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이 많아도 사랑스러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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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이 많아도 사랑스러운 삶
  • 최종규
  • 승인 2011.05.14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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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아이자와 하루카, 《리넨과 거즈 (1)》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예쁜 사람은 예쁘게 살아가고, 미운 사람은 밉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사랑합니다. 예쁜 사람은 예쁘게 사랑하고, 미운 사람은 밉게 사랑합니다.

 새로 맞이한 봄날, 논둑을 거닐거나 숲속을 걷거나 멧길을 오르면, 날마다 새로운 봄내를 맡습니다. 집안에 들어앉았어도 창밖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날이 새로워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집안에서도 바람소리와 새소리를 듣지만, 집밖으로 나가면 훨씬 드넓은 바람소리와 새소리를 듣습니다. 비가 퍼부을 때에는 빗소리가 얼마나 온 마을을 휩싸는지를 새삼스레 느끼면서 빗소리를 듣습니다.

 지난겨울, 눈이 펑펑 퍼붓던 때에는 온 마을이 고요하게 잠듭니다. 눈은 소리를 잠재웁니다. 눈은 소리를 먹으면서 마을을 조용히 하얗게 묻습니다. 봄날부터 가을날까지는 비가 마을을 씻습니다. 모든 소리를 부딪치게 하면서 비가 내립니다. 눈은 모두를 감싸듯이 덮으며 조용하게 하고, 비는 모두를 깨우면서 시끄럽게 합니다.

 눈이 그치고 나면 이제 이 눈을 쓸어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눈을 쓸기 앞서 아이를 불러 아이와 함께 눈밭을 바라보곤 합니다. 비가 쏟아지면 집에서 조용히 옹크리지만, 집에서 옹크리더라도 텃밭을 내다보며 이 빗결에 씨앗이 잘 자라 주려나 하고 헤아립니다. 엊그제 바람이 참 모질게 불었는데, 모진 바람을 맞은 토마토 모는 뽑힐 듯 말 듯하면서 안 뽑혔습니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흙바닥에 머리를 콩콩 박습니다만, 이렇게 머리를 콩콩 박으면서도 뽑히거나 꺾이지 않아요.

 김수영 시인은 풀이 눕지만 다시 일어선다고 노래했는데, 김수영 시인이 노래한 풀을 아주 새롭게 다시 보며 느꼈습니다.

- 하늘은 푸르고, 밥은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몸은 건강하고, 난 정말 행복한 사람. (4쪽)
- 바느질하는 시간이 좋아. 아무 생각도 않고 몰두할 수 있거든. 슬픈 일도 까맣게 잊을 수 있지. (22쪽)

 멧길을 거닐면 다람쥐를 곧잘 만납니다. 다람쥐가 저를 아직 알아채지 않았으면 먹이를 찾으며 부산을 떨거나 바위에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이러다가 저를 알아채면 화들짝 놀라며 부리나케 멧골 깊이 내뺍니다.

 논둑길을 거닐면 왜가리나 해오라기를 더러 만납니다. 왜가리나 해오라기가 개구리를 잡아먹느라 바쁘면 가까이에서 지나가도 못 알아채지만, 사람 낌새가 난다 싶으면 제가 손에 아무것도 안 들었어도 깜짝 놀라면서 큰 날개를 펼쳐 탁탁 소리를 내며 멀리멀리 날아갑니다.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이 타고 온 자동차를 살짝 얻어타고 마을 어귀 밥집에 함께 다녀오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늘 걷거나 자전거로 오가던 이 길을 자동차에 느긋하게 앉아 달리니 아주 빨리 오갈 뿐 아니라 다리힘이 든다든지 등판에 땀이 흐른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바깥 바람이나 소리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재빨리 지나가는 자동차에서는 길가 나무나 풀이나 꽃을 하나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휙휙 스쳐 지나가기 때문에 눈을 밝히고 쳐다본다 한들 제대로 즐기거나 느낄 수 없어요.

- “여전히 혼자 신선놀음이네. 독신은 속 편해서 좋겠다.” “그런 소리 마. 코코미가 카와노를 어찌나 따르는지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바람에 그 애, 아무것도 못했어.” (17쪽)
- “코코미가 많이 외로운가 봐. 언니, 코코미와 좀더 함께 있어 주는 게.” “뭐야! 난 말이지! 나도, 코코미와 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너처럼 태평하게 너 좋아하는 일이나 하며 사는 사람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28쪽)

 집에서 집식구 옷가지를 늘 손빨래로 건사합니다. 손으로 빨래해서 널고 말리며 갭니다. 네 살을 먹은 아이는 제 아버지가 빨래를 하거나 옷을 갤 때면 옆에 꼭 달라붙습니다. 아이는 빨래하는 모습이나 옷 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저도 하고 싶다며 엉겨붙습니다.

