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국산을 달리며 자라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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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을 달리며 자라는 아이
  • 권근영
  • 승인 2021.03.17 0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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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29) 연희와 인구의 아이, 영이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수도국산 달동네 꼭대기 집, 송림1동 181번지 마당에 여자들이 둘러앉아 도토리를 까고 있다. 뚜껑에 털이 복슬복슬 달린 도토리, 뺀질뺀질 모자 쓴 도토리, 길쭉하고 얄쌍스런 도토리... 가지각색이다. 도구라고는, 벽돌 하나만 손에 쥐고 바닥에 도토리를 비벼서 껍질을 벗겨낸다. 김포 쪽 이름 모르는 산에서 주워와 미리 햇볕에 말려두었더니 껍질이 갈라져 톡 터져있었다. 벽돌로 살짝 밀기만 해도 쫙 갈라져 알맹이를 골라내기 쉬웠다. 주름진 도토리 알맹이 사이로 누런색 애벌레가 얼굴을 내밀며 꿈틀거린다. 움직이는 애벌레를 집어다 도토리 뚜껑에 태우는 작은 손이 있다. 연희와 인구의 딸 영이다.

영이는 상수리가 안 들어가면 묵이 맛이 없다느니, 참도토리가 들어가야 묵이 찰지고 좋다느니 하는 어른들의 말에는 관심이 없다. 도토리 열매를 손으로 굴려보고, 흔들어보고, 알맹이의 그어진 선을 따라 조각내보고, 애벌레를 만져보는 일에나 열중할 뿐이다. 까야 할 도토리가 많이 남아있어 허리를 두드리는 여자들 사이에서 영이도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걸 알아챈 연희가 영이에게 돈 천 원을 주며 구판장에 가서 과자라도 하나 사 먹으라고 한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외벽에 걸려있던 영이와 동네 아이들의 사진.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외벽에 걸려있던 영이와 동네 아이들.

 

돈 천 원을 손에 쥔 영이는 신나서 언덕을 달려 내려간다. 짜니네 너른 앞마당을 지나 작은 언덕 골목을 빠져나가자 큰 차도가 나온다. 길을 건너면 분식집이 하나 있고, 분식집 앞에 놓인 두 대의 오락기 앞에 아이들이 몰려있다. 여기만 지나면 바로 구판장인데, 영이는 멈춰 선다. 아이들 틈에서 오락을 구경하다가 같이 편을 지어 응원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락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과자 사 먹으라고 받은 돈이기 때문에 어쩐지 오락을 하는 데 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영이는 구판장에서 과자를 사 와 오락기 앞에서 아이들과 과자를 나눠 먹으며 계속 구경하다가 어느 틈엔가 휩쓸려 모르는 동네까지 놀러 가 버렸다.

도토리를 다 까고, 알맹이는 물에 담가 불리고, 껍질과 부스러기를 모아 신문지에 싸서 버리고, 마당 물청소까지 다 했는데도 영이가 오지 않자 연희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짜니네 마당과 골목 골목을 다니며 이름을 불러도 나타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한참을 기다리자, 전화벨이 울렸다. 송현주공아파트 쪽인데 자기 아이가 처음 보는 친구를 데려왔다며, 그런데 그 아이가 집에 가는 길을 모른다고, 다행히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어서 연락하니, 데리러 와 달라는 것이었다. 송현주공아파트는 구판장과 반대 방향이었다. 게다가 현대극장에서도 꽃비 미술학원을 지나 한참 걸어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꽤 먼 거리였다.

연희를 보자마자 영이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손을 꼭 붙들고 수도국산 집까지 걸어갔다. 언덕을 올라가는 내내 연희는 영이를 혼냈다. 심장을 졸였던 탓에 안도하는 마음이 자꾸만 화와 섞여 성난 목소리로 거칠게 튀어나왔다. 연희의 목소리가 커지면 영이는 더 서럽게 울고, 다시 말이 없어지면 울음을 그치고를 반복하다가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전혀 뜻밖의 반응들이 돌아왔다. 아무도 혼을 내지 않는 것이다. 여느 때와 똑같이 식사를 준비하는 초저녁이었다. 그저 다친 데 없이 잘 돌아왔으니 됐다는 무심함 속에 편안함이 있었다. 열불이 난 건 연희뿐이다. 그런 연희의 속도 모르고 남편 인구는 자기 어릴 땐 더 멀리 인천교까지도 놀러 다녀왔다며 자랑질을 한다.

