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 따라 기억 따라 - 인천의 60·70년대
상태바
철길 따라 기억 따라 - 인천의 60·70년대
  • 편집부
  • 승인 2021.06.17 16: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추홀 시민로드 역사를 거닐다]
(7) 미추홀 철길 - 김상태 (사)인천사연구소장

 

 

- 인천의 철길

철길들이 가진 의미가 무엇일까. 운송수단과 도로망이 미비했던 시절, 철길은 인천에 어떤 역할을 주었을까. 3대도시로 성장한 인천의 철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길은 소통의 공간이지만, 단절의 공간이기도 하다. 경인선으로 인해 인천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경인도로로 다시 갈라져 발전 속도가 달라졌다.

미담완보(美談緩步)의 느긋함과 기억의 흔적을 따라 철길 속으로 걸었다. 사라져 가는 기억 속의 것들을 주변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가능한 한 기워 보고자 하였다.

1899년 경인선 부설 이후 현재 인천에 남아있는 철길은 국철 1,7호선, 인천1,2호선, 수인선 등 5개뿐이다. 그러나 인천의 철길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60~70년대 한국의 산업화 시기 인천에는 산업철도로 불리는 청원선(請願線)이 상당히 많았다. 인천항과 인천항에 인접한 인천역을 기점으로 공장에 원료나 완제품을 실고 드나들던 철길이었다.

인천제철선, 동국(제강)선, 흥국선, 호남정유선, 석탄부두선, 제3부두선, 강원연탄선, 유공선, 동양화학선. 또 한국유리선, 대림산업선, 대우중공업선, 대일목재선, 대한석유공사선, 대한제분선, 동양연탄선, 군전용선, 삼미사선, 쌍용양회선, 이천전기선, 삼천리선…

청원선은 한국의 산업을 일으킨 현장이었다. 70년대 전후로 우리나라 수출상품 1위는 합판이었다. 인천항 중심으로 대성목재, 이건산업 등 많은 목재소가 자리 잡았다. 매립지 위에 목재단지를 조성하고 철길을 청원했다.

그리고 인천에는 인천항에서 미추홀구를 관통하여 주안-부평-김포를 거쳐 의정부, 동두천까지 연결하던 주인선이 있었다.

인천역에서 필사해 이용했던 청원선 배선도

 

- 주인선

주인선(주안~남인천)은 한화 3억1천5백45만환과 미국의 원조 10만불을 들여 1957년 10월1일 착공하여 1959년 2월20일 준공됐다.

1959년부터 1985년까지 남인천~동두천을 하루 정기 1회, 임시 3회를 운행하다 이후 1989년 4월18일까지는 주안~동두천을 임시편만 하루 2회 운행했다. 그리고 5년후에 폐선이 결정됐다.

주인선은 산업철도로 시작됐으나 사실 미군 전용선이었다. 착공 당시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지방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한 국가적 철길이었다.

정기 1회 임시 3회 운영되었으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간에 운영된 것 같지 않다. 철길 옆에서 지켜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주인선이 운영되었던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인선이 오래 전에 폐선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인선은 일제 강점기 건설된 수인선과 달리, 산업화 시기 1960, 70년대의 산물이다. 

남인천역에서 수인역, 인천항역, 그리고 인하대역 부근까지 주인선과 수인선 일대는 10년전과 비교해 굉장히 빠르게 변화했다. 이에따라 이 일대 남겨있던 폐선로, 철길의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철길의 기록은 대중의 기록임에도 별다른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다. 10년 전부터 사라진 인천의 철길과 그 흔적들을 찾아 나서며 기록하려 애썼다.

 

- 주인선 과도교의 기억

주인선은 제물포역(경인선)으로부터 수백m 떨어진 지점에서 경인선과 연결돼 주안역으로 향한다. 1959년 주인선 시범운행 사진기록(인천시 기록물관리실)을 보면 제물포역 앞 경인국도를 가로지르는 주인선 과도교가 나온다. 이 일대(경인국도와 경인철도 사이)는 건축물 하나없는 나대지였는데, 1981년 경인가도를 확장하면서 과도교도 확장공사를 벌었다.

