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섬의 기억 - 생태문화로 가는 '세계성'의 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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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섬의 기억 - 생태문화로 가는 '세계성'의 단초
  • 편집부
  • 승인 2021.06.0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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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시민로드 역사를 거닐다]
(5) 집담회 - 2021, 미추홀의 터전은 무엇? / 발제-현광일 미추홀 동네지식인

 

<1> 발제 – 원도심의 세계성과 정체성 모색

지난 강의들에서 지역의 새로운 역사적 사실도 알게됐는데, 또 한편으로 그 역사가 내가 살았던 시기와 겹치기에 강의를 들으며 나의 그림자가 크로스됐다. ‘저때 나는 뭐했지’ 라는 그림자다. 1958년생이니 60년대부터의 족적이 다르게 구분된 것이다. 기억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끌어내 재구성해 본다.

 

- 세계성의 표현들

사람들은 정체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세계성에 대한 논의는 악숙하지 않다. 세계성은 공간과 문화, 정치 그리고 생태라고 하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구성된다. 역사와는 다른 것이다. 세계성은 무언인가, 제 이야기를 해보겠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 세계가 열리고 한 사람이 죽으면 세계가 닫힌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마을이 필요하다”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한 사람 한 명이 죽은 사건이 2만 건 발생한 것이다”(후쿠시마 원전사태에 대해)

위 세 문장이 말하는 ‘세계’ ‘온마을’ ‘사건’이 바로 ‘세계성’을 담고 있다. 칸트가 말하는 ‘무관심성’ 속에 이해관계 없이, 전략적 목적 없이, 이성적 사유가 있는 세계를 말한다.

세계성이라는 말과 근접하게 쓰는 말로 ‘고향’을 들을 수 있다. ‘고향’이라는 말이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강하게 주는 말이면서도, 정작 ‘이것이 고향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는 것과 상통한다.
고향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人間]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이다. 고향은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어느 고을 어떤 지점을 제시할 수도 있고, 언제부터 어느 때까지 살았다는 시간을 제시할 수 있으면서도,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각인각색으로 모습을 달리할 수 있다. 세계성이란 이와같이 조합된 하나의 세계이면서, 복합된 심성이며 이는 생태성과도 같다.

 

- 미추홀을 거닐어 보니

어릴 때 저의 놀이터로서 낙섬은 그림자를 연결시키는 고리다. 낙섬은 1861년 대동여지도에 능허대 앞 원도(猿島)로 표기돼 있다. 이때 낙섬이 참 존재감 있게 다가온다. 낙섬은 이후 1903년 지도에는 납도(納島)로 다시 1935년 지도에는 원도로 복귀해 등장한다. 1963년 도시계획도(초안)부터 낙도(落島), 소원도(小遠島)로 병기됐다.

지금 낙섬은 ‘낙섬사거리’라는 이정표로만 내게 남아있다. 이곳을 거닐 때 나의 존재 일부는 이렇게 이정표 하나로 묻혀있다.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갔나? 매립과 개발을 통해 진보한다 해도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정표 뿐이라는 역설적 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세계성’의 단초가 된다.

이정표-낙섬4거리
이정표-낙섬4거리

낙섬염전은 국민학생들이 견학 장소이기도 했다. 그 때 염전 뚝방길 바로 아래에 소금레일이 있었고 그 레일 길을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을 빛바랜 사진에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여름이면 낙섬염전저수지로 수영하러 많이 갔었는데, 안전시설이 없어서 매해 사고도 많았다.

내 기억 속 낙섬은 비오는 날 염전 저수지와 연결된다. 추워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목만 내놓고 있었는데 어른들은 죽는다며 큰일난 듯 야단쳤다. 지금이라면 안전문제로 폐쇄했겠지만, 당시는 죽음을 넘나드는 놀이가 있었다.

수인선이 지나던 미추홀구 용현·학익동 염전 '조선염업 2지구'가 1937년 인천부로 매각돼 매립이 시작됐고 경성화학 등 공장이 들어섰다. 용현동에 살았던 그 시절 ‘마루보시 사택’이라고 많이 들었던 기억나는데, 이번에 조사해보니 일본 운송회사가 노동자를 위해 지은 사택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마을로서, 광복 직전에 일본인들의 운수회사에서 안양천 뚝밑에 지은 사택 마을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인천 학익동에 공장이 많이 생기고 용현동에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것이다.

