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통과된 스토킹처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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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통과된 스토킹처벌법
  • 박교연
  • 승인 2021.04.14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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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지난 3월 23일 서울 노원구에서 발생한 ‘김태현 스토킹 살인사건’은, 스토킹처벌법이 진즉에 국회를 통과했다면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김태현은 작년 6월 발신번호 표시 제한 서비스를 이용해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신음소리를 냈고, 8월 11일에도 비슷한 성희롱을 보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10일 김태현에게 성폭력처벌법 위반혐의로 벌금 200만 원의 약식명령을 선고했다. 그리고 김태현은 13일 뒤인 지난달 23일 세 모녀를 살해했다.

세 모녀가 살해된 바로 다음 날인 3월 24일에 국회는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1999년 처음 발의된 스토킹처벌법은 올 2월까지 총 21회 발의됐지만, 매번 국민의 사적 생활을 간섭한다는 이유로 통과되지 못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스토킹 범죄 신고 건수는 2018년 2772건, 2019년 5468건, 2020년 4515건으로 집계됐다. 신고 건수 대비 처벌 건수는 2018년 19.62%, 2019년 10.6%, 2020년 10.8%로 높지 않다. 그나마 처벌된 건수도 스토킹처벌법이 없어 경범죄처벌법에 의해 금고형 같은 미미한 처벌이 대부분이다.

김태현이 작년 두 차례 전화로 성희롱했을 때 스토킹처벌법이 있었더라면, 김태현은 처벌받고 피해자는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번에 통과된 스토킹처벌법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정당한 이유 없이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상대방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고, 스토킹 행위를 직접적 접근 및 관찰 외에도 우편, 전화, 정보통신을 이용한 간접적 접근까지 넓게 지정하고 있다. 또한, 사후처벌에 그치는 기존법과 다르게 검찰과 경찰이 접근금지 등의 긴급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법원에 잠정조치를 청구할 수도 있게 되어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이 진즉에 통과됐더라면 김태현만이 아니라 많은 범죄자들이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을 것이다. 작년 12월에는 70대 남성이 30대 여성을 수개월 간 스토킹하다 염산을 뿌리는 사건이 있었고, 11월에는 스토킹 피해자가 교제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거주지를 찾아가 미리 준비한 폭발물을 터뜨린 사건이 있었다. 재작년 2019년 5월에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귀가 중이던 사람을 뒤쫓아 집에 침입하려던 남성의 CCTV영상이 공개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같은 해 충남 서천에 사는 60대 남성은 스토킹 하던 피해자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범죄의 정도도 끔찍하고 피해자도 셀 수 없이 많지만, 스토킹 법안제정까지는 2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걸렸다. 윤선영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본부장은 이 이유를 “면식 관계의 스토킹 범죄는 꾸준하게 있었지만 과거에는 이를 ‘범죄’보다는 ‘호감’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여성 폭력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적 인식의 부재라도 ‘스토킹’은 결코 ‘호감’에 빗댈 수 없는 성질의 범죄다. 전문가들은 스토킹 범죄를 피해자를 자신의 소유물로서 대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철저한 대상화와 사물화가 없다면, 상대의 거절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외려 무시당했다고 느낄 수가 없다. 감히 소유물이 거부를 표하기에 그에 격분하고 분노하고 나아가 죽이게 되는 것이다.

이수정 교수는 “대부분 가해자인 남성은 피해자인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여성이 의사를 거절할 수도 있는 존재라고 여기지 않고, 또 존중하지 않는 심리도 깔려 있다”며 “내 말을 안 들으니 결국 괴롭히다가 죽이는 게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일용 동국대 겸임교수 역시 “상대방의 확고한 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접촉을 시도하다가 결국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며 “많은 스토킹이 과도한 집착을 표현하는 방식, 지속적 괴롭힘을 통한 자존감 회복,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등의 이상 심리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의 신빙성 있는 연구와 조언에도 불구하고 스토킹이 ‘호감’이라 치부됐던 것처럼, 국회와 법원은 계속 여성인권에 한발 늦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2019년 6월 리얼돌 수입허가 대법원 판결이다. 당시 대법원은 법이 개인의 사생활이나 행복추구권 등에 깊이 개입할 수 없는 점과 리얼돌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 정도는 아니라는 점을 들어 수입을 허가했다. 윤지선 세종대 교수는 “대법원 판결에는 남성의 성적 자유 부분만이 부각되고 리얼돌로 인해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감·혐오감 등은 간과되었다”며, “이건 오로지 사안을 남성 중심적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법을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살펴본다면, 스토킹범죄는 국민의 사적 생활을 침해할 악법이 될 수 없고, 리얼돌 수입금지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조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성을 대상화하고 사물화 하는 것은 결코 남성의 쾌락이 아니며, 누군가의 인격을 침해하는 일은 올바른 섹슈얼리티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회와 법원은 여성의 관점에서도 법을 면밀히 살펴보고, 지금 바로 이 순간 여성의 사생활과 행복추구권이 보장받고 있는지도 필히 고민해 봐야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한발 먼저 피해자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세 모녀는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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