이후 주인선 과도교는 1997년 철거됐다. 

1959년 주인선 임시개통 때 주인선 과도교
1959년 주인선 임시개통 때 주인선 과도교

 

주인선 과도교 확장공사(1981)
주인선 과도교 확장공사(1981)

 

주인선 철길은 제물포~숭의초교~용현시장 뒤를 지나 현 주인공원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이어 지다 그 앞 도로(용현시장 사거리~능안삼거리)에서 남부역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에서서 끊겨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철길을 덮어버린 도로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제물포~주인공원 간 주택 앞에 설치됐던 쑥골·숭의·용현 건널목들도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주인공원 앞 도로에 묻힌 주인선 폐선로

 

- 수인역, 인천항역, 남인천역

수인역 뒤 곡물시장 일대는 최근 말끔하게 정비돼 눈에 잘 띄었던 철길들이 자취를 감췄다.

인근 강원연탄 진입 철로도 없어졌다.

수인역 뒤 곡물시장 일대. 수인선 폐선로가 온데간데 없다

인천역에서 나와 남부역까지 철길을 따라 능안삼거리(옛 옐로하우스 앞길 )를 가로지르며 교통의 흐름을 끊어 체증을 일으키던 화물열차. 그 철길도 사라졌다. 하루 16회(편도) 다니던 이곳 화물열차는 시내를 관통(축항~남부화물역~임항선~인천항)했으나, 2012년 12월 인천항에서 축항으로 직통운행하게 된 것이다.

화물열차로 교통체증을 빛던 능안삼거리. 철길은 사라지고 횡단보도가 들어서쑈다.
화물열차로 교통체증을 빛던 능안삼거리(숭의역앞). 철길은 사라지고 횡단보도가 들어섰다.

 

- 인하대역 부근, 동양화학

인하대 후문 쪽 경인고속도로 교량 아래에도 수인선 철로가 남아 눈에 띈다. 10년전과 비교해 그 철로는 많이 사라졌다.

홈플러스 인하대점 앞에 10년 전까지 만도 있었던 폐철로는 인도와 차도로 포장돼 흔적이 아주 없어졌다. 홈플러스 앞을 따라가다보면 동양화학이 나오는 데, 청원선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양화학이 보존키로한 한국 최초의 해외방송국인 극동방송국 자리가 나온다.

인하대 뒤쪽 경인고속도로 아래 수인선 철길(10년 전과 현재)
인하대 뒤쪽 경인고속도로 아래 수인선 철길(10년 전과 현재)
철길 덮은 홈플러스 인하대점 앞 인도
철길 덮은 홈플러스 인하대점 앞 인도
박대통령 인천동양화학소다회 공장 준공식 참석후 시찰(국가기록원 소장)
박정희 대통령이 동양화학 소다회 공장 준공식 참석 후 시찰한 동양화학. 구내 청원선 철길이 보인다.
보존키로 한 동양화학 내 극동방송 선교사 사택
보존키로 한 동양화학 내 극동방송 선교사 사택

 

 - 주인선 폐선

주인선은 1994년 빠르게 폐선 결정이 됐다. 주인선 부설 당시는 개인 땅이 수용당해도 말도 못하는 사회분위기였다. 철도청은 토지 사용료도 물지 않고 써온 것이었다. 90년대는 달랐다. 토지 소유자들이 토지점유와 관련된 소송을 잇따라 제기했고 대법원은 결국 사용료를 내라고 판결했다.

철도당국은 수억원의 사용료를 내야했다. 인천시도 도시계획의 문제를 고민하여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민원을 냈다.

60~70년대 가까운 시기, 인천 이야기는 우리들이 들어온 이야기지만 기록에는 빠져있다. 이 이야기를 철길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실 많은 이야기가 철길 속에 담겨있다. 인천의 이야기가 개항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자료들, 이야기 거리가 있다면 같이 공유를 하면 좋겠다. 많은 도움을 받고 싶다.

 

남부역 자리에 조성된 아파트단지 앞 조형물
남부역 자리에 조성된 아파트단지 앞 철도 조형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