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별, 윤동규 - 동·서양 천문 지식을 섭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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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별, 윤동규 - 동·서양 천문 지식을 섭렵하다
  • 송성섭
  • 승인 2021.02.0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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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3) 성호의 문인이 된 소남의 형제들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지난 12월 30일 인천 남동문화원이 기념사업준비위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천in]은 남동문화원의 소남 연구사업을 지난해 12월 [소남 윤동규를 조명한다]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특집기사로 소개했습니다. 이어 새해에는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특집기사는 남동문화원 소남 연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송성섭 박사(동양철학)가 집필을 맡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인간의 마음은 위태롭기 그지 없다. 작심 3일도 모자라서 아침 저녁으로 바뀌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도심(道心)뿐인데, 도심은 잘 드러나지 않아서 알아보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요(堯)가 순(舜)에게 전해주고, 순(舜)이 우(禹)에게 전해 준 16자 심법 중의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이다.

도심(道心)은 하늘(天)과 관련이 있다. 조변석개 (朝變夕改)하는 인간의 마음은 신뢰할 수 없으며, 믿을 수 있는 것은 별들의 운행 원리, 즉 천도(天道)⸱천리(天理)일 뿐이다. 그래서 천도(天道)⸱천리(天理)⸱천명(天命)을 받은 자만이 천자(天子)가 될 수 있었으며, 천명(天命)은 인간의 마음에 내면화되어 성리(性理)가 되었다.

소남(邵南)의 형제들은 별들의 자식이었다. 소남 윤동규(尹東奎)를 필두로 둘째 아우 동기(東箕), 막내 아우 동진(東軫)은 모두 28수(宿)에 부합하는 별을 택하여 이름을 지었다. 규(奎)라는 별은 서방(西方) 백호(白虎) 7수(宿) 중에서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별이며, 기(箕)라는 별은 동방(東方) 청룡(靑龍)의 7수(宿) 중에서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별이며, 진(軫)은 남방(南方) 7수(宿) 중에서 주작(朱雀)의 꼬리에 해당하는 별이다.

소남 선생의 별자리인 규수(奎宿)는 조선 세종 때 천문학을 연구하던 이순지(李純之)의 천문류초(天文類抄)에 의하면, 열여섯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발 모양이고,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이며, 술(戌)의 방향에 해당한다. 별의 기운에 의하면, 소남 선생은 천생(天生) 학문을 할 운이다.

 

이순지의 천문류초에 표시되어 있는 규수에 대한 설명

 

소남의 둘째 아우 동기(東箕)의 별에 해당하는 기수(箕宿)는 네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으며, 곡식을 까부르는 키(箕)의 형상이고, 하늘 닭 즉 천계(天鷄)라고도 부른다. 『주역』에서는 바람을 뜻하는 손괘(巽卦)를 닭(鷄)이라고 하는데, 닭은 바람과 같이 안으로 파고드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향계에 닭을 상징물로 올려놓는 풍속이 있게 되었다. 팔풍(八風)을 주관해서, 일(日)⸱월(月)⸱성(星)이 머무는 곳에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다.

동기(東箕)의 나이가 아직 약관이 못 되었을 때, 성호 선생의 문인(門人)이 되어 자신의 자(字)를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성호 선생이 『주역』을 상고해 보니, 〈명이괘(明夷卦) 육오(六五)〉에 “기자가 스스로 자신의 밝음을 감추는 것이니, 정한 것이 이롭다.〔箕子之明夷 利貞〕”라고 하였는데, 공자(孔子)가 “기자의 정함은 밝음이 종식될 수 없는 것이다.〔箕子之貞 明不可息也〕”라고 전(傳)을 달았다. 이에 자(字)를 ‘원명(源明)’이라 지었다.

막내 아우 동진(東軫)의 별에 해당하는 진수(軫宿)는 네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巳)의 방향에 있고, 장군(將軍)과 악부(樂府)를 맡으니, 노래하고 즐기는 일을 주관한다. 소남 선생은 성호장(星湖莊)을 방문하여 아직 입학할 나이가 안 된 아우에 대해 자주 말하였는데, 지키고 기르는 바나 숭상하는 바가 그다지 얕지 않다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나 복춘(復春), 즉 동진(東軫)이 과연 성호 선생에게 왔는데, 기운은 맑고 성품은 고요하였으며,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고 전한다. 글을 보는 데에 있어서 많은 지도를 받지 않고도 날로 깊이 진보되더니, 어느덧 차분하고 단아하며 엄정한 군자가 되었다. 그런데 서른두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성호 선생은 제문을 지어 슬퍼하였다.