원도심 미추홀구

 

- 세계성 성찰의 단서(물, 바다)

물과 바다는 세계성을 의미한다. 인천 앞바다를 볼 수 있는 대동여지도(1861년)에서 시작하여 1917년 조선총독부 이름으로 나온 지도를 토대로 지난 100년간 인천의 해안선과 연안의 섬들의 엄청난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인천 연안의 섬 47곳 중 26개 섬은 일부가 매립(또는 다리로 이어짐)됐고, 12개 섬은 완전 매립됐으며 현재 9개 섬만이 남아 있는 것이 현주소다. 인천, 미추홀구의 세계성은 바다와 물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2015 제1회 피스로드 심포지엄’에서 당시 세종연구소 부원장은 파격적인 국가 개조 전략을 발표한다. ‘한국의 생존 전략-광개토 프로젝트’라는 주제발표에서 경기만 일대 갯벌 10억평을 매립해 부지를 확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분양 수익을 제2의 국민연금으로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도 역시 갯벌은 ‘보이지 않는 영토’에 불과하다. 매립의 욕망, 부동산의 욕망, 여기에 ‘세계성’이란 물음은 없다. 정체성 논의만 하고 무세계성만 남았다.

 

- 원도심의 세계성

수봉산(壽鳳山)의 한자 어원은 水峯山이었다. ‘떠내려 온 수봉산’이라는 표현이 있다. 마을이 정착한 후로 수를 목숨 수로 바뀌었다. 물 생태적 관념이며, 다산성과 생명 수준 개념을 확장할 수 있다. 水峯山은 생성(바다)과 존재(산)의 세계성을 함의하고 있다. 그리고 수봉산에는 충혼탑도 있는데 죽음, 즉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생명의 사이클이 완성되는 것이다.

수봉산과 문학산은 미추홀의 영산(靈山)이다. 수봉산을 세계성을 회복하는 산, 문화예술체험의 장이며 가야할 것이 아닌가.

인간은 더 큰 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세계성이란 더 큰 세계와의 관계 맺기다. 기본적인 욕망이다. 그것이 때로는 정복으로 지배로, 혹은 멍하게 하늘 바라보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원도심 문제는 시대적으로 인간 중심의 ‘무세계성’ 욕망이 아니라 생태문화적 ‘세계성’의 문명으로 전환하는 문제다. 원도심 미추홀이 그 위치에 있다.

 

 

<2> 토론 및 질의 응답 - (좌장) 김상태 인천사연구소 소장

 

- 김용하 인천도시연구소 소장

- 갯벌매립은 왜 관이나 기관이 독점하는가. 그 개발 이익이 시민환원이 아닌 관이나 기관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이 옳은가, 시민 혜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답변) 법률적으로 공유수면 관리는 개인이 아니고 국가나 지자체가 기본적으로 관리하게금 되어있다. 바다를 점유하거나 사용할 때도 기관 허가 받아야 가능하다. 비디리는 공간은 기관의 독점체계다.

공유수면은 국가나 지자체가 목적에 맞게 매립해야 한다. 개발이익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가령 백령도 주민이나 관광객을 위한 접안시설의 경우 국가 재원으로 투자되나 개발이익은 크게 없다.

인천은 수도권에 위치해 매립에 의한 토지 가치는 새만금이나 목포, 군산과는 가치가 다르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송도매립지는 국비 지원 하에 인천시 예산을 투입해 시가 직접 사업을 진행한다.

매립 목적은 기존도시에 부족한 도시가능애, 첨단도시기능을 유치하여 기존 항만, 공항을 통해 동북아 경제를 건설하는 중심과제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 목적이 인천시의 확대 발전에 원동력 되고 있다고 본다.

 

- 100년 이상 인천의 갯벌매립이 이뤄졌다. 천연자원을 잃고 무엇을 얻을 수 있나. 언제까지 개발논리가 계속될 것인가. 

(답변) 인천은 간만차가 심한 특수성이 있다. 준설하지 않으면 대형선박이 다닐 수 없다. 국가, 지자체가 끊임없이 갯벌과 모래를 준설해야 인천이 항만도시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 비용은 국가은 국가가 부담한다.

그러나 준설토로 인한 매립지(투기장)는 수도권에 위치해 있어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준설토 투기장의 개발 이익 배분 시 정부와 시가 합의할 필요성이 있다.

