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 편향의 시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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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 편향의 시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 송수연
  • 승인 2020.08.10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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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의 인문학 산책]
(1) 영화 《소년 아메드》 - 유럽 내 이슬람의 근본을 쫓다

문학평론가 송수연의 인문학 산책을 연재합니다. 우리시대의 다양한 인문학의 영역 – 영화, 소설, 음악 등 문화컨텐츠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인생의 지혜를 배우며, 그 바닥을 다시 튼튼히 다져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소년 아메드(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2019)》는 갑자기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가 된 소년이 벌이는 황당하고 기겁할 사건을 조명한다. 다르덴 형제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다르덴 감독들이 만든 이 영화는 코로나에 잠시 덮였지만 여전히 뜨거운 유럽 내 이슬람 근본주의의 현재를 쫓는다.

물론 영화는 이것이 옳다 저것은 그르다-라는 이분법을 지양하고, 소년이 지금 자신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뿌리내리고 있는지, 궁극적으로 소년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이슬람이라는 화두는 ‘다름’의 상징이지 좁은 의미의 무슬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의미심장하다. 형과 예배에 참석하기로 한 아메드가 되는대로 교실을 떠나려고 하자, 이네스 선생님은 아메드를 붙잡는다. 바쁘다는 아이에게 하던 일을 마치고 가라고 요구하자 아메드는 신경질적으로 수학문제를 푼다.

정답을 말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아메드에게 선생님이 인사도 없이 가느냐고 묻자 소년은 이렇게 대꾸한다. “진정한 이슬람은 여자랑 악수 안해요.” 황당해서 웃음도 안 나올 말이지만 아이는 당당하고 진지하다. 이후 아메드는 엄마에게 술주정뱅이라고 비난하며, 엄마도 진정한 무슬림이 되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쯤되면 이슬람이라는 말 앞에 붙은 저 ‘진정한’이라는 단어가 도대체 무엇인지 곱씹지 않을 수 없다. 표준대국어사전은 ‘진정(眞正)하다’를 참되고 올바르다-라고 설명한다. 유의어는 바르다, 진실하다, 참되다-이다. 일반적으로 바르고, 진실하고, 참된 것은 좋다. 권장할 만한 가치이다.

문제는 저 단어의 의미가 어느 한 편에서만 고정적으로 사용될 때 생긴다. 그러니까 내가 바르고 진실하니 나와 다른 너, 혹은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너는 틀리고 거짓이 된다면 문제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과정엔 아랑곳없이 정답만을 찾는 아메드의 모습을 보여주는 첫 시퀀스의 의미는 진리, 혹은 진정함을 찾아 헤매는 소년의 발걸음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준다.

유대인 남자친구를 만나면 무슬림을 더럽히는 배교자가 된다거나, 이주민 아이들에게 잊혀져가는 이슬람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쿠란 대신 함께 노래(가요)를 배우는 것이 불결하다면, 그렇게 정답에서 벗어나는 모든 게 틀리고 거짓이 되는 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 진정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국 아메드는 거짓 선동자인 이맘의 사주를 받아 이네스 선생님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다 소년보호소에 가게 된다. 보호소 안에서도 그의 믿음과 확신은 변하지 않는다. 소년은 여전히 온갖 절차와 의식을 꼼꼼이 지켜가며 기도를 하고, 이네스 선생님을 신의 이름으로 처단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이대로라면 소년은 곧 자신이 속한 세계 밖으로 내던져질 것이다.

영화 속 아메드를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다. 답답한 마음은 짜증이나 분노로 바뀌기 십상이니, 누군들 아메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년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그와 그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이슬람에 대한 무지만큼이나 이슬람에 대한 편견은 강고하다. ‘이슬람=IS’라는 생각은 일종의 확증 편향이 된지 이미 오래다.

기실 우리의 확증 편향과 아메드의 그것은 별 차이가 없다. 문제는 우리가 나의 확증 편향은 진정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메드의 믿음에는 쉽게 돌을 던진다는 점이다. 이 역시 아메드와 기묘하게 닮아있지 않은가. 강고한 확신은 늘 무지에서 비롯한다.

불도저처럼 직진하던 아메드는 농장활동에서 만난 소녀 루이스를 통해 처음으로 흔들림을 경험한다. 루이스는 아메드의 기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네가 믿는 종교는 그렇구나.” 소녀의 한 마디는 아메드에게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것은 화내고 우는 엄마나 심리상담사들은 주지 못한 것이었다.

“너, 내 모습이 흐릿한 거랑 뚜렷한 것 중 뭐가 더 좋아? 난 흐릿한 게 좋아. 네 안경 좀 줘봐. 흐릿하게 보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 대사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우리는 분명하고 명확한 것을 선호한다. 흐릿한 것 앞에서 우리는 불안해 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흐릿하게 보기 위해 애쓰는 소녀라니.

명확한 폭력 대신 흐릿한 쪽을 선택한 소녀는 아메드를 알기 위해 아메드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겠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상대방의 안경을 써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의 안경에 비친 세상이 궁금해서, 나와는 다를 그 시선의 흐릿함을 기꺼이 알아보겠다는 소녀의 자세는 경이롭다.

인생은 수학문제가 아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어쩌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타인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루이스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진정함을 가장(假將)한 명확한 폭력보다, 더디고 힘들고 흐릿해도 지속적인 소통을 위해 상대의 안경을 쓰고 그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려는 부단한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소년이 버림받지 않는 세계이어야, 우리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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