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노(喜怒)는 기(氣)의 발로' - 소남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 주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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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노(喜怒)는 기(氣)의 발로' - 소남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 주목해야
  • 송성섭
  • 승인 2021.01.26 16:59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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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2) 소남학의 자리에 대한 모색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지난 12월 30일 인천 남동문화원이 기념사업준비위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천in]은 남동문화원의 소남 연구사업을 지난해 12월 [소남 윤동규를 조명한다]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특집기사로 소개했습니다. 이어 새해에는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새해 특집기사는 남동문화원 소남 연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송성섭 박사(동양철학)가 집필을 맡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소남선생유집초 전질
소남선생유집초 전질

정체성이란 자리잡기이다. 시대마다 절박하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자리잡는가에 따라 좌표가 정해지고, 이러한 좌표들의 목록에 의해 정체성이 부여되며, 좌표들의 계보에 의해 학파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소남 윤동규 선생은 그 시대의 현안들에 대해 어디에 자리를 잡았을까?

순암 안정복이 쓴 소남 선생의 행장에 의하면, 선생은 『태현경(太玄經)』을 한 번 보고서 환히 알고 그 취지를 설명할 정도였다고 한다. 소남의 스승인 성호 이익은 궁리지학(窮理之學)의 경우, 당대에 소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고 평하였다.

『태현경(太玄經)』은 양웅(楊雄)의 저작이다. 양웅이 살았던 전한 말기 ~ 후한 초기는 각종 경전을 점성술적, 신비적, 예언적을 해석하는 소위 참위(讖緯)가 극성을 이루던 시대였다. 아울러 황제와 노자(老子)를 추숭하는 이른바 황로학(黃老學)이 횡행하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양웅은 경(經)으로는 『역』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고 여겨 『태현(太玄)』을 지었고, 전(傳)으로는 『논어』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고 여겨 『법언(法言)』을 지었다. 양웅은 도(道)에 들어가는 문은 바로 공자(孔子)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또한 노자의 도덕에 관한 사상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양웅은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사당에서 석전(釋奠)의 예를 행할 때, 배향하는 명단에 포함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양웅이 중국 최초의 왕위 찬탈로 평가받는 왕망의 신(新) 왕조에서 대부를 지낸 사실 때문에, 주자(朱子)로부터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의해 조선 태종 때부터 제사의 명단에서 양웅을 배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주를 사람이 보지 못하는 막히고 가려진 곳에 묻어버렸다. 또한 영조(英祖)도 양웅에 대하여 “그의 심사(心事)뿐만 아니라 마음과 행적도 모두 옳지 않다.”고 평한 적이 있는데, 소남 선생이 양웅의 『태현경(太玄經)』을 공부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또한 소남 행장에 따르면, 선생은 주염계(周濂溪)와 정명도(程明道)의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주염계(周濂溪)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를 지어 송명 도학(道學)의 시초를 연 사람이다. 정명도는 동생 정이천과 함께 부친의 명에 따라 주염계에게 배웠는데, 주염계가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곳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를 묻자, 정명도는 “주무숙(염계)을 다시 뵙고 나서부터 바람과 달을 읊고 노닐며 돌아왔다. 나는 증점과 함께 하겠다는 뜻이 있었다.”고 답하였다.

증점은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누군가가 자네들을 알아준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에 자로는 백성들을 용맹스럽게 만들어 군사 강국을 만들어 보겠다고 하고, 염구는 재정적으로 풍족한 부유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답했으며, 공서화는 예를 돕는 소상(小相)이 되겠다고 하였다. 공자가 증점에게 묻자, 증점은 연주하고 있었던 비파를 밀어 젖히면서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갓 쓴 이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다가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답하였는데, 공자는 감탄하면서 증점과 함께 하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소남 선생에게도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와 같은 기상이 있었다는 것인가? 소남 선생은 처음에는 과거 시험 공부를 하였지만 이내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하여, 세간에 공부 이외에 다른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를 몰랐다고 한다. 선생은 만년에 용산의 옛 마을에 다시 살았던 적이 있다. 마을 앞에 큰 강이 흘러 강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선생이 때로는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도 하여, 무우단(舞雩壇)에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을 가졌고, 수레와 사람이 복잡한 시장거리에 살면서도 조금도 속세에 오염되지 않고, 시원한 청풍의 기상이 있었다고 행장(行狀)은 전하고 있다.

