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을 가슴에서 다 풀어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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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을 가슴에서 다 풀어내기 전에
  • 정민나
  • 승인 2021.02.0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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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여자가 달린다 빙빙 - 이화은

 

여자가 달린다 빙빙

                                            - 이화은

 

여자가 쉐타를 푼다

남자의 뺨을 때리던 오른쪽 팔이 없어졌다

구경하던 왼쪽 팔이 없어졌다

잠시 여자가 손을 멈추고 인공 눈물을 넣는다

다시 목을 푼다 목을 꺾듯

아직도 붉은 꽃을 가슴에서 풀어낸다

꽃이 사라지자 가슴도 사라졌다

트랙을 달리는 마라톤 선수처럼

여자가 달린다 여자를 따라 빙빙 털실이 달린다

트랙을 수백 바퀴 돌아도

여자의 눈물을 훔쳐간 도둑을 잡을 수가 없다

털실 뭉치가 자꾸 커진다

쉐타를 다 풀어낸 여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시 눈물을 넣는다

아무도 여자가 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인은 여자가 쉐타를 푸는 행위와 그 사이사이 인공눈물을 투입하는 장면을 지그재그로 마치 다시 옷감을 짜듯 시를 쓰고 있다. 쉐타를 풀기 시작하면 당연히 원래 형태를 가졌던 옷의 모양이 사라진다. 시인은 그 모습에서 과거에 있었던 (혹은 과거에 보았던) 어떤 기억을 충첩시킨다.

쉐타의 오른 팔이 사라질 때 “남자의 뺨을 때리던 오른 팔이 없어졌다.” 하고 쉐타의 왼팔이 사라질 때 “구경하던 왼쪽 팔이 없어졌다”라고 추상적 표현을 한다. 이 때 시적 화자는 자신의 눈에 인공눈물을 넣는데 이러한 행동 역시 이 시의 상상적인 장면과 어울리는 적절한 타이밍이 된다. 다시 여자는 쉐타를 푸는데 이번에는 목이다. 그런데 “목을 꺾듯” 목을 푼다. 이 대목에서도 여자와 남자의 격렬한 싸움이 연상된다.

21세기가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성평등이나 젠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곤 한다. 동등한 위치의 사회현장에서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존엄하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성평등을 선도하던 전 정당대표의 성 추행사건이라니! 그 사실을 공개하는 젠더 인권본부장의 목소리는 잠시 멈칫, 울먹였다.

여성들의 영원한 동지인 남성들은 이제 눈치를 채야만 한다. 자꾸만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물을 넣는 척 우는 여자(쉐타를 푸는 여자). “여자의 눈물을 훔쳐간 도둑을 잡”으려고 마라톤 선수처럼 트랙을 도는 여자(아내이자 이 사회 차별을 바로 잡으려는 여전사, 시인).

여성들이 “붉은 꽃을 가슴에서” 다 풀어내기 전에. 서로를 비추는 아름다운 “꽃이 사라지”기 전에. 서로를 평등하게 존중하지 않는 인관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진실을. 지속적으로 젠더 불평등을 느끼는 여성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 분노로 바뀌곤 한다는 사실을.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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