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신예식장 그리고 송도유원지의 피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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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신예식장 그리고 송도유원지의 피로연
  • 권근영
  • 승인 2020.10.14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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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19) 인구와 연희의 결혼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인천 송도유원지에서 피로연을 하는 인구의 친구들
인천 송도유원지에서 피로연을 하는 인구의 친구들

 

“연희, 지금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오직 한 마디.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있어달라는 그 한 마디구려. 보고 싶어서 함께 있고 싶어서 나의 유별난 성질이 발동했건만. 그래도 진주라 천릿길 여행을 떠나지 못했으니 여기 인천 짠물도 싱겁기 그지없구려.” -1983.5.5. 당신의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는 인천 짠물-

 

인천에 사는 인구와 경상남도 진주에 사는 연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장거리 연애를 이어갔다. 1983년 2월 약혼식을 올리고 난 이후 인구의 편지에는 연희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인구는 연희가 하루라도 일찍 인천으로 올라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어깨가 무겁고 힘들 때 연희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을 치른 뒤라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형제들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홀로 살아계신 아버지 형우를 생각하자, 맏아들의 책임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연희도 인구 큰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일전에 큰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인구와 함께 동두천으로 찾아간 기억이 떠올랐다. 가족들의 만류에 직접 얼굴을 뵙지는 못했지만, 인구에게 전해 들은 큰아버지와의 추억담에 괜스레 마음이 시큰했다. 상을 치르고, 인구가 술에 취해 쓴 편지가 진주에 도착했다. 괴로움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편지를 보자 연희는 최근 인구에게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 미안해졌다.

며칠 전 연희의 마지막 미혼 친구가 시집을 갔다. 친구들 가운데 늦게 간 축에 속했다. 보통 스물한 두 살 정도에 동네 중매쟁이의 소개로 만나 시집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연희네 집에도 중매쟁이 할머니가 남자 하나를 데리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연희는 큰 집에 놀러 가고 집에 없었다. 민망해진 중매쟁이는 옆집에도 아가씨가 하나 있다며 그 집으로 가자고 했다. 옆집 여자와 남자는 결혼을 했다. 시골은 이런 경우가 허다했다. 연희에게도 연애결혼의 낭만을 꿈꿨던 시절이 있었지만, 연애는 커녕 중매쟁이와의 만남도 번번이 어긋났다. 주변 또래 친구들이 하나, 둘 시집을 가고 마지막 남아 있던 미혼 친구마저 결혼하자 연희는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연희는 약혼식 이후 인천 동구 송림동 인구네 집에 방문했었다. 서울에서 양가 부모님만 모시고 간소하게 약혼식을 올렸고, 데이트도 줄곧 서울에서 했기 때문에 인천에 발을 디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철을 타고 동인천역에 내려 수도국산으로 올라가자 점점 숨가팠다. 양장으로 곱게 차려입고 굽 높은 구두를 신은 탓에 언덕을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진주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올라와 고생 끝에 도착한 송림동 집에는 방마다 인구의 외갓집 식구들이 살고 있었다.

시이모 둘과 시삼촌의 가족까지 열네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방에서 우르르 나오자 연희는 기가 찼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시이모와 시삼촌네 식구들까지 같이 사는 건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연희는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인구에게 말했지만,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약혼식까지 올린 마당에 파혼하면 혼처가 들어오기도 어렵고, 노처녀라고 손가락질할 것이 뻔했다. 연희는 인구가 원망스럽고 마음이 자주 비뚤어져 인구에게 퉁명스럽고 뾰로통하게 대했다. 그러던 중 인구 큰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것이다. 연희는 가족들을 아끼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인구가 안쓰러워, 이 남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곁에서 평생 지지해주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인천 경동 신신예식장에서 인구와 연희
인천 경동 신신예식장에서 인구와 연희

 

1983년 11월 20일 인천 경동에 있는 신신예식장에서 인구와 연희가 결혼했다. 신신예식장은 인천에서 최고로 인기가 좋은 꿈의 장소였다. 3만 원을 주고 웨딩드레스를 빌렸다. 최고급은 아니었지만 제법 값이 나갔다. 연희는 예식장에서 신부 화장을 받았는데 사자머리에 두꺼운 메이크업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거울을 한참 보다가 결국은 화장을 조금 연하게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인구는 아침에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했다. 오늘 결혼한다고 말했더니, 포마드를 바를 건지 안 바를 건지 물었다. 젊은 남자들이 포마드를 발라서 머리를 넘기며 멋을 부리곤 했는데 인구는 그래 본 적이 없었다. 포마드를 안 바르고 깔끔하게만 정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인구는 29살, 연희는 24살이었다. 두꺼운 메이크업과 포마드 없이도 반짝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예비 신랑 신부였다.

예식이 끝나고 손님들은 인근 식당으로 안내를 받았다. 신랑 쪽과 신부 쪽 손님이 각각 다른 식사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연희네 하객은 온통 경상남도 사람들이었다. 인천 경동 싸리재 인근의 맛집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인구는 연희네 하객들도 같은 식당으로 안내했다. 감사한 마음과 함께 인천에서의 첫인상이 좋게 기억되길 바라며 가장 맛 좋은 식당을 찾아 처가댁 손님들을 모셨다.

하객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연희와 인구는 송도유원지로 피로연을 갔다. 인구와 조각 일을 하는 동료들과 함께 갔다. 송도유원지는 바닷물이 들어올 때 수문을 열어 물을 가두고 모래를 깔아 만든 해수욕장이다. 하루에 두 번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서해의 특성을 살려 만든 것이다. 새벽에 물이 들어오면 수문을 닫아, 낮에 사람들이 다이빙하고 오리배를 타고 놀았다. 밤에 썰물일 때는 수문을 열어 물을 교체해주며 수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백사장 근처에는 식당이 줄지어 있었고, 회사나 모임에서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많이 찾았다.

피로연에 모인 인구의 친구들이 술을 마시고 분위기가 한껏 올랐다. 짓궂은 친구들은 새신부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권했다. 연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너무나 쑥스러웠다. 도저히 못 부르겠다고 손사래 치자 친구들이 인구를 에워쌌다. 옴짝달싹 못 하게 꽁꽁 붙잡아 인구를 바닥에 드러눕히고는 양말을 벗겨버렸다. 친구들은 연탄집게를 구해와 발바닥을 찰싹 때렸다. 연희에게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인구 발바닥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 협박했다. 연희는 인구를 바라봤다. 사랑하는 인구를 위해서는 시부모도 모실 수 있고, 시이모와 시삼촌네 식구와 사는 것도 괜찮았지만, 그래도 노래만큼은 할 수 없었다. 연희는 화장실로 도망갔고, 인구는 발바닥에 불이 나게 맞았다.

 

노래 부르기 싫어 도망가는 연희와 발바닥을 때리려고 하는 인구의 친구들
노래 부르기 싫어 도망가는 연희와 발바닥을 때리려고 하는 인구의 친구들
인천 송도유원지에서 인구와 연희
인천 송도유원지에서 인구와 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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