 

- 인천의 갯벌은 누가 주인인가. 시민이 될 수 없나. 비싼 돈을 주고 매립한 그 땅을 차지하려는 노력을 해야하나. 갯벌매립을 위한 비용에 비해 그 효과나 혜택은 효율적인가. 

(답변) 갯벌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미래 자손의 것이다. 화물차 주차장이나 쓰레기 소각장 등 도시에 불가피하게 설치해야하는 기피 시설은 원도심에 설치할 수는 없다. 이때 보다 매립지를 이용할 수 있다.

송도, 청라, 영종의 공유수면 매립 때 갯벌에서 대대로 생계를 지탱해온 맨손어업자들은 단순 보상 대상자로만 취급당해 왔다. 그리고 그들의 장래는 그 보상으로 끝난 것이었다. 

대규모 갯벌 매립에 따른 자연환경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전문기관을 설립해야 한다.

대규모 송도매립의 명분은 매립지를 매각하여 구도심에 재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를 시민들이 믿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매립해올 수 있었다고 본다. 매립에 따른 개발이익은 구도심과의 균형있는 개발로 이어져야 한다.

 

- 박인옥(인천사연구소 전임연구원)

-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인천은 어떤 도시를 꿈꾸어야 하는가? 산업단지의 변화를 통해서 본다면 박사님께서는 ‘폐기되어야 할 산업은 없다. 다만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셨는데 인천이 제조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제조업이 가능하다고 보시는 지요?

(답변)이 질문에 답하려면 인천의 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첨단, 의료산업, 정보통신, 관광산업이 향후 인천을 먹여 살릴 산업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천의 제조업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산업구조가 고도화하며 급성장하였다. 1차금속, 기계부품 조립 및 가공, 비철금속, 화학부문은 80년대 자동차산업과 전기전자, 중장비 생산 부문으로 성장 축이 이동하면서 이를 지원하는 공단 내 관련 업종이 늘어났다. 60-70년대 굴뚝 산업은 80년대 이렇게 변화를 경험한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이전까지 대기업의 계열화와 협업화를 기반으로 성장했던 연관 산업이 인천을 떠나기 시작했다. 인천의 주력 산업이 모호해진 것은 이때부터 라고 본다. 대신 대규모 공유수면매립사업이 대단지 공동주택 건설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인천의 산업 축은 더욱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남동공단을 비롯해 인천의 공단은 시화, 반월 공단과 함께 수도권 내 산재한 공장이 집중하게 된다. 1980년대 말부터 한쪽에선 수도권 내 공해공장 이전을 위한 대단위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다른 한쪽에서 대규모 공동주거단지를 배후지구라는 이름으로 조성하면서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송도가 경제자유구역이 지정되면서 성장축의 모호함은 해소될 것처럼 기대하였다.

경제자유구역 조성 목적과 기능이 산업공간으로써 기능보다 부동산 자본 유치를 우선하면서 사실상 물 건너 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기존의 산업공간과 연계된 산업이 유치되기 어려운 구조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산업단지의 입주 변화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인천에는 2020년 기준 12개 산단에 8722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초기 보다 90배 늘어났다. 60-70년대 조성된 산단만을 이야기한다면 초기 조성된 동일한 면적에 규모가 작은 공장이 밀집되어 있다. 초기 부평, 주안, 기계(3개), 비철금속 공단 공장 유치 계획수는 300여개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산단은 현재 2020년 기준 2700여개가 된다.

남동공단도 초기 조성 당시 400여개 공장유치 계획이었는데 지금은 6600여개 넘는다. 큰 규모의 공장이 이전하면서 부지를 쪼개 임대사업으로 연명하는 공장이 늘어났고, 심지어 한국산업공단이 임대사업을 주력사업으로 추진한 것도 부지 쪼개기에 기인한다. 인천에 입지해 있는 지방산단이나 국가산단이나 이 같은 경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의료산업으로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가 있다. 이들 기업이 지역 내 의료 제조업체와 연관될 경우 파급효과가 클 것이다. 그러나 인천의 의료산업부문은 관련 업체의 자본규모나 종사자 규모는 매우 작다. 의료용 물질 및 의약품 제조업은 50개가 있지만 100인 이상 업체는 8개 뿐이다. 의학용품 관련 제조업은 26개이고 20인 미만이 25개 업체나 된다.

