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 배워 세상을 밝히리…"
상태바
"힘써 배워 세상을 밝히리…"
  • 김주희
  • 승인 2011.06.13 1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남구 학익동(中-28)

취재: 김주희 기자


문학터널 위에서 내려다본 학익동과 남동나들목 전경.
이 주변에 학산서원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숙종때 제운 선생이라 불리던 학자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명민하기 그지 없었던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까지 지극했다.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둬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경학에만 힘썼다. 비록 가난했으나 불혹의 나이에 후진양성에 온 힘을 쏟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곧은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사람들은 그를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고까지 칭송했다.

조선조 숙종때 종 2품 가선대부(嘉善大府)에 오른 이세주(李世冑 1626~1710)의 이야기다.

 


제운 이세주 선생이 후학을 가르쳤을 사당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는
문학산 문학레포츠공원.

남구 학익동을 예전에는 '제운리'라고 했다. '제운'(霽雲)은 당시 학익동에서 서당을 열어 많은 인재를 길러낸 이세주의 아호다.

이세주는 부평 이씨 후손이다.

부평 이씨는 고려 개국 공신 이희목을 시조로 한 인천의 명가(名家)다. 고려 초기 문신귀족으로 권세를 누렸으나, 고려후기 무신난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조선개국에 참여하지 않아 가문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세종때 들어서 명문가로 재부상했다.

그런 부평 이씨는 조선 중기부터 문학산 주변에 정착해 살았다. 선학동(도장리)와 용현동(비룡리), 그리고 문학동과 학익동 등지에 넓게 분포해 있었다.

이 지역에 산 부평 이씨 중 이름이 후대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 많은데, 우선 병자호란때 낙섬에서 만주 오랑캐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이윤생(李允生 1604~1637)이 그렇다.

또 이조판서를 지낸 이세화(李世華, 1630~1701)는 당시 부평 이씨가 낳은 최고 인물로 꼽힌다. 충효와 청렴의 기풍을 빛낸 인물로, 공조·형조·병조·이조 판서를 거쳐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그가 가문의 맏형격인 이세주를 일컬어 "제운 형님이 참 형님이고, 금세의 성인이니 우리 가문 자제들은 이 형님을 사표로 삼자"고 했다고 하니, 제운 선생의 성품을 가히 짐작하겠다.

문학산 서북록 현 학익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명민하기 그지 없었다고 전해온다.

특히 효심이 지극해, 다른 이의 표상이 됐다고 한다.

어머니가 학질에 걸리자 약으로 쓸 참새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잡아다 잡숫게 했다거나, 여름에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부채질을 하고, 겨울에는 어머니 잠옷을 미리 입어 따듯하게 해두었다고 한다. 고령의 어머니가 병이 나자 밤낮으로 간호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세간의 모범이 됐다.

그런 그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했다. 문학산 기슭에 서당을 열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고 하니, 그곳이 지금의 문학산 레포츠공원 인근으로 추정된다.


남구학산문화원이 남구와 학계 등과 함께 학산서원터로 추정되는 곳에
지난 2004년 표지석을 세웠다. 표지석 뒷편이 문학산이다.

숙종 33년(1709) 고향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던 제운 선생은 영의정 최석정의 상주로 종2품인 가선대부와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된다.

이에 임금께 예를 올리러 입궐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모습이 신선과 같아 지켜보던 백관들이 '지상신선'이라고 감탄했다고 전해온다.

오죽했으면 후세 사람들이 '제운리'라는 마을 이름이 그의 아호에서 온 것으로 판단하고 있을까. 학계는 이와 반대로 이세주의 아호가 마을 이름을 따 붙인 것을 정설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논어 위정편 4장에서 공자가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라 했으니, 평생을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둬 공부에 매진해 온 제운 선생이 바로 이 경지에 오른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선생의 묘는 본디 연수구 동춘동에 있었다. 하나 개발사업으로 이장했는데, 당시 장례때 관을 덮었던,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성명을 기록한 조기인 '명정'이 관 덮개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발굴된 관 덮개는 1994년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돼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학산서원 표지석제운 선생 서당이 있었다는 문학산의 기슭에는 또다른 인재양성소가 있었다.

임금이 직접 그 이름을 써 액자를 내려준 서원을 이른바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고 한다.

