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과 학산서원, ‘터’에도 의미는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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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과 학산서원, ‘터’에도 의미는 남아있다
  • 배성수
  • 승인 2021.05.11 07:3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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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2) 문학동 사직단, 학산서원 터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도차니 고개, 이름에 담긴 의미

문학동 행정복지센터를 지나 학익동 미추홀소방서로 이어지는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이 있다. 공식적인 도로명은 ‘소성로’지만, 사람들은 이 길을 ‘문학동 구 길’로 부른다. 지금이야 통행량도 많지 않고 두 개의 노선버스만 다니는 작은 길에 불과하나, 1998년 법원에서 문학경기장을 잇는 널찍한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명실상부한 문학의 중심 가로였다. 길의 서쪽으로 학익동과 경계를 이루는 야트막한 고개가 있다. 조선시대 제물포 해안으로 향할 때 이용했던 고개이자, 근대기 인천 시내를 오갈 때 넘어야 했던 고개다. 고개라 부르기엔 다소 민망할 정도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버스정류장에 붙은 ‘문학고개’라는 이름이 없다면 주민조차 고개인 줄 모를 정도다. 동네 어르신 몇 분만 ‘도차니’ 또는 ‘도처니’ 고개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

 

1960년대 학익동에서 바라본 도차니고개(문학산)
1960년대 학익동에서 바라본 도차니고개(문학산)

 

사모지 고개, 쇠뿔 고개, 아나지 고개 등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는 다른 고개와 달리 도차니 고개는 그 어원이 명확하다. 도차니 고개는 조선시대의 기록에서 한자로 도천현(禱天峴)이라 쓰인다. ‘하늘에 제사지내던 고개’라는 의미다. 고개 마루턱으로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단이 있었던 것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단’이란 다름 아닌 사직단을 말한다. 사직단은 땅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모신 제단으로 조선시대 도읍인 한양은 물론 각 고을마다 두었다고 한다. 풍년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국왕과 지방 수령이 해마다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고, 여름이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직단 터

중국의 경서 중 하나이자 고대 도시계획의 원칙을 언급하고 있는 책인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왕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때 왼쪽에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 사직을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이 기록에 따라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를, 우측에 사직단을 두었다. 여기서 좌우란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았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각각 동쪽과 서쪽이 된다. 지방 고을도 가급적이면 이에 준하여 문묘(향교)와 사직단을 설치했고, 인천도호부 역시 향교와 사직단을 관아의 좌우에 배치하였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각종 지리지에 ‘사직단은 관아의 서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사직단은 관아가 있었던 문학초등학교 서쪽 어디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지 외에 사직단을 언급한 문헌이나 지도는 없다. 한일병합으로 국권이 상실된 후 사직단에서의 제사도 더 이상 지내지 못하게 되면서 그 기능이 유지되지 못했고, 향교와 달리 건물이 아닌 사각형의 제단만 설치되었던 까닭에 오래 보존되지도 못했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조사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다’고 한 것에서 이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아직은 어르신들 입으로 전해지는 도차니 고개라는 이름에서 사라진 사직단의 위치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으니 사직단은 이 고개 언저리에 있었을 것이다.

 

도차니 고개 위로 지나는 문학터널 진출로
도차니 고개 위로 지나는 문학터널 진출로

 

학산서원이 있던 자리

문학동에서 도차니 고개를 넘기 전 좌측 방향으로 작은 길이 갈라진다. 조선시대 문학에서 먼어금(지금 연수구)으로 넘어가던 사모지 고갯길이다. 고개 중턱으로 조선 숙종임금 때인 1708년 건립된 학산서원(鶴山書院)이 있었다. 향교가 나라에서 건립한 교육기관이었다면, 민간에서 세운 교육기관을 서원이라 한다. 나라에서 건립한 탓에 향교는 수령이 부임하는 고을이면 무조건 두어야 했지만, 서원은 한 고을에 여러 개가 설립되기도 했고 아예 없는 고을도 있었다. 향교와 서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어느 곳이건 공자의 위패를 두었던 향교와 달리, 서원은 그 고을 출신이거나 수령을 지냈던 학식 높은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서원의 설립은 자유로웠지만, 일부만 국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는데 이를 ‘사액서원’이라 한다. 조선시대 인천에 설립된 사액서원은 인천의 학산서원과 강화의 충렬사 뿐이다. 충렬사는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교육보다는 제사의 기능이 더 강한 서원이다.