정보 통신산업도 10-20인 미만 업체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개발 부문도 기업체 경우 1995년에 비해 2019년 17배의 증가하였다. 연구개발 사업의 분야나 내용을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지역 내 산업구조 고도화에 얼마나 기여하였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연관 제조업의 성장은 3차 산업으로 분류되는 인쇄 및 디자인, 법률, 회계, 보험 및 금융, 교육 및 연구, 물류산업 등 생산자 서비스산업부문을 촉진하고, 문화예술산업의 성장 기반을 제공한다. 최근 미추홀구, 남동구, 부평구가 각 산업단지 구조 고도화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인천시는 문화 예술사업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한다고 밝혔다. 마치 문화예술정책이 제조업을 견인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화예술공연은 방송통신산업, 영상산업 등과 밀접하게 연계될 때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생산자 서비스 산업 부문의 비중은 매우 낮다. 1980년대까지 미추홀구 주안에 금융과 보험, 법률, 인쇄, 교육 등 생산자 서비스산업이 집중한 것도 미추홀구와 미추홀구를 경계로 입지해 있는 산업단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업단지가 조성되면 여기에 부동산자본이 아니라 산업자본이 집중하고, 산업자본의 입주가 기존의 산업과 연계되어 계열화, 협업화를 통해 규모를 확장하고, 노동력이 이동한다. 노동력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배후지구가 성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때문에 인천이 어떤 제조업이 성장 가능성이 있는가는 경제자유구역을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고자 한다면 기존의 산업공간과 어떻게, 얼마나 연계시킬 수 있는지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관산업을 파악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하지만 경제자유구역만 성장하면 되는 양 ‘나 홀로’ 정책, 또는 ‘구호성 산업유치 전략’만 외치고 생산자 서비스 산업부문은 인천이 아닌 타 지역에 의존할 경우 서비스 산업은 음식업, 숙박업 외 성장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제조업을 여전히 굴뚝 공장으로 인식하는 한 구조 고도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인천은 제조업을 폐기되어야 할 산업이 아니라 새롭게 조성된 산업공간과의 연계성을 높이기 위한 고도화 정책을 필요로 하는 지역이다.

 

‘- 부동산으로 인천 인구유입에는 한계가 있어 산업을 기반으로 한 노동인구 유입에 집중할 때’라고 했는데 미추홀구의 경우 주안공단과 관련해서 노동인구 유입에 집중할 수 있는 먹거리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답변) 인용된 문장은 경제자유구역을 두고 한 말이다. 부동산 인구 유입이 경제자유구역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기존의 산업단지 조성 방식과는 반대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동공단 조성 배경도 서울과 수도권에 산재해 있는 공해공장을 이전시켜 집단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화공단과 함께 건설된 산업공간이다.

인천 2040 도시계획은 2040년까지 인구 35만명 유입을 목표로 도시계획을 수립했다. 노후화된 국가, 지방산단 구도고도화 계획이 포함되어 있고, 관련 기초지자체도 구조고도화 사업 투자 의지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업종의 구조 고도화를 위한 산업단지 내 기업들과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긍정적 평가는 높지 않은 듯하다. 열악한 기반시설 투자와 함께 입주기업의 시설 및 연구개발 투자 지원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청년 고용을 늘리는 문제는 결국 인천의 고등교육기관 졸업자들이 인천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고 인구 증가 요인이 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이 인천에 정착할 수 있는 기반시설 증대는 산업단지 내 기업들이 청년 진입을 기대할 만큼 기업조직, 임금체계, 업종의 미래 성장 가능성 등을 만족해야 한다는 점에서 구도 고도화가 각종 건물을 짓고, 도로를 정비하는 것만으로 청년 고용 증대를 충족하기 어렵다. 학생들이 선호하는 기업이 인천이 아닌 서울 지향적이라면 지금 산업단지 구조 고도화 정책을 좀 더 세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철도망 구축은 인구 유동성을 높이는데 기여할지는 몰라도 그들의 정착률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때문에 인천의 2040도시계획은 인구 유입을 늘리는 환경을 기본 과제로 아파트 공급량 증대, 교통망 확대에 초점을 둔 것은 도시계획으로써는 적절한 것인지 몰라도 산업정책을 구체화하는 기본계획으로는 볼 수 없다.

