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창, 시선의 폭을 확장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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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창, 시선의 폭을 확장할 것
  • 최원영
  • 승인 2021.04.1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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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행복산책]
(114) 창문 크기와 개수에 따라 세금을 매긴 이유
지난해 8월31일 이후 112회로 중단했던 '최원영의 행복산책'을 지난주 부터 재개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113회부터는 텍스트와 같은 내용으로 최원영 박사가 진행해온 3분 분량의 유튜브 방송('최원영의 헛기침' - 기사 하단 첨부)과 함께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어떠한 고통도 산통(産痛)과 같습니다. 산통은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너무 아프다고 산통을 포기하면 새 생명의 탄생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직시하고 마주해야 합니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아름다운 산통으로 만들려면 나의 고통이 새 삶을 창조하는 산통이라고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넓혀줍니다. 시선을 확장하면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바보 되어주기》(안순혜)에 “중세에는 창문 크기와 개수에 따라 세금을 매긴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시원한 공기를 마실 수도 없었고 맑은 하늘을 볼 수도 없었다. 우리 마음에는 몇 개의 창이 있을까? 맑은 마음이 드나들고 다른 사람에게 푸르른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창 말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중세의 권력자들이 창문 크기와 개수에 따라 세금을 매긴 이유는 세금을 더 걷겠다는 탐욕이 빚어낸 재앙이었습니다. 그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또는 국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장되었다면 도저히 그런 법을 만들 수가 없었을 겁니다. 정치의 목적은 국민의 행복일 테니까요. 어쩌면 당시의 권력자들은 국민의 눈을 가려서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게 해야만 자신들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독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시선의 확장이란 마음의 창을 늘리는 겁니다. 마음의 창을 늘려야 비록 우리가 어두움 속에 있더라도 아름다운 정원에 핀 고운 꽃들과 새들의 노랫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창과 문을 통해 우리도 나가고 남도 들어올 수 있겠지요.

 

 - 내 마음의 창은?

당시의 국민은 늘 어두운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음이 늘 어둡고 우울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이웃을 대했을 테니 무척 불행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떨까요? 지금 우리도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비록 창문이 여러 개인 집에서 살고는 있지만, 마음속에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편견이 자리하고 있고, 그런 편견으로 매사를 옳고 그름으로 가르며 이웃과 사회와의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래서 곳곳에서 편이 갈리어 싸우고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가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한 번쯤 이런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어떤가? 내 마음의 창은 하나인가, 아니면 여러 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새로운 창을 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아래에 나오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좁은 시선, 즉 편견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잠깐만이라도 생각해보실래요?

“손가락은 왜 열 개인가요?”

답이 떠오르셨나요? 아마 손가락이 10개인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10개의 손가락을 갖고 태어났고, 지금도 10개이고, 앞으로도 10개일 테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함민복 시인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대단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렇게 해석해놓고 나면 어머니에 대한 감사한 마음까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선의 확장이 주는 선물입니다.

시선을 조금만 넓혀 세상을 바라보면 잠자고 있던 행운도 흔들어 깨울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명품 법칙》(최광선 저)에 앞을 못 보는 걸인과 어느 노신사가 나눈 대화가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아마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프랑스 미라보 다리 위에서 앞을 못 보는 걸인이 구걸 중이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봅니다.’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노신사가 그에게 물었다. ‘하루 종일 구걸하면 얼마나 되나요?’

‘10유로 정도요.’

노신사는 10유로를 준 후, 푯말에 어떤 글을 써주었다.

한 달 후, 노신사는 그 걸인을 다시 만났다. 또 물었다.

‘하루 종일 구걸하면 얼마나 되나요?’

목소리를 알아들은 걸인은 노신사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푯말에 글을 써주신 뒤로는 하루 50유로나 됩니다. 감사합니다. 대체 무슨 글입니까?’

노신사가 읽어주었다. ‘봄은 오건만, 저는 그 봄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앞을 못 본다’라는 ‘사실’을, 봄이 되어도 봄을 볼 수 없다는 ‘감성’으로의 전환! 이 전환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서 소중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시선의 확장이 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전환입니다.

간단하게 자주 만나는 사람 사이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나 이념, 또는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가 좋은 기회가 됩니다. 이제까지는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반박할 내용을 떠올렸다면, 이제부터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그러면 과거와 달리 분노나 답답함이 많이 수그러드는 것을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이것이 시선을 넓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는 생각이 창문이 하나도 없는 어두운 집에 갇힌 것과 같은 생각이라면, 이제는 벽에 창문을 만들어서 밝고 아름다운 창밖 세상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하나밖에 몰라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온 과거와 영원히 작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선의 확장이 주는 축복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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