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돌릴 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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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돌릴 집이 없다
  • 유병옥
  • 승인 2021.06.1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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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유병옥 / 전 인천여고 교장

 

얼마 전 302호에 사는 이경숙(가명)씨가 먹어보라며 김치 한 통과 고추장 한 사발을 가지고 왔다. 경숙씨는 우리 아파트에서 내가 유일하게 가까이 지내는 이웃이다. 그는 나보다 세 살 아래인데, 자그마한 키에 동글동글한 몸매는 얼핏 보아도 바지런 하고 살림 잘 하게 생겼다.

그 댁은 우리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밭이 있다고 했다. 가끔씩 경숙씨 남편 되는 분이 작업복 차림으로 차를 가지고 어딘가 가시는 것으로 보아 밭에 일하러 가시는 것 같다. 워낙 부지런한 경숙씨는 일 년 내내 야채는 사 먹을 일이 없다고 했다. 덕분에 나도 봄이면 시금치나물, 여름이면 상추를 얻어먹곤 한다. 내가 그 댁에 보내드리는 것보다 얻어먹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일 년에 몇 차례씩 음식을 나누어 먹다보니 음식 접시가 오고갈 때 마다 함께 쌓인 정이 이제는 제법 두터워 졌음을 느낀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치를 아예 통째로 따로 담고 햇 고추장을 익자마자 한 사발을 떠 온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답례를 해야 하나? 곰곰 생각하다가 떡을 해서 좀 넉넉히 보내자고 결정했다. 그 댁은 아드님이 우리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므로 아드님 댁과 나누어 먹으면 좋을 듯 했다. 요즈음 쑥이 한창 제철이여서 서리태를 물에 불린 다음 쑥과 함께 떡 방앗간에 가지고 가서 쑥버무리떡을 쩌달라고 했다.

일단 302호 경숙씨네는 좀 많이 보내고 현관문을 마주하고 있는 앞집과 앞 동에 살고 있는 여학교 후배네 집에도 좀 보냈다. 그러고 나니 그 다음에 떡을 나누어 먹을 집이 없다. 우리집은 1층이므로 오다가다 만나서 눈인사를 하는 정도의 사람들은 있으나 막상 그들이 몇 층에 사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아파트에서 근 30여년을 살고 있는데 떡을 나누어 먹을 집이 이렇게 없다니! 도대체 나는 사회생활을 어떻게 한 것인가? 나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면서 마음이 무거워 졌다.

나 어렸을 적(1950년대) 음력 10월 상달이 되면 집집마다 고사떡을 했고 그것을 이웃집과 나누어 먹던 기억이 있다. 고사떡을 찌는 날이면 나는 어머니가 커다란 접시에 담아놓으신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이웃집에 돌리는 일을 했다. 아예 우리 집과의 경계였던 칸막이 판자를 조금 뜯고 작은 쪽문을 만들어 서로 내집처럼 드나들던 양자네 집을 포함해서 떡을 돌렸던 집이 지금도 대여섯 곳은 생각이 난다.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은 정을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내가 어렸을 적(1950년 6.25 한국전쟁 전후)에는 지금에 비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으므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상당히 깊게 정을 주고받는 일이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 비해 모든 것이 엄청나게 풍요로워진 지금은, 떡을 돌리던 집의 수만큼 정을 나누며 살던 이웃이 점점 줄어들었다.

모처럼 오래간만에 떡을 했는데 거리상 불과 몇 미터 안 되는 가까운 이웃임에도 떡을 돌릴 집이 없다는 생각을 하니 나의 인간관계가 그렇게 메말랐었나 하는 반성을 해본다.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운 풍습에 걸맞는 ‘이웃사촌’ 관계를 유지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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