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기다리는 천둥지기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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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기다리는 천둥지기의 노래
  • 최일화
  • 승인 2020.08.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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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노두식 시집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을 읽고 - 최일화 / 시인

시집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을 읽는다. 노두식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이다. 여덟 권의 시집이 시인의 시력과 연륜을 보여준다. 1984년 첫 시집을 낸지 올해로 36, 그동안 여덟 권의 시집이면 어림잡아 4년 남짓 기간에 시집 한 권씩을 낸 것이다.

물론 2016년 이후 5년 만에 4권을 냈으니 고희를 전후하여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 셈이다. 노년에 이르러 자주 시집을 낸 경우엔 김종길 시인이 있다. 젊었을 적엔 과작으로 일관하다가 팔십 전후하여 몇 권의 시집을 냈다. 한 때는 시인들의 조로현상이 지적되기도 했다.

너무 일찍 시 쓰기를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서는 백수(白壽)에 가까운 시인들이 여전히 많은 활약을 하는 예를 자주 본다. 문학을 위하여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후배 문인들에게도 귀감이 될 것이다. 노두식 시집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에서 몇 작품 함께 읽는다.

 

천둥지기

너를 기다리다가
누군가에게 떠밀리어 앞으로 걸어갈 때

네가 등 뒤에 와 선다 해도 그건
아무 언어도 아니지 하나의 방식일 뿐
그냥 춤사위 같은 방식일 뿐

기다리는 네가 오지 않으면
나는 선인장처럼 멈춰서면 되지
멈춰 서서 다시 뾰족하게 기다리면 되지
샘이 고일 때까지 하냥 목마르면 되지
그러다가 쓰러져 버리면
그도 그만이지

하지만 네가 내 앞에서
세상의 언어가 되어 걸을 때
맨손으로 등을 쓰다듬어 너를 고르는 손가락의 시늉만으로도
한 페이지 가득 율동으로 완성되는
비로소 너는 나의 지울 수 없는 무늬가 될 것이지

그렇다 해도 기다림이야
한갓 천둥지기의 시름에 다름 아니지
나는 그대로 다소곳하리
                  -노두식 <천둥지기> 전문



기다림과 외로움이 짓게 배어 있다. 기다리는 가 누구인지 얼른 알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떠밀리더라도 너를 기다리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것, 너를 기다리는 자리가 사막 같은 곳이라는 것, 그 기다림은 천둥지기처럼 운명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화자의 등 뒤에서가 아니라 화자의 앞에서 가 세상의 언어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뿐이다. 노경에 접어든 시인이 기다리는 너의 실체는 무엇일까. 천둥지기가 단비를 기다리듯,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기다리듯 시인이 기다리는 그 실체를 우리는 모른다. 다만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백 가닥의 색실 가운데
으뜸 고운 색실 하나를 골라도
님을 위한 것이라면
아흔아홉 가닥의 아쉬움이 남을 거예요

님을 위한 것이라면
아흔아홉 가닥의 색을 골라도
한 가닥의 아쉬움이 남겠지요

색실을 모두 모아 드려서
님이 어여쁜 미소로 받으신다 해도
나는 여전히 마음에 차지 않아
더덜없이 분망할 거예요
                  -노두식 <님>전문

 

오늘 다시 님을 만난다. 한용운의 님만이 님은 아닐 것이다. 인도의 시성 R.타고르의 님만이 님은 아닐 것이다. 여기 또 한 시인의 님을 만난다. 백 가닥의 색실 가운데 으뜸 고운 색실을 골라 드려도 아쉽기만 하고 백 가닥의 색실 가운데 아흔아홉 가닥의 색실을 골라 드려도 아쉽기만 하다. 백 가닥의 색실을 모두 모아 드려도 더 드리고 싶어 마음만 분망해지는 그 님은 어떤 님인가.

