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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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에 갇히다
  • 정민나
  • 승인 2020.11.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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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마음의 골절상 - 허회숙

 

마음의 골절상

                              - 허회숙

 

착한 애 콤플렉스 속에 자란 나

어른이 되어서도

착한 사람 페르소나에 갇혀 살았다

팔 골절로 입원해 있는 며칠

민망한 내 민낯을 보고야 말았다

조금 양보하면 되는 자리에서

조금 덜 챙기면 되는 자리에서

조금도 내려놓지 않으려던 나

육신의 고통보다 더 아픈

마음의 골절상을 입었다

눈높이 낮추라 낮추라!

완강히 버텨보았지만

무시당했다는 노여움

특별대우 받겠다는 교만

횡포 부리는 권위 의식은

내 마음 따르지 않고 세상 밖으로

마구 뛰쳐나가다 넘어졌다

때늦은 후회가 왔지만

마음의 골절상은

3박 4일이라는 진단서를 받았다

 

우리는 몇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고 산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시를 쓴 화자를 두고 말하자면 그녀는 한국의 유교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여성이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착한 사람 페르소나에 갇혀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교육을 받고 사회로 진출하여 활달하게 바깥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에 적합한 직위를 갖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녀의 가면도 늘어났을 것이다. 집안에서는 여전히 한 남자의 아내요, 아이들의 어머니요, 또한 며느리, 시누이, 누나, 고모라는, 그때그때마다 상황과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가면이 필요했을 테고 집 밖에서도 역시 그녀가 소속한 환경에 적합한 가면이 따로 필요했을 터이다. 한 사람이 갖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우리는 대개는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일이 되어가는 형편에 따라 이 여러 개의 가면을 수시로 번갈아 쓰고, 벗고, 다시 쓰는 과정을 되풀이 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 시의 화자처럼 몸과 마음의 부조화, 나와 너, 현실과 이상, 양보와 교만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피하지 못해 마음의 골절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엉클어진 정체성의 검열이 일어나는 순간은 늘 때늦은 깨달음이 오지만 사실 ‘때늦은 깨달음’이란 없다. 한 몸 안에 착한 사람과 특별대우 받으려는 교만한 사람이 함께 살면서 때에 따라 서로 먼저 밖으로 나서려는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인생을 많이 산 사람이나 왕후장상이나 누구라도 언제라도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녀가 영원히 착한사람 페르소나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살아온 경험을 통해서 그녀 역시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아픔과 성찰을 통해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섰다 하더라도 “내 마음 따르지 않는 또 다른 나”는 언제든지 내게로 다시 부딪혀 오고 상처를 주어왔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그녀는 적합한 페르소나 뒤에 숨거나 혹은 강하거나 정의롭거나, 착한 페르소나를 꺼내들며 그에 대항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3박 4일 입원‘ 이라는 진단서를 받게 된 시적 화자는 의사에게 다친 몸을 치료받으면서 스스로는 자기의 속마음을 스캔한다. 마치 내시경 기구를 들이밀듯 객관적 거리를 두고 깊숙이 그리고 투명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능수능란하게 갈아쓰던 그녀는 이제 순발력이 떨어진 것일까. 그녀가 자신에 대한 연민이나 자괴감을 느끼는 것은 착한 사람 페르소나를 잃어버렸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페르소나에서 자유롭지 못한 혹은 시의적절 하게 대처하지 못해 끌려다니는 자신을 발견한 때문은 아닐까. 나쁜 사람 페르소나도 적재적소에 맞게 쓴다면 아름다울 수 있다.

가면과 일체화를 이루어 교통정리를 잘 하는 사람, 상황에 따라 재빠르게 자신의 정체성에 딱 맞는 가면을 쓰고 유유자적하는 사람. 에너지가 충만한 그를 이 순간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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