더구나 주변 도시들이 인천시의 도시계획이나 산업단지 구조 고도화와 거의 차별화되지 않은 판박이 정책을 추진하고 있어 도시산업의 경쟁력 보다 아파트 가격 경쟁력에 따라 인구가 유입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산업단지 안에 무엇을 집어 넣을 것인지 고민하는 것과 동시에 새롭게 조성된 경제자유구역과 연계할수 있는 산업 및 업종을 분석하여 연계하는 것, 기업과 기업, 업종과 업종, 산업단지와 산업단지 간 협력 부문을 구체화하여 계열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 미추홀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들이 공유수면 매립과 관련하여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실제 사례를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 제가 알기로는 한화의 매립 건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해왔고, 소래와 시흥의 사례를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답변) 한화가 1980년대 중반 현재 배곧신도시 부지 145만평을 화약시험장으로 매립을 하였다. (당시 군자매립지, 한화매립지로 지칭) 한국화약 앞 갯벌을 매립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시흥지역과 소래지역 어미들의 거센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제정구 의원, 시장을 역임한 김윤식 전 시장 등이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공유수면매립의 불법, 편법 문제를 밝히고, 개발이익을 시흥시에 환원하는 운동을 수년에 걸쳐 진행했다.

공유수면매립을 통한 개발이익을 지역에 환원하도록 하는 협의는 당시 저항운동에 참여했던 주도 세력이 정치권에 진입하면서 시흥시민이 도시계획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군자매립지는 한화라는 기업이 비배제성을 갖는 공유수면을 사유화하는 것에 저항하여 얻은 결과물이다. 지역 시민 연합체를 구성하여 개발이익지역환원을 이끌어내고, 스스로 도시 구상에 직접 참여하여 새로운 공간 탄생에 기여한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부동산자본 투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주변 산업단지와도 연관성 없이 오히려 다리 하나를 두고 인천과 경쟁하는 도시로 전락했다.

 

- 이현식 인천문화재단 정책협력실부장

- 산업도시로의 성장이라는 표현을 변화·변모·수탈 등의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냐하면 자칫 이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옹호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답변) 인천이 산업도시로 변화되어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이 어떤 성격이었는가에 따라 수탈일 수도 있고 변화이거나 변모, 때로는 성장으로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도시의 성격을 설명할 때 용어가 어떤 가치를 내재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충분히 오해를 살 수도 있기에 사용하는 용어도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개항도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일제 당국이나 외세의 자본에 의해 산업화가 진행된 것은 기본적으로 수탈의 성격이 강하다고 봅니다. 물론 수탈이냐 저항이냐 하는 단순한 이분법이 현상을 도식화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음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해방 이후 60, 70년대 이루어진 산업화 역시 대기업 주도로 민중들을 수탈한 것이 아니냐 하는 시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는 자본의 이윤이 국내에서 축적되고 재생산 구조 안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식민지 시대의 산업화와는 성격이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 개항(1883~1910)과 일제강점기(1910~1945)의 시대 구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왜냐하면 인천에서 개항과 근대화를 이야기하시는 많은 이들이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진 자료들을 설명하면서 그 공간에 건축물이 존재했던 시점에 대해 구분하지 않거나, 건축물을 이야기할 때는 그 건축물과 주체의 이력을 고려하여 설명해 주어야 오해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이력을 설명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 문제와 관련해서 중구의 개항장도 개항과 일제강점기의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고, 미추홀구의 경우 염전골 마을도 이러한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하고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일단 제기하신 문제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선 문학사에서는 근대계몽기로 19세기말 20세기 초부터 1910년까지가 하나의 시기로 묶고 일제에 강제병합되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를 하나의 시기로 묶습니다. 이건 시기가 명확히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역으로 내려오면 구분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개항조차도 근대적 삶의 방식이 이식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 복잡성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인천에 선진 문명이 들어오니까 좋다라거나 최초라는 것을 내세우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인천을 일본인에 의해 완전히 식민화된, 볼 것 없는 식민도시라고 평가절하하는 태도에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팩트는 인천을 통해 외래 자본이 무차별적으로 들어왔고 그 과정을 통해 조선의 삶의 시스템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도,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렵습니다. 인천이 이런 과정을 통해 도시로 성장(이것도 성장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타락이라고 해야 할까요? 변화라고 해야 할까요?)하는 세부 과정을 가려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강경애는 인천에서 노동자의 힘을 보았고 이태준은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포착한 작가도 많습니다. 무엇을 가려보고 무엇이 현실의 실제 흐름인지를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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