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도시 인천 문학 - 노동, 분단, 이주민을 담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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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도시 인천 문학 - 노동, 분단, 이주민을 담아내다
  • 편집부
  • 승인 2021.05.2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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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시민로드 역사를 거닐다]
(4) 문학으로 보는 근대도시 인천과 인천시민의 삶 / 이현식 인천문화재단 정책협력실 부장(문학박사)

 

개항기 존스턴 별장(자유공원 한미수교백주년 자리)(위)과 개항장(아래)
개항기 존스턴 별장(자유공원 한미수교백주년 자리)(위)과 개항장(아래)

 

1. 근대도시 인천을 이해하는 핵심 코드

 

- 관문도시; 개항, 항구와 공항, 서울

근대도시 인천을 이해하기 위한 3가지 키워드가 있다. 첫 번째 관문도시다. 인천항은 부산, 목포항 보다 늦게 개항했지만 수도 서울 옆에 위치한 인천항은 이들과 차원이 달랐다. 원산항, 군산항과 함께 당시 개항한 4개 항은 지역 항으로 기능해 여파가 전국적이지 않았다.

인천항의 개항은 조선의 개항이랄 수 있을 만큼 전국적인 영향을 크게 미쳤다. 인천항 개항이 의미했던 것은 그 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근대적인 삶과 시스템, 그 물자와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것이었다. 근대 상품의 수입은 보통사람들의 삶의 일상을 크게 바꿔놓았던 것이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수입된 성냥, 바늘, 비누 등은 일상생활을 변혁하는 굉장한 인기품이었다. 부엌에서 불씨를 꺼뜨리면 아낙이 쫓겨날 수도 있을 만큼 불은 생명과 삶을 유지하는데 중요했지만 당시 부싯돌 등으로 불을 켜는 것은 어려운 과정이었다.

싸고도 매우 편리한 상품의 위력은 컸다. 대장간에서 만들던 바늘은 잘 부러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개항 후 독일기업 세창양행에서 판매한 스텐레스 바늘은 날개 돋힌 듯 팔렸다. 당시 이불을 빨려면 해체해야 했고 이후 다시 꿰메야 했다. 두꺼운 옷도 그랬다. 삭바느질이 실제로 생계를 유지해 줄 수 있는 시대였다.

비누가 없던 때는 부유층 여인만이 잿물과 콩을 섞어 말린 콩가루로 목욕을 했으나 콩 비린내라는 약점을 감수해야 했다. 지금 사람들이 개항 전 주민들을 만난다면, 가장 인상깊게 남는 것은 몸 냄새였을 것이다.

개항의 상징은 근대 문물이 상품 형태로 수입돼 거래됐다는 것이며, 삶의 차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서울 옆 항구도시로서 이때 전신과 철도가 발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주변부 도시; 이중적 의식

전국 5대 광역시 중 인천만 다른 것 들라면 주변부적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구의 전통시장인 서문시장에는 경북지역의 여러 도시, 농촌 사람들이 장을 보러 온다. 부산이나 광주, 대전도 마찬가지다. 그 지역의 큰 도시로 나가는 것이고 이들 광역시는 그 중심 역할을 수행한다.

인천은 그렇지 않다. 인천시민들은 수도권의 메인 도시에 살고 있다는 중심의식이 있으나 또한 거대 서울의 변두리라는 이중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동인천에 내려보면 그냥 느낄 수 있다. 인천을 이해하는 두 번째 키워드다.

 

주안5,6공단
주안5,6공단

- 산업도시와 문화적 다양성

인천은 산업도시로 끊임없이 성장해왔다. 일제가 1920년대 시작해 1931년 만주침략을 준비하며, 또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시장에 눈을 돌리며 식민지 조선을 대륙 진출의 발판이자 거점으로 삼았다. 일본 육군 무기공장인 부평 조병창도 이때 생겼다. 인천은 공업지역으로 탈바꿈해 나갔다.

60~70년대는 박정희 정권이 서울~인천을 잇는 경인공업지역을 산업지역으로 삼았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서 유입인구도 급증했고, 문화적 다양성도 커졌다. 육로보다 뱃길을 이용해 충청, 호남지역에서 인천으로 많이 넘어와 정착했다.

당시까지 인천의 도심은 개항장 일대와 부평(계양산 자락) 두 곳이었다. 부평은 철도 부설 후 도심이 부평역, 그리고 조병창 일대로 중심이 이동했다. 미추홀구는 60~70년대 이후 주안공단이 건립되고 배후지가 형성되며 도시화됐다.

 

월미도 용궁각
월미도 용궁각

 

2. 인천의 근현대문학 - 낭만성과 마이너리티의 현실주의

 

인천의 근현대문학은 일제하 부두 노동자, 이주민의 삶, 분단의 아픔, 산업화 시대의 공장 노동을 키워드로 하고 있으며 통속적의 삶의 모습과 함께 월미도 등 위락지 해변의 낭만성이 가미돼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개항장 사진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일제와 산업화시대의 노동현실은 강경애의 '인간문제'와 현덕의 '남생이', 조세희, 방현석, 정화진의 노동소설들에서 볼 수 있다. 한국전쟁 후의 분단 상황에서 대표적으로 한남규의 '바닷가 소년', 이원규의 '포구의 혼'이 그 분단의 삶을 그려냈다. 이주민의 삶은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와 김미월의 '중국어 수업'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낭만성을 주조로 한 근대시, 섬과 도시 변두리의 정서를 다룬 현대시들로 인천의 근현대문학을 요약할 수 있다.

