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 한 상자로 복원하는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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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묵 한 상자로 복원하는 청춘
  • 정민나
  • 승인 2020.07.2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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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어묵 한 상자  - 허회숙

          어묵 한 상자                             

                                                        허회숙 

 

발신인 없이 도착한 어묵 한 상자와 문자 한줄

‘눈 내리던 명동의 밤 포장마차 어묵 향기 생각 나

한 상자 보냅니다’

20여년 전에도

발 길 닿는대로 온 보길도라며

미역 한 꾸러미 보내온 사람

어묵 한 상자의 투박함과

미역 한 꾸러미의 우직함으로

못 다한 말들 전해오는 사람

대학교 새내기 시절 왜 그랬는지 우리는

캠퍼스의 낭만이나 젊음의 향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놓일 자리 찾지 못해 방황의 미로를 헤매었는데

만나기만 하면 말싸움,

기 싸움으로 시작된 동갑네의 서툰 사랑

불확실한 미래를 보듬어 주기보다

서로에게 애증의 그림자를 던지며 상처를 주고 받았다.

몇 년 후 어느 핸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

캠퍼스의 큰 소나무 가지 뚝뚝 부러졌는데

‘쓰레기는 물에 뜨는 법이지요’

꾹꾹 눌러 쓴 내 무거운 청춘 품에 안고 그는 떠났다.

도서관 문 앞에서 늘 기다리던 그

불꽃같은 열정이 스러져 간 그 자리엔

서툰 바람과 두려운 햇살이 빚어낸

살구 열매들이 가파른 계절을 붙들고 있었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우리인데

‘그리운 사람 품고 가는 길’이라고

며칠 전 강릉 가는 기차에서 보내온 문자

‘우린 미워하는 사이는 아니지요’

어스름 내리는 황혼에 서서

어린애 같은 내 마음의 답문을

바람에 띄워 보낸다

 

시를 읽을 때 독자는 시의 도입부와 결말부에 관심이 많다. 사람이 말을 할 때 처음 시작하는 부분에서 호기심을 갖게 하면 끝까지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뭔가 궁금증을 갖게 하는 글은 관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

허회숙의 이 시는 소소한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눈 내리는 명동의 밤 포장마차”가 그림처럼 떠오르며 독자를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사연이 펼쳐지는 지면 위로 집중하게 한다.

‘기승전결’이라는 구도를 가지고 있는 이 시의 1연에서 3연까지는 옛 연인으로 생각되는 그가 “어묵 한 사장의 투박함과 / 미역 한 꾸러미의 우직함으로” 일상처럼 다가온다. 4연과 5연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 그 사람과의 치열했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며 독자를 화자의 과거 시간 속으로 이끈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은 ‘젊음’과 ‘사랑’, ‘자유’가 넘치는 시간이지만 또한 사랑의 통증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방황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몸과 정신의 불일치라는 괴리감을 알아채지 못해 이유없이 방황하기도 하는데 시적 화자는 이러한 현실과 이상의 틈새에서 겪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6연과 7연에서는 “서로에게 애증의 그림자를 던지며 / 상처를 주고 받”던 남녀가 급기야 이별하는 장면이 드러난다. “쓰레기는 물에 뜨는 법이지요” 라고 시작되는 문구(편지)는 곧 시적 화자의 “꾹꾹 눌러 쓴 무거운 청춘”을 은유하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연인은 결국 결별하게 된다. “서툰 바람과 두려운 햇살이 빚어낸 / 살구 열매들이 가파른 계절을 붙들고 있었다”와 같은 자기 고백은 이 시에서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로 이 시의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8연에서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우리인데 / ‘그리운 사람 품고 가는 길’이라고” 그는 지나간 시간을 무심한 듯 다시 복원하고 있다. 무의미하게 흘려버린 청춘의 이데올로기를 의미있게 혹은 여운으로나마 복원하는 일이야말로 생의 기승전결에서 자연스럽게 그 결구를 장식하는 일이 되는 것일까? 9연에서 시인은 “우린 미워하는 사이는 아니지요 / 어스름 내리는 황혼에 서서” 통증과, 치욕, 두려움이라는 젊음의 이데올로기를 거쳐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이”(서정주,「국화 옆에서」) 처럼 정화된 이미지를 드러낸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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