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철이면 생각나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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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철이면 생각나는 엄마
  • 석의준
  • 승인 2020.08.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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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석의준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초등학교 입학을 한 후 자주 못 왔던 손자가 며칠 와서 묵었다. 어릴 때부터 키워온 터라 같이 있는 게 좋기는 하지만 함께 놀아줘야 되는 부담도 있다. 어제는 볼일보러가는 길에 같이 동행을 했다. 휴대폰 만보기로 재미를 붙였더니 불평 없이 갔다 왔다. 그러면서 어제 1만보 달성을 했으니 오늘은 등산으로 2만보 달성을 제안했다. 평지에서 1만보 달성이 쉬웠든지 흔쾌히 승낙했다.

아침을 먹자마자 산행에 나섰다. 손자와의 등산은 작년 가평 리조트 뒷산을 같이 탄 뒤로 두 번째다. 산은 높지 않고 쉬운 산으로 정했다, 부평도서관에서 출발해 선포산, 호봉산을 거쳐 백마장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길어야 직선으로 따지면 5km 남짓이다. 평소에 나 혼자 걸을 때는 2시간 20분정도 걸리는데 오늘은 일단 3시간 30분으로 잡고 출발을 했다. 손자는 한 시간, 두 시간은 그런대로 잘 따라왔다. 하지만 세 시간을 넘어서니 힘이 드는지 걸음이 느려지고 뒤처진다. 그러면서 앞으로 얼마 남았냐고 자주 묻는다. 그럴 때 나는 내 어릴 때 엄마를 생각했다.

지금의 손자보다 한두 살 어릴 때쯤 처음으로 외가에 간 적이 있다. 내 나이 다섯 살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스물아홉에 청상이 되었으니 초상을 치르고 일이 년 쯤 된 것 같다. 노지수박이 한창 나올 때가 됐으니 계절은 한 여름이다. 외가는 경북 예천 풍양면이다. 우리 집에서 편도 30리 길이라지만 실제는 더 된다. 들길과 고갯길을 반복해 가는 참으로 먼 길이다. 그때 외가 가는 길은 차도 없었고, 찻길도 나지 않은 구루마 길이 전부였다. 25리 쯤 가면 낙동강을 건너야 하는데, 처음 본 나룻배가 신기했다. 넓은 모래사장에 모래알이 반짝반짝 빛나고, 강변에 줄지어 늘어진 미류나무는 참으로 아름답고 정취가 있었다. 가다가 힘들어하면 엄마가 업어주기도 하고, 손을 잡아끌기도 했다.

강을 건너서도 5리 쯤 더 가서 외가에 도착했다. 외갓집은 그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참외와 수박 농사를 짓고 있었다. 거기 있는 동안 참외 수박은 물론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다. 외사촌들과 얼굴도 트고 산으로 들로 곤충도 잡고, 개울에서 물장구도 치고 놀았다. 외가 친척집도 다녔는데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을 인정받은 것으로 받아들여 우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떻든 그럭저럭 3-4일은 족히 신나게 놀았던 것 같다.

순식간에 집으로 돌아올 날이 됐다. 덥다고 아침 일찍 서둘렀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시집에선 귀한 작물이라고 수박을 준비해 주셨다. 어머니 머리에 얹기 좋게 세 개를 삼각형으로 묶고, 똬리를 해서 머리에 얹어주셨다. 지금처럼 개량이 되지 않아 크기는 중간 쯤 되어보였다. 그 때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지 어린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걸어서 오는 길, 어느 시점부터 엄마는 힘들어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가 힘들어 해도 내색도 않고 따라만 갔다. 한 고개 두 고개를 넘고부터 나도 다리가 아팠다. 그 때는 나도 엄마한테 물었다. “얼마 쯤 가면 우리 집이 나와?” 엄마는 “ 저 고개만 넘으면 돼" 라고 대답을 했다. 그렇게 그 고개를 넘으면 된다는 말에 나도 참고 걸었다. 하지만 그 고개를 넘으면 또 마을이 나오고 고개가 있었다. 나중에는 나보다 엄마의 신음소리가 더 컸다. ”아이구 아이구“ 한 여름 긴긴 날 집에 닿을 때는 엄마가 쓰러져 죽을 것만 같았다.

점심 전에 출발한 것이 어두워질 무렵에 간신히 집에 도착했는데 할머니는 다짜고짜 엄마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하룻밤만 자고오지 뭐한다고 남의 집에 그렇게 오래 있었냐는 것이다. 어린데도 친정이 남의 집이라는 게 이상했다. 엄마는 평소에도 시어머니가 무서웠는데 그 날은 대꾸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리고 나서 어렵게 이고 온 수박을 귀한 선물이라고 칼로 잘랐다. 잘 익었다고 할머니가 골라 준 두 개의 수박은 아직 설익어 있었다. 실망으로 모두는 말을 잃었다. 엄마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손자가 따라오다 다리가 아프다고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는다. 집에까지 몇 미터 남았냐고 묻는다. 17,000보가 표시된 만보기 숫자를 보여줬다. 목표 2만보에 미달한 표시를 본 후 손자는 또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4시간 반 만에 집에 도착했다. 만보기는 18,700보에 멈췄다. 손자가 오늘 등산에 만족하고 있을 때 나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거기엔 엄마의 신음소리도 함께 섞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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