 

- 이태준의 '밤길'

이태준의 밤길은 1940년 문장 지에 발표됐다. 단편소설의 정수 중 정수로서 우리 단편소설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본다. 내용도 재미가 있다. 일본 요정인 월미도 용궁각을 배경으로, 화려한 도시에 가려진 비참한 노동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서울에 집을 두고 고급 요정 용궁각의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데, 장마가 지리하게 이어져 공사는 하지 못하고 손해만 본다. 그 와중에 갑자기 전보가 와 인천역으로 나가니 서울집 주인이 4~5살 된 딸과 고열의 젖먹이 아이를 남기고 떠나버린다. 떠맡은 자신의 아들인 젖먹이 아이는 죽고 빗속에 주안공동묘지로 묻으러 가는 장면이 슬프다. 이태준은 일본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궁각 건설뒤에 배어있는 노동자의 아픔을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인천 근대문학에는 월미도를 배경으로 용궁각, 해수풀장, 방갈로가 종종 등장한다. 김수현 드라마 작가와 비견할만한 당시 통속 소설가인 김말봉(여)은 ‘찔레꽃‘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쓴 ’밀림‘의 주된 배경으로 월미도 방갈로가 나온다.

뛰어난 건축업자가 일찍 죽게됐는데 아들이 어려 친구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그 친구가 갯벌을 메워 인천 항구를 확장하는 사업을 맡아 진행하는데, 사업을 물려준 친구의 아들은 의대생이 되어 공사장에 오게된다. 그는 공사장에서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고 충격을 받고 정의감으로 노동자들을 치료해주고 그 동네 아이들에게 야학을 한다. 여름철에 놀러온 월미도 방갈로와 함께 온 여자와의 이야기는 통속적이지만 당시 월미도 풀장과 해변, 방갈로 등의 풍경이 자세히 묘사돼있다.

당시 월미도의 풀장은 탈의실, 샤워기, 사우나에 비어홀까지 세련된 리조트의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월미도와 차이나타운의 원조 청요리 등은 인천을 금강산, 명사십리(원산) 등과 함께 전국 최고의 관광명소로 하나로 손꼽게 했다.

1940~42년 서울 광화문 중심가에도 50% 이상이 초가집 이었으나 사진에서 보듯이 인천 개항장만큼은 모두 기와집으로 개량했을 만큼 당시로선 보기 어려운 도시풍경을 연출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3~4층 건물은 당시 굉장한 빌딩으로 청요리를 즐기려 서울 손님들도 찾는 곳이었다.

 

인천항 하역 장면

 

- 현덕의 남생이

현덕의 남생이는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인천 개항장 칠통마당(현 중구청 앞 하버파크호텔 일대- 7군데로 통하는 마당)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1920~30년대 일본은 국가주도로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며 유럽을 쫓아가기 위해 국민들에 장기간 저임금 노동을 강요했다. 또 이에 수반되는 저곡가 정책에 따라 인천항을 통해 많은 양의 쌀을 수탈해 갔다. ‘남생이’는 하루 일당 1원(현 7만~15만원)이라는 비싼 벌이를 위해 인천으로 이주한 인천항 하역 노동자 가정의 삶을 아이의 시선으로 전개한다. 아이의 아빠는 지게를 이용하는 고된 하역을 하다 허리를 다쳐 일을 못하게 된다. 생계를 위해 엄마가 들병장수로 항구로 나간다. 들병장수는 바구니에 술과 안주를 담아 잔술을 팔고 웃음을 파는 여자를 말한다. 아빠는 엄마를 못나가게 하지만 결국 숨지고 만다. 인천항을 배경으로 민중의 비참한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당시 개항장의 현 국민은행 신포지점 자리에는 미두취인소(米斗取引所)가 있었다. 전국에서 유일한 선물거래소이다. 전국의 쌀, 콩 재배지를 미리 가격을 정해 사들여 수십배까지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는 투기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많았다. 채만식, 이상, 이광수 등의 한국근대소설에도 이 거래소가 등장한다.

이광수의 소설 ‘재생’에는 3.1운동에 가담한 남학생이 여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일경에 잡혀 감옥에 간다. 신여성의 상징이기도 한 여학생을 그리며 그는 감옥생활을 버텨낸다. 그러나 출옥해보니 그 여학생은 서울 부호의 첩이 되있었다. 돈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좌절한 그는 개명하고 인천으로 와서 미두취인소에서 복수를 꿈꾼다.

이상의 단편소설 ‘지주회시’에는 집안이 망해 미술가의 꿈을 포기하고 거래소 일을 하는 청년이 등장한다. 그의 사무실에는 그림 대신 등락폭이 그려진 모눈종이가 붙어있다.

1920~30년대 개항장에는 항만과 미두취인소 등을 주변으로 숙박·술집·극장이 발달했다. 신흥동에 있던 유곽도 소설에 등장한다. 인천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유일하게 힘을 합쳤던 때는 미두취인소가 서울로 이전하려하자 반대 시위를 벌일 때였다.

인천 미두취인소
인천 미두취인소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는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전쟁 직후 차이나타운에서 살아가는 한 소녀의 성장 과정을 그렸다.

한남규의 ‘바닷가 소년’과 이원의 ‘포구의 황혼’은 각각 1963년, 1987년에 실향민의 분단의 아픔을 그린 단편 소설이다. 옛 인천항과 소래포구를 배경으로 했다.

최근에는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이 발표됐는데, 인현동 화재로 친구를 잃은 사건이 배경이 됐다. 양진채의 '변사기담'도 무성영화 시대 극장의 변사라는 특정한 직업을 통해 일제강점기 인천의 모습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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