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포옹, 감동의 힘
상태바
청년의 포옹, 감동의 힘
  • 유병옥
  • 승인 2020.10.19 07: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자칼럼] 유병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회원

 

연합뉴스에서 ‘난동 부리는 취객, 포옹으로 진정시킨 청년’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았다. 지하철역에서 한 취객이 난동을 부리는데, 이를 경찰관 두 명이 힘으로 제압하려 애를 써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 청년이 나서서 경찰관과 함께 말리면서 ”선생님 그만 하세요. 이러시면 공무집행 방해죄로 처벌받으실 수 있습니다“했다. 그러나 그 취객은 ”야! 야! 공무집행 방해죄로 처벌해! 이 * * 야“ 하면서 막무가내로 계속 떼를 쓴다.

그때 청년은 소란을 피우는 남성을 경찰관들에게서 떼어내서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꼬옥, 손으로는 등을 토닥 토닥. 그러자 그는 따뜻한 포옹에 위로받았는지 울컥하면서 진정된 듯이 고개를 떨구고 청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물리적 힘을 이용한 제지보다 따뜻한 한마디가 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아들은 성격이 그리 너그럽지 못한 편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하면 아마도 부부싸움을 자주 할 것 같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20년이 훌쩍 넘어도 내가 보기엔 별로 부부싸움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며느리에게 ”얘야 애비는 성격이 유하지 못해 네가 힘들 것 같은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네~어머니 그런데요, 저희들은 결혼 전부터 둘이 서로 힘든 일을 한 번씩 겪었지 않아요? 그때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경험이 있어서 좀 서운한 일이 있어도 그 일을 생각하면 쉽게 풀어질 수 있어요” 한다.

아들 내외는 대학의 같은 학과에서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하기 전인 대학 졸업 직후 어느 날 며느리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구에 있는 친척 결혼식에 다녀오다가 교통 사고가 있었고 두 분을 바로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어머니는 그만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크게 부상을 당하셨다. 며느리는 딸만 셋을 둔 집의 맏딸이였다. 아직 어린 딸 삼 형제들로서는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운 큰 사고가 난 것이다. 그때는 아들은 아직 정식으로 상견례를 하지도 않은 상태이였지만 아버지는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시므로 어머니의 사망하신 것을 알리지도 못한 상황에서 아들이 그 사고를 수습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서 돕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였다. 슬프고 무섭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여자 삼 형제에게 아들은 많은 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아들이 대학원에 다닐 때 어느 날 실험실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아들은 한쪽 팔과 다리에 3도 화상을 입었었다. 상처가 깊어서 치료과정도 어렵고 통증도 심했었다. 한 달 넘게 입원해 있는 동안 내가 병원에 있을 수 없었으므로 주로 그 때는 아직 여자친구였던 며늘애가 열심히 간병해 주어 아들뿐 아니라 우리 내외도 많이 고마워했다.

남남끼리 만나서 가정을 이루어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일로 부부싸움을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럴 때마다 서로에게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부부간에 작은 다툼이 있어도 쉽게 마음을 푸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나의 할머니는 화성군 사곡리 고향에서 혼자 살고 계셨다. 할머니께서는 80세가 넘으면서 치매 증상이 생기더니 도저히 혼자는 계실 수 없게 되면서 어머니가 시골로 가셔서 두 분이 함께 사시게 되었다. 할머니는 급기야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시게 되었고 할머니를 덮어드렸던 이부자리를 모두 뜯어 놓는 등 엉뚱한 일로 어머니를 많이 힘들게 하셨다. 지금처럼 더운물이 나오지도 않고, 세탁기도 물론 없는 데다가 우물 물을 퍼서, 그 흔한 고무장갑도 없이 면직물로 된 이부자리며 속옷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빨아야 하고 세 끼 식사에 엉뚱한 행동을 하시는 할머니를 보살피는 일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그 일을 어머니는 약 삼 년간을 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어머니!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삼 년씩이나 하셨어요?” 하고 여쭈어보았다. “그래 나도 많이 힘들었지. 그래서 나는 힘들 때 마다 그 어른이 나한테 고맙게 해 주셨던 일을 생각하며 견뎠다“ 하신다.

어머니는 열일곱 살에 결혼해서 얼마 있다가 오빠 둘을 낳으셨고 그때마다 할머니가 혼자 해산(解産)구완을 해 주셨단다. 아무런 도구나 조력자도 없이 출산하면서 방바닥에 흥건히 고인 혈액이나 배설물들을 맨손으로 휩쓸어 대야에 담으시고 말없이 추운 겨울 피걸래며 온갖 세탁물들을 빨아대시며 산모와 아기를 돌보시는 할머니를 누워서 쳐다보며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고 하셨다. ”나는 앞으로 저 어른이 어려운 일이 있으실 때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릴 것이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간병하며 어려울 때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다시 할머니를 잘 돌보아드릴 마음이 생겼다고 하셨다.

고부간은 남남이 만나서 법으로 이어진 가족이다. 따라서 서로간의 입장이 달라 더 쉽게 사이가 벌어질 수 있다. 그런 관계일수록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 경험을 공유한다면 그 감동의 기억은 어떤 충돌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열쇄가 된다.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 선한 피드백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청년의 포옹이 ‘난동을 부리던 취객을 단번에 진정시켰듯이 선한 기운을 주고받는 관계는 긍정의 쪽으로 힘을 돋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