 집식구 옷가지를 손으로 빨래하다 보면, 어디가 얼마만큼 더러워지거나 헤졌는가를 금세 알아챕니다. 손으로 만지고 손으로 비비며 손으로 헹구니까 한결 잘 깨닫습니다. 빨래기계에 넣는다 하더라도 다 손으로 넣고 손으로 꺼내니, 누구나 느낄 수 있겠지요. 어느 집이든 일거리가 많을 텐데, 빨래를 손으로 한다면 다른 집일이나 집살림을 건사할 겨를이 크게 줄어든다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네 살쯤 자라고 보니 아이 옷가지 빨래가 확 줄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크면 ‘아이 몸크기만큼 옷가지 빨래가 는다’고 할 테지만, 오줌기저귀랑 똥기저귀 빨래하는 품보다는 적지 않겠느냐 하고 어림해 봅니다. 뭐, 빨래거리가 더 많을 수 있겠지요. 더 많아지면 더 많아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고, 더 줄면 더 준 대로 맞아들이면 돼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 사랑하는 살붙이 옷가지이거든요.

 사랑스러운 옆지기 아프거나 쑤신 허리와 팔다리를 조물조물 주무르듯이 옆지기 옷가지를 조물조물 비비거나 헹굽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안거나 어르거나 달래듯이 아이 옷가지를 살며시 비비거나 헹굽니다. 내 옷은 좀 막 빨고 막 입습니다.

- “즐거운 일을 떠올리며 난 행복하다고 생각하려 하는데, 그래도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없는 건, 참 쓸쓸해.” (37쪽)
- “앞으로는 아동복도 시작해 볼까 하고요. 뭘 만들까 하는 생각에 오랜만에 막 설레고 그래요.” (42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를 봅니다. 손으로 바느질을 하면서 옷이나 여러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부대끼는 이웃하고 얽힌 삶을 다루는 만화입니다. 손으로 하는 일이든 기계로 하는 일이든 언제나 품이 듭니다. 프레스공장에서 같은 물건을 수없이 빠르게 찍어내듯, 옷가지를 빠르게 똑같이 수없이 뜨거나 짜거나 깁지 못합니다. 한 땀씩 바느질을 하거나 재봉틀을 돌리면서 ‘이 옷을 입을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까’를 생각합니다. 천을 고르고 실을 살피면서 ‘어떤 빛깔 어떤 무늬로 예쁘고 쓸모있게 옷 한 벌을 지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은 날마다 새로 밥을 하고 새로 청소를 하며 새로 설거지를 합니다. 아이하고 날마다 새로 사랑을 나누고 새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새로 손을 잡고 뛰어놉니다.

 새 끼니에 새로 밥을 차리면서 오늘 이 밥을 함께 먹을 살붙이들이 어떠한 느낌과 맛과 사랑으로 곱고 즐거이 냠냠짭짭 하려나 헤아립니다. 눈 비비고 일어난 아이한테 새로 옷을 입히면서 오늘은 어떤 모습 어떤 얼굴 어떤 이야기로 하루를 보내려 할까를 떠올립니다.

 “뭘 만들까 하는 생각에 오랜만에 막 설레”는 사람처럼 ‘무얼 마련할까 하는 생각으로 늘 설레’는 집일꾼이거나 집살림꾼입니다. 아이하고 날마다 같은 노래를 부르더라도 어제는 어제 느낌이고 오늘은 오늘 느낌이에요. 아이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더라도 어제는 어제 모습이고 오늘은 오늘 모습입니다.

 꼭 비싼 바깥밥을 사다 먹여야 사랑스레 크는 아이가 아닙니다. 자가용을 태우거나 놀이동산에 데리고 다녀야 즐거워 하는 아이가 아니에요. 무등을 태워도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그저 손을 잡고 숲속을 누벼도 좋아하는 아이예요. 아침에 일어난 아이를 불러, 옆에서 아버지가 당근을 갈아 ‘자, 이제 거의 다 됐네. 조금만 기다려. 숟가락 챙기고.’ 하고 말하면서 당근 한 뿌리 다 갈아 그릇에 소복하게 담아서 내밀 때에도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 “코코미 덧옷이 아주 인기예요. 다들 예쁘다고.” “맞아! 친구들이 다 부럽다, 부럽다 했어.” (55쪽)
- “마침 잘 만났다. 그 덧옷 말이에요. 반 엄마들한테 얘기했더니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만들어 줬으면 하던데! 그리고 바자회 수제품은 몇 개나 만들 수 있겠어요? 10개 정도는 문제 없죠?” (68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는 남다를 구석이 없는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냥저냥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손뜨개를 하건 발뜨개를 하건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옷뜨개를 하건 마음뜨개를 하건, 저마다 제 삶을 어여삐 뜰 수 있으면 기쁩니다.

 돈이 많아도 넉넉하면서 즐거운 삶이 될 수 있고, 돈이 없거나 모자라도 넉넉하면서 즐거운 삶이 될 수 있어요. 값있는 물건을 쓰거나 값진 사진기를 갖출 때에도 즐거운 삶이 될 테지만, 값었다는 싸구려 물건을 쓰거나 사진기라곤 아예 없더라도 즐거운 삶이 돼요. 사진은 기계가 아닌 마음으로 찍거든요. 사랑은 돈이 아닌 마음으로 나누거든요.

 만화책 《리넨과 거즈》는 바로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을 차근차근 펼쳐 보입니다. 빈틈이 많아도 사랑스러운 삶을 일구는 사람들 모습을 조곤조곤 내보입니다. 어쩌면, 빈틈이 많아서 사랑스러운 삶이요 사랑이며 꿈과 보람일는지 모릅니다.

― 리넨과 거즈 1 (아이자와 하루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3.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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