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떠난 소남(邵南) 윤동규 선생의 얼, 되찾아야
상태바
인천 떠난 소남(邵南) 윤동규 선생의 얼, 되찾아야
  • 윤종환 기자
  • 승인 2020.11.30 15: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일 시의회 정례회서 박인동 의원 밝혀
"'인천인' 자랑스러워 하던 선생의 유물 2천여점, 정작 인천에 없어"
"인천의 역사 조명 개항 이후에만 치중... 조선 후기까지 조명해 정체성 확립해야"
소남 윤동규 선생의 문집 '소남문집'. 소남이 성호 이익 선생에게 보낸 간찰 내용이 담겨 있다. ©성호기념관  

인천 출신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 1695~1773) 선생의 유물을 인천으로 되찾아 오고, 번역과 고증 작업을 거쳐 인천의 역사로 자리매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30일 열린 인천시의회 제267회 정례회서 박인동 의원(민주·남동3)은 인천시 관계자에게 “소남 윤동규 선생을 아십니까?”라고 물으며 “이제는 인천의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의원의 설명에 따르면 소남 선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의 수제자였고, 동시에 인천 소성현 도남촌(현 남동구 도림동)에서 나고 자라 임종하기 전까지도 본인이 인천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인물이었다.

그는 “하지만 소남 선생이 남긴 고문서 2천여점과 유물 318점 등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경기도 성남시)에 이관 위탁돼 있다”며 “지금이라도 이를 인천으로 되찾아 와 선생의 삶을 조명하는 것은 물론 인천의 역사 정체성까지도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천시의회 박인동 의원

소남 선생의 유물은 지난 2010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 위탁됐다.

이 유물들은 당초 지난 2005년 선생의 9대 종손이 인천시립박물관에 기탁해 번역과 고증을 부탁했지만, 기탁 기간인 5년이 지나도록 작업에 진척이 없자 후손들이 다시 유물들을 반환받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재위탁한 것이다.

이를두고 박 의원은 “후손들은 연구 작업에 소홀함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탁 기한을 정했을 뿐 사실상 인천시립박물관에 영구 기탁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며 “어쩔 수 없이 연구인력이 충분한 연구원에 재위탁했지만, 지금이라도 인천에 되찾아 와 인천시민들에게 활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그는 “유물 중에는 당대 석학들의 친필이 담긴 간찰이 600여통이나 되고, 10대에 걸친 호패도 6점이 있다”며 “모든 유물이 성호실학파의 학풍은 물론 조선 중·후기 인천의 생활, 경제상을 폭넓게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이어 “역사를 조명함에 있어 인천은 개항기 이후의 인물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제는 역사 조명을 조선 후기 문중들의 역사로까지 끌어올려 새로운 인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남 윤동규 선생은 고려 후기 무관 윤관(尹瓘)의 24세 손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7세에 성호 이익 선생의 문하에 들어 수제자로서 제자들과 함께 『성호사설』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조선 사람이 조선의 역사에 어두움을 탄식하여 고대사의 위치를 밝히는 자수(紫水)·패수(浿水)·열수(洌水)·대수(帶水)의 『사수변(四水辨)』을 저술하였고, 문집으로는 『소남문집』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