 

1950년대 학산서원터 표식석
1950년대 학산서원터 표식석

 

그에 비해 학산서원은 인천부사를 지낸 이단상(李端相)과 그의 아들 이희조(李喜朝)의 위패를 두고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후학 양성과 백성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는 기록이 있어 교육과 제사의 기능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정리 대상 서원에 포함되었고, 더 이상 교육과 제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조사에서 이미 논밭으로 변해버린 서원 터 여기저기에 남아있던 건물 초석과 도자기 편 등의 유적을 확인했고, 이를 기초로 이경성 관장은 문이 있던 자리와 제실, 사당 등의 건물터를 보고서에 약식으로 그려놓았다. 인천시는 1955년 이 자리에 ‘학산서원 터’라는 표지석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경작지로 사용되던 서원 터의 초석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비석도 인근에 들어선 공장 담벼락 옆으로 옮겨졌다.

 

학산서원 배치도(인천고적조사보고, 1949)
학산서원 배치도(인천고적조사보고, 1949)

 

사라진 터를 찾기 위한 노력, 그러나...

1996년 말 문학터널 건설공사가 시작되면서 서원 터가 공사 부지에 포함되어 파헤쳐졌고, 담장 옆에 서있던 표지석마저 사라져 버렸다. 학산서원 터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는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조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어쩔 수 없이 공사를 강행해야 했다면 지표조사나 시굴조사를 통해 서원이 있던 자리와 유적의 현황을 기록하고, 표지석도 다른 장소로 옮겨 그에 대한 이력을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당시 박물관 학예사였던 나에게도 큰 아쉬움이 남는 일이었으며 두고두고 깊은 반성을 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1980년대 학산서원 터(문화재대관, 인천시)
1980년대 학산서원 터(인천시, '문화재대관', 1980)

 

학산서원 터가 그렇게 파헤쳐진 뒤 불과 5~6년의 시간이 흐른 뒤, 서원이 있던 자리를 다시 찾아 헤매는 웃지 못 할 일이 시작되었다. 2003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실시한 학술조사에서 이미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고 했고, 이듬해에는 남구청(지금 미추홀구청)과 학산문화원에서 학산서원 터를 추적하여 새로운 표지석을 건립했다. 그리고 여기에 ‘지난 1949년 조사된 지번을 근거로 남구청과 남구학산문화원에서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그 위치를 추적하여 표지석을 세운다’라고 기록했다. 조사와 고증을 거쳐 확인한 서원 터가 아니라 그저 추적한 장소였다는 이야기다. 도시개발로 사라진 터에 표지석을 세워 유적이 갖는 역사성과 장소성을 후세에 전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임에 분명하다. 다만, 유적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다음에 표지석을 세웠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6. 2004년 새로 건립한 학산서원 터 표지석
2004년 새로 건립한 학산서원 터 표지석

 

2004년 새로 건립한 학산서원 터 표지석

이후로도 학산서원 터를 찾기 위한 남구청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2014년 학산서원 학술조사 용역을 추진한 데 이어 2017년에는 현재 새롭게 표지석을 세운 장소 주변을 대상으로 시굴조사를 실시했지만, 이곳을 학산서원 터라고 확증할 만한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새로 세운 표지석을 없애는 건 어떨까? 이를 보고 사람들은 그곳이 학산서원 터였음을 확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왕 세운 것을 없애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설명문 안에 ‘학산서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어 그 인근에 적당한 부지를 골라 세운다’라는 문구만이라도 추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라진 유적의 ‘터’에도 역사적 의미는 담겨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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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5-11 10:53:03
@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윤진한 2021-05-11 10:52:28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왜곡.http://blog.daum.net/macmaca/3131

윤진한 2021-05-11 10:50:28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제사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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