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모란(慕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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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모란(慕蘭)
  • 김불위
  • 승인 2020.12.1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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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김불위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50년 제2고향인 인천에 정착해 바쁘게 살다 보니, 귀향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마치 대구 조카 결혼식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동생과 나는 고향인 모란에 잠깐 들렸다.

꿈속에서 그리던 고향 마을 어떻게 변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때는 초여름. 해는 서산을 넘기가 아쉬운 듯 기웃거리고 동구 밖 들어서니 논에는 개구리 장단 맞춰 울어댄다. 산에는 청량한 목소리로 산새가 노래하니 이 모두가 우리를 반기는 듯했다. 길섶에 홀로 핀 자색 반지꽃 곱게 따서 동생 손가락에 끼워주며 옛날을 재연해 보고 정겹게 미소 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산뜻한 공기는 너무나 갈망하던 고향의 냄새인데 왠지 나의 유년기 시절과는 다른 고적함이 서려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건만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내 고향 모란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 옛날 아침부터 글 읽는 소리에 잠을 깨던 사랑방이 눈에 들어온다. 어림으로 등잔과 붓 대롱이 걸려있던 벽을 바라보자 그 아래 앉아계신 인자하신 조부님의 근엄하신 모습이 파노라마로 전개된다. 흰 바지저고리 허리춤에 돋보기안경집 차신 할아버지. 뒷짐 짓고 걸으시는 할아버지.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할아버지는 정말 멋져 보이셨다.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부모님, 형제자매 북적대며 살아가던 고향 집이 바닥에 조용히 엎드려 있다가 살며시 고개를 드는 느낌이 든다.

동생과 나는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어머니께서 맛있는 밥을 지어주던 가마 솥, 아버지의 소반상은 상상의 먼지 속에 갇혀 있다가 먼지를 털며 다가온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꿈속에서도 자주 보이던 동네우물 하루에도 몇 번씩 물 길러 다니던 길이 드러난다. 숲에 묻혀있는 우물을 헤치고 봤더니 콘크리트 위에 새겨진 연도가 세월의 흐름을 알려 주었다. 조금 고여 있는 물은 “왜 이제 왔냐고” 원망이라도 하는 듯 슬퍼 보였다. 나는 우물을 길어 두 손을 담그면서 “미안해 잘 있었어?” 인사를 했다.

밤이 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친구들과 모래사장에 나와 앉아 새벽이슬이 촉촉이 내려앉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쑥 베어 모깃불 피워놓고 멍석에 앉아 옥수수 감자 삶아 나눠 먹으며 가족들과도 별빛 쏟아지는 밤하늘을 이야기했다. 그 자리 지금은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고 곳곳에서 유년기 시절 동영상이 돌아간다. 나의 죽마고우(竹馬故友)들은 항상 같이 다녔다. 예쁘게 생긴 점수는 이웃집 총각이랑 사랑을 해 결혼하니 어른들은 못마땅해 혀를 끌끌 찼지만 사랑엔 국경도 없다는 말과 같이 그렇게 엄한 시기에도 결혼에 꼴인 해 지금 공기 좋은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성격 활달한 춘자는 리더십도 강하고 친구들 웃기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지금 대구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흐릿한 호롱불 밑에서 머리 맞대고 한땀 한땀 십자수 놓으며 내님은 어디에 있을까 가슴 부풀던 그 시절의 친구들이 생각난다.

방학 때면 외대 다니는 사촌오빠를 비롯해 외지에 나간 학생들이 고향 찾아 몰려와 동네가 온통 난리 법석 이였다. 큰 형부가 충남 대 명예교수 재직 중이시던 때는 중학교 교장선생님인 사촌 형부와 약속하시고 처가에 꼭 다녀가셨다. 어느 여름방학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날 평상에 모여앉아 아버지 어머니 흐뭇해하시고 화기애애한 웃음소리 밤공기를 타고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추억의 동영상을 감상하니 그 옛날이 실물 그대로 눈앞에 있다. 20호가 넘는 아담한 마을에 유 씨와 김 씨가 어울려 다정다감한 살았는데 지금은 옛 어른들은 하늘나라로 떠났고 젊은이들은 삶을 찾아 제각각 대처로 떠나갔다. 그나마 김 씨 문중 정자를 지어 자손들이 해마다 조상 숭배하는 행사가 있어 몇 가구만 고향을 지키고 산다. 후세들도 이젠 노년이 되었으니 귀향하여 고향을 지키고 살았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지만 나 역시 그렇게 그리던 고향을 눈과 마음에 담고 다시 내 길을 간다. 내 유년의 시간을 실감나게 보여준 야트막한 산과 촉촉한 들풀들이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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