 적이 없으며 한겨울에도 양말과 장갑 없이 우유 나르기를 거든 네로는 ‘아로아를 그린 그림을 돈을 받고 팔지 못’해요. 네로는 스스로 그린 그림 가운데 어느 그림도 돈을 받고 누구한테 준 적이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립니다. 아무런 그림 기법을 모르지만 네로가 품은 사랑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떠한 그림쟁이도 모르나, 오직 하나, 루벤스라는 사람이 어떠한 믿음으로 그림을 그려서 나누었는가를 되새기면서 네로는 네로라는 아이 가슴에서 피어나는 믿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네로가 본 그림은 루벤스 님이 그림 그린 한 점뿐이었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가 죽기 앞서 루벤스 님 다른 그림 두 점을 더 보았습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이 사진책이 되자면 이와 같이 내 느낌, 곧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내 느낌이 사랑이며 믿음일 때에 사진책이 됩니다.

 글로 빚는 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을 더 많이 담거나 정보를 한껏 싣는다 해서 문학책이나 인문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담아야 문학책이고, 믿음이 감돌아야 인문책입니다.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을 놓고, 요즈음 이분이 ‘친일작가’이니 아니니 하고 떠들썩합니다. ‘생계형 친일’이니 ‘친일이면 다 똑같은 친일’이니 하고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을 놓고 친일이요 아니요 하고 읊는 이들 가운데 이원수 님 발자취를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든지, 이원수 님이 일제강점기부터 1981년에 구강암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어떠한 글을 써서 어린이한테 읽히려 했는지를 곰곰이 헤아려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1980년 전라도 광주 일을 병자리에서 먼 소식으로 들으면서 이제 더는 글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 꼼짝도 못하면서 광주 이야기를 동화로 써서 아이들한테 들려주고 싶은데 못할 수밖에 없으니 너무 안타깝다 읊조린 말마디를 곱씹으면서, 1981년 전두환 독재정권 사슬을 슬프게 바라보며 숨을 거둔 마지막길을 톺아보는 사람은 있기나 있을까요.

 나는 서정주 님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님이 전두환이나 박정희를 기리는 시를 썼대서 서정주 님을 그닥 안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님 시를 읽을 때에 내 가슴이 울렁이는 사랑이나 믿음이 딱히 없기 때문에 그닥 안 좋아합니다. 잘 썼다는 글이라든지 토박이말을 잘 살렸다는 글이라든지 이름값 높다는 사람 글이라든지 하나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수룩하게 쓰면 어떻습니까. 글에 사랑이 있어야 글이지요. 이름값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글에 믿음이 깃들어야 글이지요.

 사진작가로 이름이 드높아야 훌륭한 사진이지 않습니다. 사진마다 알알이 깃든 사랑이 있을 때에 바야흐로 사진이라고 일컫습니다. 사진 흐름을 뒤흔들거나 사진 역사를 새로 쓰도록 했다는 사진이래서 나한테까지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내 눈물샘을 터뜨리면서 아름답거나, 내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아리따울 때에, 나는 비로소 이 하나를 사진이로구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린이문학으로 한삶을 바친 이원수 님은 틀림없이 ‘친일시’를 썼으나 ‘친일작가’가 아닌 ‘어린이문학가’입니다. 한때 저지른 당신 잘못을 온삶을 바친 ‘어린이문학 한길 걷기’로 뉘우쳤어요. 왜냐하면, 이원수 님 동시나 동화나 수필이나 번역동화를 읽다 보면, 이분이 얼마나 사랑과 믿음을 당신 글에 녹여냈는지 느낄 수 있거든요.

 사진책 《사막의 꽃》을 거듭 되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자가용 모는 사람을 되게 싫어합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을 아주 미워합니다. 그러나, 차를 타야 할 때에는 차를 몰아야 하고, 저 또한 때때로 차를 얻어 타요. 자가용을 모느냐 안 모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어떤 마음이고 어떤 삶이냐가 대수롭습니다. 조현애 님처럼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부터 / 꿈은 조금씩 내 곁을 떠나 버렸네” 하고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이 목소리를 사진 하나로 예쁘게 담아서 울먹이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자가용을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막을 수 있다”고 피울음 나는 목소리로 외쳤는데, 자가용을 버리지 못해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을 곱게 어루만지는 글을 당신이 숨을 거두는 마지막날까지 예쁘게 적바림해 주었습니다. 예쁜 삶으로 예쁜 글을 쓰고, 예쁜 사랑으로 예쁜 사진을 빚습니다.

― 사막의 꽃 (조현애 글,박태희 사진,안목 펴냄,2011.2.8./3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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