수도국산 달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인구도 남부럽지 않을 추억이 가득했다. 모험심을 자극하는 자연의 놀이터가 곳곳에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는 ‘수도국’(송현배수지)이 있었다. 수도국산 정상에는 인천시민들이 먹는 물탱크가 묻혀 있었고, 그 주변은 가시 철망으로 둘러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게 해놓았다. 철망 밖에서 바라봤을 때 그 안은 꽤 넓고 나무가 울창했다.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들어가서 놀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다. 인구는 동네 아이들과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철망을 벌려서 몰래 기어들어 갔다.

‘수도국’ 부지 안에는 신기한 것들이 아주 많았다. 봄이면 냉이와 달래가 자랐고, 여름이면 풀이 무성해져서 방아깨비와 같은 곤충 그리고 새가 많았다. 가장 좋은 건 무성한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를 잔뜩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재미난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서 너무 좋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는데, 아이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야 짱구 떴다!!!”

짱구는 ‘수도국’(송현배수지) 관리인의 별명이다. 항상 빨간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짱구에게 걸리면 토끼 띔을 뛰고 벌을 받아야 했다. 곤충채집 숙제 때문이라는 핑계도 먹히지 않았다. 재빨리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시 기어나가고, 그 구멍이 막히면 다른 구멍을 만들어 또 숨어들었다.

수도국산을 뛰어다니며 노는 사이 계절이 바뀌고 어느 날엔가 산 너머에서 떡을 나눠준다는 소리에 아이들은 동인천 북광장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화수부두를 통해 들어오는 바닷물은 수문통을 거쳐 동인천 북광장까지 이어졌고, 물이 들어오면서 배도 같이 들어왔다. 고깃배가 들어오면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물길 주위로 회, 생선구이, 밴댕이 등을 파는 포장마차가 늘어섰다.

그날은 풍어제를 지내는 날이라 평소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 노랗고, 파란색의 대나무 깃발이 펄럭이고, 하얀색 갓을 쓴 무당도 보였다. 인구와 아이들은 풍어제를 구경하다가, 끝나고 공짜로 나눠주는 시루떡을 받아먹었다. 먹고 또 달라고 해서 또 먹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떡을 많이 나눠 주면 나눠줄수록, 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한바탕 뛰어놀다가 최고의 간식을 만났다.

인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영이는 웃음이 났다. 더 길을 잃고 헤매도 괜찮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이들과 어울리고 섞여 동네를 탐험하고 다닌다. 1996년 여름이었다. 동네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사람들은 수도국산 달동네 골목을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고, 아이들 사진도 찍었다. 영이도 찍혔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 연희에게 낮에 본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했다가 또 혼이 났다. 왜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이 찍혔냐는 이유였다.

도토리를 주워오던 김포 쪽 이름 모르는 산은 없어지고 새로 도시가 들어섰다. 수도국산 달동네 마을이 하나, 둘 헐리고, 송림1동 181번지가 있던, 남숙의 가족이 살던 그 곳엔 박물관이 생겼다. 재개발로 뿔뿔이 흩어진 마을 사람들이 박물관을 구경하러 갔다가 거기서 남숙의 손녀 영이 사진을 발견하고는 전화를 건다.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솔빛마을 아파트에는 누가 입주하는지, 동네 여자들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누구 소식은 아는지, 죽지는 않았는지, 같은 동네 사람들 이야기로 번진다.

남숙과 인구와 연희와 영이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 갔다. 마을이 있던 곳에 생긴 건물이 너무나 낯설다. 가난하고, 낡고, 지저분하고, 추웠던, 그 집과 동네와 사람들과 기억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계속 떠들어 댄다. 박물관 내부를 구경하고 나와 외벽에 걸린 사진들을 구경한다. 수도국산 달동네를 뛰어놀던 영이와 아이들의 모습이 걸려있다. 영이가 인구에게 말했다.

“아빠, 나 60년대 사람 같이 나왔어.”

“그러게.”

“만약 저 시대로 다시 돌아가면, 계속 여기서 살 거 같아?”

“응 살 거야.”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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