안정복이 주도하고 소남이 하교하면서 편찬한 이자수어(李子粹語)
안정복이 주도하고 소남이 하교하면서 편찬한 이자수어(李子粹語)

 

성호학파는 도통(道通)에 관해서는 주자(朱子)-퇴계의 계보였다. 퇴계에 대해서는 조선의 주자라고 여기었다. 우리 나라가 생긴 이래로 학문이 훌륭하기가 퇴계(退溪)만한 이가 없다고 여기어 순암 안정복이 주도하고 소남 선생이 하교(下敎)하면서 이자수어(李子粹語)를 편찬하였다.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은 『주자어류』에서 나온 것을 퇴계 선생이 『천명도설』의 서문에 기록한 것인데, 기대승(奇大升)과 퇴계 선생은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논변하였다. 이에 학자들의 학술이 어긋나게 되는 것을 걱정하여 성호 선생이 『사칠신편』을 지었다. 그 뒤에 성호 선생의 제자인 신후담이 “공리(公理)의 희노(喜怒)는 이(理)의 발로이다.”라는 설을 제기하자, 성호 선생이 그 설을 받아들여 『사칠신편』의 발문을 다시 지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중발(重跋)로써 「소남유고」에도 전문이 실려 있다.

공리(公理)의 희노(喜怒)란 예를 들면, 요순(堯舜) 시대에 제순(帝舜)이 노하거나, 맹자(孟子)가 기뻐한 것을 말한다. 제순(帝舜)이 통치할 때, 유묘(有苗)가 어둡고 미혹하며 불경(不敬)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어진 체하며, 도를 위배하고 덕을 파괴하여, 군자가 초야에 있고 소인이 높은 지위에 있어 무력으로 정벌하고자 했다. 그런데 제순(帝舜)이 마침내 문덕(文德)을 크게 펴시어 무무(武舞)와 문무(文舞)로 두 뜰에서 춤을 추셨는데, 70일 만에 유묘(有苗)가 와서 항복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노나라의 악정자(樂正子)는 선(善)한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인데, 악정자로 하여금 정사를 다스리게 하자, 맹자가 이 말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희노(喜怒)는 사사로운 인간적 정감의 발로, 즉 기(氣)의 발로가 아니라, 성리(性理)의 발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남 선생은 비록 성인의 마음이더라도 그 근본을 미루어 보면, 그 희노(喜怒)는 기(氣)의 발로라고 변론하였으며, 성호 선생이 그 변론에 수긍하여 중발(重跋)을 즉시 지워버리고 그 설을 쓰지 않았다.

그 후에 다시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가 성인의 공정한 희노(喜怒)는 이발(理發)이라는 설을 다시 주장하면서 소남 선생과 20년도 넘게 다투었으나, 선생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임종할 무렵에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사칠이기설은 『사칠신편』과 서로 뜻을 분명히 밝혀주는 것으로서, 후세에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올해부터 남동문화원이 주관하여 「소남유고」에 대한 번역 사업이 시작된다. 이제까지 봉인되었던 판도라의 상자가 드디어 해제되는 것이다. 소남 선생이 유언했던 것처럼 이제서야 비로서 선생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의 진가를 알아줄 때가 도래한 것이리라.