 

  슬프다, 복춘(復春)이여! (…) 그대가 학문에 뜻을 두고 나에게 와서 배웠는데, 10년 이전에는 내가 그대에게 학문을 가르쳤지만 10년 이후로는 그대가 실로 나의 스승 노릇을 하였다. 그대가 나에게 배운 것은 구두(句讀)를 떼는 것뿐이었고, 그대가 나의 스승이 된 것은 그 인품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손하고 화락하여 꺼내는 말마다 이치에 맞았으며,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유학에 전심하여, 경전을 강론할 때는 반드시 요점을 파악하였고 예법을 논할 때는 반드시 그 근원까지 파고들었다. 게다가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향리에 널리 알려졌으니, 아름다운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 하겠다.(祭尹復春文)

 

복춘(復春)은 수많은 예가(禮家)의 각종 설에도 힘을 써서 꼼꼼히 연구하여 반드시 그렇게 된 본원을 찾고, 세속의 잘못된 학설을 답습하지 않았는데, 성호 선생은 “내가 예서(禮書)를 지은 것은 대개 복춘(復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오칠언의 장편과 단편시 같은 것을 적은 〈만흥수록(漫興隨錄)〉 약간 권을 남겼다. 성호 선생은 “그 고체시(古體詩)와 장구(長句)는 종종 모래 속에서 옥이 나오는 듯하였으니, 비록 옥의 티는 가릴 수 없다 할지라도, 까치에게 던지는 곤륜산(崑崙山)의 옥돌처럼 크고 작은 보옥이 흔하게 나왔다.”고 평하였다. 자호를 ‘관어처사(觀於處士)’라 하였다.

복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천문 관측, 산수(算數) 등에 대해서도 연구하였으며, 손수 나무를 깎아 기형(璣衡)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종일 일하면서도 지칠 줄을 몰랐다. 기형(璣衡)은 선기(璿璣)와 옥형(玉衡), 즉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이다. 『상서(尙書)』 「요전(堯典)」에서는 “선기옥형으로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한다(在璿璣玉衡,以齊七政).”고 하였다. 칠정은 해와 달, 그리고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을 말한다. 조선에서도 세종 15년인 1433년 6월 정초·박연(朴堧)·김진(金鎭) 등이 혼천의를 만들어 바친 적이 있다.

 

천문관측기구 선기옥형도

 

소남 선생도 물론 천문에 대하여 정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순암(順庵) 안정복은 편지를 통하여 낭성(狼星)이라는 별에 대하여 소남 선생에게 묻기도 하였다. 또한 소남 선생 종가에서 발견된 『곤여도설』 마지막 장에는 자신이 성호 선생에게서 빌려다 필사하여 소장하고 있었던 양마락(陽瑪諾, Emmanuel Diaz. Junior)이 저술한 『천문략(天問略)』과 이탈리아 선교사 민명아(閔明我, Philippus Maria Grimardi)가 제작한 『방성도(方星圖)』 등의 서양 천문 서적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소남 선생은 동양의 천문 지식 뿐만 아니라 서양의 천문 지식에도 밝았다고 할 수 있다.

 

천문략(우)와 방성도(우) - 실학박물관 소장
천문략(좌)와 정육면체로 제작한 방성도(우) - 실학박물관 소장

 

인간은 저마다 태어날 때 별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며, 죽어서는 자기의 별로 돌아간다. 소남 윤동규 선생의 별은 서방 7수 중의 규수(奎宿)였으며, 이를 자기의 이름으로 삼았다. 죽어서 도남촌 술좌(戌坐)의 자리에 장사하였는데, 규수(奎宿)의 별자리가 바로 술(戌)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소남 선생은 인천의 별이 되었다.

 

방성도(1,2장)

 

방성도(3,4장)
방성도
방성도(5,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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