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잘린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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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잘린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
  • 최원영
  • 승인 2021.06.0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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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 제3화]
'최원영의 행복산책'이 '최원영의 책갈피'로 새롭게 연재됩니다. '행복 전도사' 최원영 박사가 직접 동영상을 제작해 매주 올리는 연재입니다.  제3화는 '손가락이 잘린 다음에야 비로서 깨달은 것' 입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장웅연)에 구지 선사가 동자승을 혹독하게 가르친 예가 나옵니다.

“구지 선사는 누군가가 도를 물을 때마다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동자승이 그를 흉내 내고 다녔다. 어린 생불(生佛)이 났다는 소문에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구지 선사는 조용히 동자승을 불러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인고?’

아이는 우쭐대며 늘 하던 대로 ‘엄지 척’을 했다. 그 순간 구지 선사는 품에 숨겼던 칼을 꺼내 아이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아이를 구지가 소리를 질러 불러세웠다.

‘어떤 것이 불법인고?’

아이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세웠지만, 손가락이 없었다. 그 순간 아이는 문득 깨달았다.”

옛날 선승들의 가르침은 무척 엄격했습니다. 구지 선사의 이 이야기에서 어린 동자승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이는 스승의 엄지 척이 마냥 신기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스승에게 지혜를 구할 때마다 스승은 늘 지긋이 미소지으며 엄지 척만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하며 감사를 표했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답을 찾았습니다.”

구지 선사가 사람들의 질문에 아무런 말씀도 없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엄지 척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질문한 사람 스스로가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요.

스승님의 이런 깊은 뜻을 모른 채 어린 동자승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열쇠는 ‘엄지 척’에 있다고 믿었을 겁니다. 그래서 스승님이 절을 비웠을 때 스승을 뵈러 온 사람에게 동자승도 ‘엄지 척’을 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대단한 스승 밑에서 배운 동자승이라 역시 다르네!”라며 칭찬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칭찬이 잦을수록 동자승의 교만은 하늘로 치솟았을 겁니다.

그래서 늘 엄지 척을 하는 게 이제 습관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스승님은 그런 동자승을 보고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어린 녀석이 깨달음을 얻겠다고 절에 와서는 남의 것이나 흉내 내면서 깨달은 사람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고, 스스로도 속고 있으니까요.

그런 동자승에게 스승은 처절한 아픔을 줌으로써 가르쳤습니다. 아이의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렸으니까요.

얼마나 아팠을까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손을 보고 어린 동자승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통증과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무서워 달아나다가 스승의 부름에 돌아서서 벌써 습관이 되어버린 엄지 척을 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손가락이 없어졌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이제 어린 동자승이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우리가 답을 찾을 차례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만의 정답을 찾는 여정이 시작될 겁니다.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기주)에 삶을 자전거 타는 것에 비유해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엔 나이 먹는 일이 자전거 타는 법과 엇비슷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몇 번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멍이 들더라도 부지런히 삶의 페달을 밟으면,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살면서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운 교훈이 쉽게 잊히지 않듯이, 자전거 타는 법도 한번 배우고 나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자전거 타는 방법은, 마음은 잊어도 몸이 기억한다. 오랜만에 안장에 앉아도 페달에 발을 얹고 적당히 힘을 주기만 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자전거를 밀고 나아갈 수 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어른이 된 저자는 어릴 때 했던 자기의 생각이 바뀝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자전거 타는 건 정말 쉽지. 자전거는 시행착오와 신체적 고통을 어느 정도만 감수하면 쉽게 배울 수 있잖아. 하지만 먹고사는 일은 다르지. 아무리 많은 학습을 하고 수없이 넘어져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것투성이잖아.”

그렇습니다. 한때 자전거를 잘 탔다면, 타지 않은 세월이 오래되었어도 페달을 밟는 순간 매일 탄 것처럼 곧 적응됩니다. 머리가 기억한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고 해도 삶의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아픔들, 이별들, 실패들, 허무함, 절망감, 배신감, 분노가 좀처럼 사라지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단칼에 없앨 수도 없습니다. 그게 삶이니까요.

삶은 즐거움도, 슬픔도, 성공도, 실패도 모두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지혜를 알려줍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사회의 민낯을 알아간다고 해서, 반드시 현실의 모든 게 익숙해지거나 나아지는 건 아니다. 팍팍한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일은 자전거 타는 일과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다. 그저 우리는 삶의 번민과 슬픔을 가슴에 적당히 절여둔 채 살아온 날들을 추진력 삼아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각자의 리듬으로 끊임없이 삶의 페달을 밟아가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무너져 내리지 않기 위해.”

이제야 알 듯싶습니다. 어린 동자승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엄지 척을 흉내 내다가, 그것이 몸에 배어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엄지 척을 하는 자신을 성공한 자신으로 착각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동자승의 손가락을 베어 아픔을 줌으로써 제자가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게 한 스승님의 깊은 뜻을 말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잠시 저 자신을 돌아보며 저에게 물어봅니다.

‘지금 나는 과거에 형성된 습관이나 성향을 아무런 생각 없이 내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마치 손가락이 사라지는 고통 끝에 깨달음을 얻은 동자승처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나다운 나로 살아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살겠다며 그들을 흉내 내고 살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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