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띄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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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띄우는 편지
  • 김불위
  • 승인 2021.05.18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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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김불위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어머니, 오늘 저는 부모가 아닌 딸로써 처음 글을 올립니다. 어머니 득남하시자 아버지께서는 삽짝에 금줄 치시며 환한 미소 지으셨지요. 세상을 다 얻으신 기분이셨죠. 우무실 댁 득남(得男) 했다고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였죠. 연로하신 할아버지께서는 “손자 글이라도 가르쳐 주고 저승 가야 할 텐데” 늘 말씀하셨지만 그 손자 세살 때 별세 하셨어요.

요즘은 딸을 더 선호 하지만 그 시절에는 아들 못 낳은 여인들은 불안해 했지요. 딸 여덟 명이나 낳고 당신의 실망감보다 시부모님께 미안함이 크셨다는 어머니, 딸 부잣집 이란 소리가 가슴에 비수를 꽂는 듯 듣기 거북하셨다지요. 종갓집인데 보릿고개 때는 선비이신 시아버님 손님이 문턱이 닿도록 드나들어 빈곤한 살림살이 식사 대접이며 고단한 삶을 살아오셨지요. 우리 어머니 마음 헤아리지 못하고 철부지인 저는 “왜 이렇게 아이를 많이 낳아 고생하시냐” 원망도 했답니다.

출가하기 전에는 동네에서 우무실 댁 딸들 효녀들이라고 칭찬 많이 받았지요. 어머니께서 병환이라도 나시면 일손 덜어 드리려고 달빛을 해님 삼아 텃밭에 나가 감자도 패고 부모님 말씀 거역 한적 없는 딸들 이였지요.

저를 인천이란 낯선 곳에 보내 놓고 애잔해 하시던 어머니! 서투른 신혼 생활이지만 출산하고 살다 보니 부모님은 뒷전이었어요. 외손자 대학 졸업식에도 오셔서 자장면 한 그릇 못 사 드리고 여비 한번 흡족하게 못 드린 것이 여한이 되어 오늘도 부질없는 눈물만 훔칩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던 어머니.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으랴 하시며 시집 간 딸들 걱정하셨죠. 시집살이 잘 하고 있는지, 셋째는 애기 낳고 젖몸살 앓는 다더니 괜찮은지, 잠 못 이루시고 뒤척이시던 어머니. “너희들도 부모가 되면 알 것이다.” 늘 말씀하셨지요. 그래도 부모님 생신 때는 출가한 딸들이 모여 동네잔치 할 때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덩실덩실 춤추시며 행복해 하시는 모습이 생생합니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아침 급하게 울리는 전화 벨 소리에 웬지 저는 가슴이 덜컹거렸죠. 언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서울 동생네랑 빨리 내려오너라.” 하는 거였어요. 그 소리에 가슴이 멎을 것만 같았어요. 아무리 빨리 달려도 4,5시간 걸리는데 그동안 떠나실까 봐 저는 마음을 졸였어요. 동생네랑 차를 달려서 안동에 막 도착 했지만 아직 20 리를 더 가야 하는데 스마트 폰이 울렸지요. 언니의 울음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하는데 가슴이 무너진다는 말 실감 났어요. 저는 아버지의 떠나시는 마지막 모습 못 뵙고 시신 앞에 무릎 끊고 통곡하는 불효 여식이 되었지요. 구남매 부부, 손자들까지 마당이 꽉 차니 어머니께서 “자식 많으니 좋구나.” 하시며 “애들 다 모여서 먼 길 배웅하니 잘 가시오. 나도 곧 따라가리다.” 하시는 말씀에 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지요.

어머니의 마지막 작별 인사에 상여는 떠나고 “아버지의 고운 인품 아깝다” 하시며 주위 분들 애잔해 하시던 그때가 엊그제처럼 느껴집니다. 어머니, 저희들은 어버이날 영재 내외 영란이 손자 손녀 효도 받고 즐거웠습니다. 어머니, 자식 여럿이라 부모 책임 다 못했다는 말씀 하시지 마세요. 건강하게 살라고 최고의 선물 건강한 유전자를 물러 주셨잖아요.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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