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학파의 좌장 소남 윤동규' - 200년만에 나온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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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학파의 좌장 소남 윤동규' - 200년만에 나온 평전
  • 송정로 기자
  • 승인 2021.01.0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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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1세대로 성호 이익의 맏제자인 소남 윤동규의 방대한 문집과 문서, 유품들이 지난 200여년간 인천시 남동구 도림동 종가에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소담은 인천에 묻혀 살며 공부만 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소남과 함께 성호의 3대 제자로 꼽히는 안정복은 사헌부감찰에 정조의 교육을 담당한 관료 출신으로 ‘동사강목’을 썼고, 이병휴는 성호의 조카로 성호의 문집을 집대성해 널리 알려졌다.

소남의 문집은 방대하지만 묻혀있어 한국고전번역원 문집총간에도 들지 못하고 번역도 되지 못해 학자들의 접근이 어려웠다.

인천 남동문화원이 30일 '소남의 날' 기념행사를 하면서 소남 윤동규 총서1 - ‘성호학파의 좌장 소남 윤동규’를 인천 출신 허경진 박사(연세대 명예교수)의 집필로 완성해 출판기념회를 함께 열었다. 이 행사에서 허 박사는 저자로서 30여분 특강하는 시간을 가졌다.

허 박사의 ‘소남 윤동규’는 이러한 현실에서 소남을 제대로 알고 선양하기 위한 주춧돌이 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소남 윤동규’는 5장으로 구성됐다. 1장- 학문에만 전념한 윤동규의 생애. 2장-성호 문하에 들어가 학문하다. 3장- 인천에서 가장 컸던 도남촌 도서관. 4장-인천의 성호학파와 윤동규의 제자들. 5장-성호학파의 외연을 끌어들인 인천의 숙제.

1장에서는 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로 소윤를 형성한 윤지임(1475~1534)과 그의 셋째 아들 윤필원의 후손들에 대해 쓰고 있다. 윤필원의 셋째 아들 윤상전(1592~?)이 소남의 고조부다. 윤상전의 형 윤상민이 137대 인천도호부사(종3품)였는데 이로 이 지역에 관해 잘 알고 있던 윤상전이 병자호란 뒤 시국이 어수선하자 인천으로 이사온 것이다. 윤상전이 인천 도림동으로 이사한 이래 소담의 증조부, 조부, 부친. 소남 자신, 그리고 그의 5세손까지 모두 도림동 도리산 아래 묻혔다.

윤지임이 중종의 장인이 되자 부귀영화가 분에 넘치는 것을 걱정해 ‘자손 10대에 이르기까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말고, 지아비는 밭을 갈고 지어미는 길쌈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가르침을 제대로 지킨 후손이 윤동규다. 종가에 윤동규의 선대와 후대 통털어 시권(試券) 과 과지(科紙)가 수십장 남아 있지만 윤동규만 과지를 찾아 볼 수 없다.

윤동규는 성균관에 진학하여 문과에 응시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성호 문하에 찾아가 벼슬과 거리가 먼 학문의 길을 택하였다. 당시 ‘학생부군’(學生府君)이란 표현 그대로 영원한 학생의 길을 택한 것이다. 윤동규의 선대와 후대를 살펴보면 다들 열심히 공부했음을 알수 있지만 시험공부가 아니라 학문 자체를 즐겨서 공부한 사람은 윤동규뿐이었다.

이때부터 윤동규는 호를 소남촌인(邵南村人), 또는 소남(邵南)이라 했는데, 인천의 옛이름 소성(邵城)과 도남촌(道南村)을 합하여 만든 호이다. 도남촌은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는 길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지금의 남동구 도림동이다.

2장 말미에 ‘성호학파 내에서 윤동규의 위상’에 대해 설명한다. 윤동규가 17세 되던 1711년에 성호 문하에 들어가자 성호가 “그의 지조가 견실하고 견해가 명석한 것을 사랑하여” “우리의 도가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순암 안정복이 쓴 윤동규의 행장(죽은 사람이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 의하면, 소남이 제일 먼저 성호에게 학문을 배웠기에, 소남이 학자로 자라면서 스승의 저술들을 정리하여 성호도 대학자로 커졌고, 이 두 사람에 의해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4장에서 윤동규의 제자들로 성호의 조카 이병휴를 비롯해 사간 이봉령의 아들 이제임, 권귀언, 윤광연, 안경증, 이기경, 한정운 등 10명에 대해 11페이지에 걸쳐 기록하고 있다.

5장에서 저자는 '성호전집'을 다시 편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남의 자료 중 가장 숫자가 많은 자료가 간찰(편지)인데, 소남이 보낸 것이 308통, 받은 것이 334통, 그 밖의 것이 48통이다. 이중 소남이 받은 편지의 발신인은 성호가 221통이다. 간찰은 친필이어서 하나하나가 중요한 문화재이거니와, 이 가운데 성호의 간찰을 예로 들면 '성호선생전집'에는 이 가운데 56통 밖에 실리지 않아 165통이나 되는 성호의 친필들이 새로운 자료로 발견된 셈이기 때문이다. 

이 자료가 모두 탈초(脫草)되고 번역되면 성호와 소남의 관계 뿐 아니라 성호학파의 전모도 좀 더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또 현재 남아있는 소남의 문집이 온전한 형태가 아니며, 편집 과정에 수많은 글들이 없어졌다며, 남아있는 글과 행적만으로도 성호학파의 중심인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없어진 많은 글들을 찾을 수 있다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의 반열에 올려놓다도 손색이 없다고 안타까워 한다.

저자는 이와함께 소남 종가에 300년 동안 전해 오던 ‘소남선생유집초’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지금까지 안산(성호 이익)과 경기 광주(순암 안정복), 충청도 중심으로 제한되었던 성호학파의 문화지도를 인천까지 넓혀보기 위해 윤동규의 인천의 성호학파를 개괄적으로 소개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소남의 유물은 2005년 2월22일 인천시립박물관에 기탁됐다. 그러나 5년 후 2010년 1월15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다시 이관 위탁되었다. 소남의 9대 종손 윤형진씨는 소남의 자료들이 고향 인천에 소장되지 못하고 중앙기관에 위탁된 사실을 마음 아파하고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인천시립박물관, 또는 인천문화재단에서 영구위탁받아 번역 과정을 거쳐 많은 사람들에게 활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소남 문집과 간찰
소남 문집과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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