 

읽는 이마다 짐작이나 할뿐 그 님의 실체를 알 수는 없다. 앞에서 읽은 시 <천둥지기>와는 다른 님인 것 같고, 좀 더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열망 같기도 하다. 모든 종교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단 하나의 신을 만나게 된다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모든 종교의 모든 신을 아우르는 하나의 존재, 그 신비로운 존재에 대한 신앙이 드러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을 편지

봉투에는 주소가 없으니
배달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에게나 보낸다 해서 안 될 것도 없고

마음만큼은
작지만 붉게 익은 고욤 같아서
장맛비 온 뒤 농부들처럼 종종댈 사연도 아닌지라
나의 편지
아무나 읽어도 좋고
읽지 않는다고 서운할 일도 없고

소슬바람에 훌훌 날려
새털구름처럼
구구절절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다 해도
거기 높다라니 푸르름을 벗할 테니
나는 일절 상관 않으리, 내 그대
가을이여
                -노두식 <가을 편지>전문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편지를 읽는다. 그 편지는 가을날에 쓰는 편지이기도 하고 가을에게 띄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편지의 봉투엔 주소가 없어 수신인을 알 수 없다. 수신인이 없다는 건 누가 읽어도 좋다는 것일 게다. 누가 읽어도 좋을 편지에 화자는 어떤 사연을 담았을까. 장맛비가 오고 난 후 농작물 걱정에 종종댈 농부의 근심이 담긴 건 아니라고 한다. 다만 붉게 익은 작은 고욤 같은 마음이 담겼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누가 읽어도 좋을 허허로운 마음,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이미 세상일에 초연한 어느 선사의 마음이 담겨 있을 것 같다. 소슬바람에 훌훌 날려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다 해도 일절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이미 시인의 마음은 저 푸르른 가을 하늘을 닮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왠지 쓸쓸하다. 주소 없는 봉투가 그렇고 아무도 읽지 않아도 좋다는 사연이 그렇다.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부르다가 내가 죽을이름을 외쳐 부르는 김소월의 <초혼>을 연상케 하여 더욱 그렇다.

 

종심

논배미에 물대듯 차오르는
낯설지 않은 노고老苦의 생소함이여

눈에는
앳되고 어린 것들만 반갑고
해묵은 돌쩌귀마냥
무릎은 헐겁기만 하다

꿈속에 어머니가 자주 다녀가시니
서러움의 녹물마저도 베갯모에 꽃문양으로 지는데

안부를 묻지 않아도 되는
앞서간 친구 몇이
여기저기 묵묵하다가 돌아간다
               -노두식 <종심>전문

시인은 고희에 이르러 그 연륜을 간략히 요약하고 있다. 1연에서는 노고老苦를 언급하고 있다. 노년의 3고를 흔히 가난과 질병과 외로움이라고 한다. 시인에게도 이 노고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2연에서는 앳되고 어린 것들을 반기는 심사와 육신의 노쇠를 언급하고 있다. 3연에서는 어머니를 떠올려 생사를 뛰어넘는 모자지간의 인연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4연에서는 지상에서 함께 같은 역사를 살다가 먼저 떠난 친구들을 떠올려 인생의 무상함을 반추하고 있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남들은 외로워하지 않을 것에 외로워하고 남들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에도 괴로워하는 사람 아닐까. 요 며칠 노두식 시집을 읽으며 나는 시인의 깊은 시심에 흠뻑 빠져들었다. 한 고장의 시인을 보면 그 지방의 품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인천에도 많은 시인들이 있다. 그 시인들로 하여 인천의 품격도 한층 고결해질 것이다.

 

*노두식: 인천 출생. 시인, 제물포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의과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한의학 박사학위를 받음. 1991문학세계신인상으로 데뷔. 시집으로 크레파스로 그린 사랑(1984) 바리때의 노래(1986) 우리의 빈 가지 위에(1996) 꿈의 잠(2013) 마침내 그 노래(2016) 분홍문신(2018) 기억이 선택한 순간들(2019)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2020)과 그 외 한국의 약용식물』 『엄마 건강하게 키워주세요』 『한방방제감별조견표』 『재미있는 한방이야기』 『노두식 박사의 생활한방 114등 출간.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인천영제한의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외래교수로 출강 중. abang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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