그 사액서원이 학익동쪽에서 문학산의 삼호현(三呼峴)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던 '학산서원'(鶴山書院)이다.

서원은 서당과 같은, 조선시대 사설 교육기관이다. 중종 37년 백운동서원이 처음 선 이래, 전국 곳곳에 서원이 퍼져갔다.

학산서원은 인천에서 유일한 서원으로, 숙종 28년(1702)에 세워졌다.

그 규모는 현 문학경기장 앞 인천도호부청사에 있는 인천향교와 비슷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인천향교와 함께 인천에서 인재를 키우는 한 축으로 기능을 한 학산서원은 조선 중기에 인천 부사를 지낸 이단상과 그의 아들 이희조를 모셨다.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지역 사설교육기관이자 도서관으로서 기능을 했다.

학산서원은 고종 8년 단행된 서원 철폐 정책에 따라 없어졌다. 그 자리가 '여지도서'와 '읍지' 등에 표시돼 있으나 지금은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 조사로 학산서원이라고 새긴 '와편'과 사당이 모셔졌을 건물 초석을 발견해 표석을 세웠으나, 이마저도 없어졌다. 게다가 문학터널 공사로 그 터마저 자취를 알 수 없게 됐다.

학계와 남구가 힘을 써 각종 문헌과 자료 등을 토대로 학산서원터로 추정하는, 학익동에서 송도방면으로 문학터널 위 오른편 언덕에 표지석을 만들어 세워뒀다.


문학산 등산로 이정표가 학산서원터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어지럽게 서 있는 음식점 안내판에 둘러싸여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학산서원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은 문학산 등산로에 세워둔 작은 이정표가 고작이고, 진입로도 좁으며 정비도 안 돼 있는 데다, 주변에 개사육장과 고물상 등이 있어 발길을 옮기기에 꺼림직하다.

인천의 인재를 양성하던,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으로 여긴다면 지자체가 더 세심하게 주변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후학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는 선현(先賢)의 마음이 어찌 조선시대에 그칠까.

설립과정에 어두운 단면을 지니긴 했어도 학익동에는 (재)인하학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인하대 주소지는 용현동이지만, 같은 재단 소속의 인하공업전문대학과 인하대 부속 중·고교가 학익동을 소재지로 한다.

특히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세종대왕으로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 1888~1963) 선생의 높은 뜻을 살필 수 있는 곳이 학익동에 자리잡고 있다.

학익1동 한나루로 357번길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 '박두성기념관'(www.ibusongam.or.kr)에서 송암 선생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송암 선생은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두현(斗鉉)이고, 자가 두성(斗星)이다.

그는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 같은 해 어의동 보통학교 교사로 됐다. 1913년부터 1935년까지 제생원 맹아부 교사를 지냈다.

"점자로 옮겨 쓴 문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1913년 한국 최초로 점자 교과서를 일본어 점자로 옮겨 출판했다.

그리고 1926년11월4일 시각장애인들의 글자인 '훈맹정음'(訓盲正音)을 창안해 반포했다. 1923년 비밀리에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어렵게 한글 점자 연구를 벌인 지 6년여 만의 일이다.

한글점자는 한글과 같이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이루어진다. 대개 4.2㎜ x 6.6㎜ 공간에 세로 3점과 가로 2점 총 6점으로 글자를 구성하고, 이 6개 점을 조합해 64개 점형을 만든다.

점자는 점자판(점자기)의 점칸에 송곳처럼 생긴 점필을 이용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며, 읽을 때는 뒤집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간다.

송암 선생은 "세상에 눈으로 보고 하는 일이 많지만 눈으로 보아야 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 도리어 손으로 만져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틀림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에 기여한 그의 공은 어찌 크지 않을까. 정부는 1962년에 국민포장을 수여했고, 그가 죽은 이후 1992년 10월에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지난해 송암 선생의 일대기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화책(그림 박흥렬 화백)이 출간됐다. 총 50쪽 분량의 만화책에는 송암 선생 탄생부터 한글 점자 창제 과정, 76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일생이 수록됐다.

특히 일본강점기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이 한글점자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부각돼 있다.

송암 선생 딸인 수채화가 박정희(87) 화백도 '나의 아버지 송암'이란 수필을 내기도 했다.

박두성기념관은 월~금, 오전10시~오후 5시 문을 연다. 관람료는 무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