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 뿌리경양식에서, 진토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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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 뿌리경양식에서, 진토닉
  • 권근영
  • 승인 2020.09.02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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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18) 인구와 해성의 우정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남숙의 아들 인구와 혜숙의 아들 해성은 사촌들 가운데서도 유독 사이가 돈독했다. 둘은 동갑내기이기도 했지만, 맏아들이라는 이유로 갖게 되는 심리적인 책임감도 공유했다. 1963년 남숙의 동생, 혜숙이 식구들을 데리고 송림동에 오게 되었고, 인구와 해성은 송림초등학교 2학년을 같이 다니며 우정을 쌓게 되었다.

항상 같이 다니던 인구와 해성이 헤어지게 된 건, 창호 목수로 일하는 혜숙의 남편이 서울 은평구 불광동 건설 현장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해성은 서울 불광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학 갔고, 인구는 방학하자마자 해성을 찾아갔다. 동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가량을 걸어야 했다.

불광천 물줄기 아래,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달린 집을 세 얻어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인구와 해성은 불광천 상류 쪽 독박골에 올라가 가재를 잡고, 물장구치고 놀았다. 구파발에서 내려오는 물이 아주 깨끗하고 맑았다. 산꼭대기였는데도 물이 허리까지 차는 깊은 데가 있어서 헤엄칠 수 있었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신나게 놀다 어느 날엔 쌀 축낸다고 혜숙의 남편이 눈치를 줬다. 둘은 헤어지며 부둥켜안아 울었고, 방학 때마다 인천과 서울에서 만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구는 창영초등학교 등사실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했고, 해성은 공장에 취직했다. 공부도 잘하고, 영리한 해성에게 학교 선생님들은 중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되었을 때 해성은 앉은 자리에서 전문을 다 외워버렸고, 그걸 지켜보던 인구는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해성은 부평 공동묘지 근처에 있는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시계 케이스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일찍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해서 직원들을 관리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시은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한 인구가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다 집에서 노는 날이 많아지자, 해성이 공장에 한 번 와 보라고 했다.

조각칼과 기계는 날카롭고 위험했지만, 천천히 차분하게 하면 괜찮았다. 인구는 실력이 금방 늘었고, 조각반의 반장을 맡게 되었다. 반장을 맡으며 어려운 점은 같이 일하는 10대 중후반의 또래 동료들을 챙기고 이끄는 일이었다. 주로 부평 인근에 거주하는 동료들은 가끔 점심을 먹고 나면 우르르 나가, 눈알이 빨개져서는 싱글싱글 웃으며 돌아왔다. 대마초를 피우고 온 거다. 동암에서 백운 철길 옆으로 삼나무가 많아 줄기는 삼베를 만들고, 잎은 말려서 피우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부평미군부대 근처에서 자란 아이들도 은밀한 경로로 대마초를 구해 피우기도 했다. 약 기운에 혹여나 일하다 다치지 않도록 인구는 동료들을 살폈다.

사고는 정말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라면을 끓였는데 젓가락이 부족했다. 인구는 나무로 젓가락을 만들려고 기계를 켰다. 순식간에 기계에 손가락이 쓸렸고, 왼쪽 두 번째 손가락이 반쯤 잘려 겨우 붙어 있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손가락을 꼭 붙들고 부평 성모병원으로 달려가 수술을 받게 되었다.

입원실에는 인구와 동갑인 남자가 하나 있었다. 부평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로라 기계에 손이 말려 왼쪽 손가락이 다 잘려 나갔다고 했다. 동병상련인 처지에 한 달 동안 병실을 같이 쓰며, 속 얘기도 터놓고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가 모르고 흘린 종이를 인구가 발견하게 되었다. 유서였다. 인구는 순간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 멱살을 잡고 멀쩡한 오른손으로 뺨을 두드려 팼다. 손가락 없다고 인생 끝나냐고,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며 주먹질을 해댔다. 남자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같은 입원실 남자들과 간호사가 달려와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1973년 11월 부평성모병원에 입원했던 남자들의 지속된 우정. 왼쪽부터 횡성 남자, 인구, 부산 남자. 부산 남자는 숟가락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 입원했다. 

 

며칠 뒤 남자는 퇴원했고, 편지를 보내왔다. 인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횡성 집으로 가는 중앙선 기차 안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거다. 남자는 일 하다가 손을 다쳐서 치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라고 아주 편안하게 말했고, 여자는 서울 이화여대 앞 사거리 의상실에서 일하다가 휴가차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또 만나기로 했다고, 너도 어서 퇴원하고 연애하라며 약 올리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유서를 쓰고 다 죽어가던 얼굴이 히죽거리며 한 방 먹이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자 인구는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집에서 쉬면서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해성이 맛있는 음식을 낸다며, 인구에게 나오라 했다. 인구와 해성은 동인천역 근처 뿌리경양식에 갔다. 돈가스를 주문했더니 “밥으로 드릴까요? 빵으로 드릴까요?”하고 물었다. 인구는 김치 없이 밥을 먹는 게 어색해서 빵으로 달라고 했다. 빵이랑 돈가스를 먹는 것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요네즈를 듬뿍 바른 양배추 샐러드와 멀건 수프와 단무지보다 된장찌개에 김치가 더 익숙했다.

해성은 한술 더 떠 드라이 진에 토닉워터를 섞고 레몬을 띄운 진토닉도 두 잔 달라고 했다. 돈가스에 진토닉까지... 금액이 상당했다. 그 뒤로 진토닉 네 잔을 더 시켜, 각자 석 잔씩 먹고 경양식집을 나왔다. 인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날 술을 마셨다. 세상은 느려졌고, 천천히 올라가는 수도국산 언덕길은 더 길어졌다. 그리고 짧아진 왼쪽 두 번째 손가락 끝을 보았다. 가슴이 시큰해졌다.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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