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학익동 소년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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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학익동 소년형무소
  • 배성수
  • 승인 2021.06.08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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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3) 표지석 없는 역사 현장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소년교도소. 19세 미만의 소년 수형자를 별도로 수용하기 위해 설치한 교정시설을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년 수형시설은 1923년 5월 8일 설치된 개성소년형무소였다. 이듬해 4월 대구형무소 김천지소를 소년형무소로 바꾸어 소년범을 수감시켰고, 1936년 10월 28일에는 인천소년형무소를 개소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53개 교정시설 중 소년교도소는 김천소년교도소가 유일하다.

 

소년형무소의 시작

1919년 3월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으로 전국에서 수많은 애국지사가 검거되었다. 그 중에는 20세 미만의 소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된 이후 죄수들은 연령과 상관없이 감옥에 수감되었기에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소년들도 성인 수감자와 함께 생활해야 했다. 소년범의 수가 늘어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재범의 우려가 적은 소년범의 경우, 교화를 위한 별도의 교정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개성과 김천에 소년형무소를 설치했다. 사회 불안과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소년 범죄의 증가 추세는 꺾일 줄 몰랐고, 개성과 김천의 소년형무소에 수감된 소년범은 수용인원 300명을 넘어 한 때 1,500명에 달하기도 했다. 소년형무소 증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1935년 1월 총독부 법무국은 3년간 30만원을 투입하여 제3소년형무소를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후보지로 서울의 공덕동 일대와 전북 익산시가 부각되었지만, 소년형무소 건설 부지로 결정된 곳은 인천 학익동이었다. 그해 3월 총독부는 형무소 부지로 선정된 학익동 일대의 토지 55,000평을 10만원의 예산을 들여 매입했다.

 

인천소년형무소 건물배치도(국가기록원 소장)
인천소년형무소 건물배치도(국가기록원 소장)

 

학익동 인천소년형무소

인천소년형무소 건설공사는 1935년 7월에 시작되었다. 이듬해 여러 명을 한 방에 수용할 수 있는 잡거감(雜居監) 한 동이 먼저 준공되어 소년범 300명을 개성소년형무소에서 이감시켰고, 소장과 간수 등 직원 50여 명을 배치했다. 이후로도 공사가 계속되어 대부분의 시설 공사가 마무리되는 1938년 3월 31일 낙성식을 개최했다. 인천소년형무소의 시설은 크게 관리공간과 수형공간으로 구분된다.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수형공간은 감옥 네 동과 작업장, 실습장으로 구성되었고, 담장 한 켠에 수감자의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장과 채소밭이 있었다. 관리공간에는 형무소 청사와 경비실이 위치했고, 수형공간과의 사이에 수감자 교육을 위한 교화실과 강당을 배치했다.

 

1966년 항공사진에서 보이는 인천소년형무소
1966년 항공사진에서 보이는 인천소년형무소

 

소년범의 학력과 연령에 따라 수감되는 형무소가 달라졌는데 인천소년형무소는 보통학교 3학년 이상의 학력을 가진 13~18세의 초범자만 수감되었다. 개성과 김천에 비해 비교적 연령은 낮고 학력이 높은 소년범을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용 인원은 세 곳의 소년형무소 중 가장 많은 700명이었고, 형무소 내에 교화실과 실습실을 두어 보통학교 교과과정에 맞는 이론 교육과 목공 등의 실기 수업을 병행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수감자를 위해 별도로 보습과 과정도 마련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소년범들은 근로보국대로 차출되어 군수공장에 배치되기도 했다. 인천소년형무소에서는 1944년 11월부터 모두 500여 명이 흥남의 비료공장에 파견되었다.

 

소년형무소 잡거감(미국 국가기록보존소 NARA 소장)
소년형무소 잡거감(미국 국가기록보존소 NARA 소장)

 

소년형무소에서 인천구치소로

광복 후 조선총독부 법무국에서 관할하던 인천소년형무소가 폐지되고, 수감자 800여 명은 가출옥 또는 형 집행정지로 전원 석방되었다. 형무소 시설은 잠시 미군에서 사용하다가 1947년 11월 소년형무소로 다시 문을 열었다. 6.25 전쟁 때에는 북한군 포로수용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인천소년형무소에서는 44명의 모범수로 구성된 충의소년단을 발족시켰다. 충의소년단은 1954년 9월 국제보이스카우트연맹에 정식 가입하면서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교도소 내 보이스카우트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각국 관계자의 방문이 이어졌고,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10대의 영광'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6.25 전쟁당시 포로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인천소년형무소 (미국 국가기록보존소 NARA 소장)
6.25 전쟁당시 포로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인천소년형무소 (미국 국가기록보존소 NARA 소장)

 

1961년 형무소라는 명칭이 교도소로 대체되면서 인천소년형무소도 인천소년교도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80년대 들어 인천소년교도소에는 소년이 아닌 성인 수감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 이른바 ‘시국사범’이 대거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990년 11월 인천소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소년범 전원을 천안교도소로 이감시키고, 이곳은 미결수 수감시설인 인천구치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97년 10월에는 관리동이 있던 자리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12층 규모의 구치소를 신축하였고, 기존의 수감시설이 있던 자리로는 2002년 법원과 검찰청이 이전해 왔다.

 

충의소년단 시범사열(국가기록원 소장)
충의소년단 시범사열(국가기록원 소장)

 

남길 수 있을 때 기록하고 수집해야 한다.

인천 근현대사의 한 장면을 담당했던 소년형무소이지만, 정작 인천에는 그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형무소 대신 들어선 구치소 일대로 그 흔한 표지석 하나 없다. 철거 직전인 1998년 담장 안에 있던 고인돌 1기를 시립박물관으로 옮겨 온 것이 전부일 뿐이다. 당시 박물관은 고인돌 이전에 신경을 썼을 뿐 철거되는 형무소에 대한 기록과 자료 수집은 소홀히 했다. 한 동의 건물만이라도 남겨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을 내지 못했고, 건축 자재 일부를 박물관에 옮겨 놓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고인돌 이전 업무를 담당했던 학예사로서 당시 미숙했던 업무처리에 대한 회한과 반성이 밀려온 것은 불과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2004년 박물관 전시 리모델링 공사를 담당하면서 인천소년형무소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필요했다. 관련 자료는 도면과 사진 몇 장, 그리고 몇 줄 안 되는 신문기사 뿐이었다. 결국 전시실에서 소년형무소 내용은 빠져야만 했다.

몇 년 사이 인천에 남아있는 근대 문화유산의 철거가 가속화되고 있다. 부지런히 다니며 기록과 수집을 거듭하고 있지만, 힘에 부칠 때가 많다. 그만큼 철거되는 근대 유산이 많다는 이야기다. 역사의 흔적은 남길 수 있을 때 기록하고 수집해야만 한다. 그것이 일제 잔재, 아픈 역사일지라도 후세에 전달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기록과 수집에 소홀한 탓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학익동 인천구치소 근처에 이곳이 소년형무소가 있던 장소라는 작은 표지석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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