퇴계와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성호 선생이 「사칠신편」을 지었으며, 성호 선생의 「사칠신편」은 신후담의 문제 제기에 의해 「중발(重跋」로 수정되었다. 이후 「중발(重跋」은 소남 선생의 문제 제기에 의해 폐기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성호학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나아가 퇴계학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 자리는 바로 여기이지 않을까? 소남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 바로 여기가 바로 소남 학문의 자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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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1-27 01:39:21
하느님의 종교인 수천년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의 정체성을 확실히하고, 하느님과 별개의 철학인 도교,불교를 이해하는것도 어느정도 필요합니다.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天生蒸民), 하느님이 선택하신 공자님의 天命.天德등과, 하늘에 죄지으면 빌곳이 없다는 공자님의 인의예지신, 공맹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삼강오륜과, 모든 인간이 노력하면서 군자의 길을 가야하는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수천년동안 동아시아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온 세계종교입니다.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조선성명 복구령 전국민이 조선 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 의무등록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도. 학교교육도 한문,윤리등을 통해 유교교육이 주류. 세계사로는 한나라때 공자님을 추가로 제사하며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성립. 한국사로는

윤진한 2021-01-27 01:40:03
유교의 始原유교의 제천의식인 삼한 상달제.시월제, 부여 영고,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 교육. 조상제사의 고인돌. 유교 교육기관 교육으로 보면 고구려 태학.백제 오경박사, 신라 국학, 고려 국자감,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유교 최고대학 교육. 은주시대 성립한 始原유교의 하느님,오제[上帝, 조상신계열로 승천, 하느님(天) 하위신으로 계절주관], 지신,산천신,부엌신등 숭배. 은나라 왕족후손인 기자의 한국 기자조선(고려,조선시대 인정, 일제강점기 영향탓 기자조선이 부정되나 한국사의 고조선중 正史영역 기자조선임)의 마지막왕인 기준왕(분명한 正史인물 위만에 멸망)은 중국 始原유교 특징인 한문성씨(서씨,한씨) 성립의 시조로 삼한(三韓)의 조상이 됨. 삼한은 始原유교 특징인 제천의식(단오절,상달제,시월제) 거행. 삼한의

윤진한 2021-01-27 01:41:03
삼한(三韓)의 조상이 됨. 삼한은 始原유교 특징인 제천의식(단오절,상달제,시월제) 거행. 삼한의 마한유교는 백제영토로, 변한 유교는 가야로, 진한 유교는 신라로 이어짐. 한나라때 공자님의 유가사상이 국교로 채택되며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로 성립되고 공자님도 제사. 한사군의 낙랑은 부여.고구려(고주몽).백제(주몽임금 후손 온조왕, 백제는 마한영토의 始原유교도 승계)에 영향.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현재는 5,000만이 유교성명 복구하여 문중별.가족별 조상제사 행하며, 설날.추석.대보름.한식.단오의 주요 명절과 중양절(국화철)을 가지고, 유교문화 24절기의 입춘, 소서.대서의 삼계탕.피서, 상강(단

윤진한 2021-01-27 01:42:02
상강(단풍철), 입동.소설의 김장철, 동지의 팥죽등 세시풍속을 가짐.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 성균관대임.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세계종교 유교가 위기에 있지만, 유교의 세계종교 자격이 있는 세계사를 반영해야 하기때문에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된 예수회(귀족출신 이나시오 사제가 설립한 예수회는 교황청의 실세로 세계적으로 교황윤허대학은 별로 없음)의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국사 성균관 자격가진 성균관대[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다음의 Royal대로 성균관대 출신인 필자(윤진한, 문필가.유학자.사상가)의 사상이며, 유교와 세계종교 가톨릭의 역사적 자격을 바탕으로 공존하고자 함. 세계사의 오랜전통의 대학들인 중국 태학(세계 최초의 대학).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경사대학당과

윤진한 2021-01-27 01:44:26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로 승계됨), 그리고 서양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파리대학의 세계사 자격은 베이징대와 성균관대에 아주 중요함. 세계사의 중국 황하문명, 세계종교 유교, 세계 4대 발명품으로 교육되는 중국의 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도 중요함. 학교교육 전분야에 걸쳐 근대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 학자들의 이론으로 이루어진 학교교육(신학.법학.의학및 역사.철학과 고교때의 수학, 세계사, 사회문화, 국토지리.세계지리,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음악.미술등)은 유교경전이나 가톨릭 경전과 함께 세계인의 만국공통어임. 성균관대는 일본이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한 후, 미군정당시 성균관을 복구시키로 법을 발효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고문:이승만.김구선생, 위원장:김창숙 선생)과 남북유림들이 모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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