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뿌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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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 이야기
  • 김호림
  • 승인 2021.06.30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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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김호림 /자유기고가

 

이른 봄이면 들판에 쓴 씀바귀나 쑥들이 돋아나오기 시작한다. 이들의 뿌리와 어린 순을 즐겨 먹었던 민초(民草)들의 노래가 시경(詩經) 곡풍(谷風, 골바람)에 나온다.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했나? 내게는 달기가 냉이와 같네.’ 이들 쓴 나물과 씀바귀는 대표적 봄나물로 3천 년 전부터 즐겨 먹었다고 한다.

왜 이들은 쓴맛을 이어왔을까? 모든 식물은 해충과 동물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으려는 자기 보호 본능으로 독성을 내뿜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과일이 익지 않았을 때는 외부의 시선을 피하는 쓴맛전략을 쓰는 반면, 잘 익었을 때는 저항할 수 없는 달콤한 맛의 유혹으로 종족 유지 전략을 쓴다고 한다. 쓴 나물과 씀바귀의 쓴맛도 아마 자기 보호 본능의 산물일 것이다.

흔히 ‘쓴 나물과 뿌리’는 괴로움과 고통, 슬픔과 같이 견디기 힘든 시간을 겪을 때의 비유로 사용되었다. 성경에도 이런 비유가 많이 등장한다. 출애굽과 민수기에는 쓰라린 노예 생활을 기억하기 위해 유월절에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으라는 지시가 나온다. 그리고 죄의 쓰라림과 그 결과로 생기는 고통, 불의의 괴로움 등의 표현으로 쓰였다.

한편, ‘쓴 뿌리’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도 품지 말아야 할, 부정적인 비유로도 사용되었다. 히브리서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라.’ 신명기에는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루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平安)이 있으리라 함이라.’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쓴 뿌리’(bitter root) 서구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쓴 뿌리’는 프랑스어로는 ‘르상티망’(ressentiment), 곧 ‘원한이나 앙심’을 뜻한다. 즉 자신의 좌절된 감정으로부터 분출되는 세상에 대한 패자의 적대감이다. 니체는 약자가 강자에 대해 가지는 질투, 원한, 열등감, 시기의 감정을 ‘르상티망’이라 이름 붙였고, 이것이 바로 노예도덕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마르크스가 평등원칙을 근거로 한 사회주의 이론을 내세워 젊은이들에게 혁명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만든 때에도 르상티망이 도구가 되었다. 이뿐 아니라 르상티망은, 포스트모더니즘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진실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상대주의로 사물을 바라보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이고 자연적인 실체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절대적 도덕 가치의 부정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네러티브 (narrative)인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 ‘사회적 성(性)인 젠더(gender) 평등’과 ‘기후변화’의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쓴 뿌리는 무의식 속의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동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반해 동양의 ‘쓴 뿌리’는 인격 수양과 자기의 완성을 이루어가려는 선비의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를 송나라의 유학자인 왕신민(汪信民)의 경구,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어먹을 수 있으면 곧 백 가지 일을 가히 이루리라’, 에서 볼 수 있다. 즉 나물 뿌리의 참맛을 모르고 고기 맛만을 아는 자는 눈앞의 명예와 이익에만 끌린다는 뜻이다. 명나라의 홍자성(洪自誠)은 이 뜻을 자신의 책 이름으로 하여 채근담(菜根譚)을 지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은 자연히 ’담박(淡泊)을 귀히 여기고 농후(濃厚)를 싫어하며, 화사(華奢)를 버리고 질박(質朴)함을 취함으로써 주지(主旨)를 삼은 것이다‘라는 조지훈의 해설과 같은 것이다.

홍자성(洪自誠)은 과거에 낙방하여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한 ’패자의 삶‘을 살아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환경에서도 세상에 앙심을 품지 않고 의연한 선비의 삶을 살았다. 오히려 ’쓴 뿌리‘로 인생을 관조하였기에,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의 경구는 공감의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공맹(孔孟)과 같은 유가(儒家) 성현(聖賢)도 아니고, 노장(老莊)과 같은 도가(道家) 선인(仙人)도 아닌 평범한 개인의 책을 유대인의 탈무드처럼 많은 사람이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는 마치 이웃의 친구와 담소하듯, 자연의 섭리(自然), 도의 마음(道心), 수신과 성찰(修省) 그리고 세상사는 법도(涉世)의 지혜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균형된 감각으로 차분히 논하고 있어, 중국에서보다 한국과 일본에서 더 읽힌다고 한다. 무엇보다 홍자성은 항상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유유자적(悠悠自適)의 풍요를 느끼며 살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이제 ’채근담(菜根譚) 前集 218편‘의 잠언으로 우둔하고 오만한 우리 모습을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다.

’하늘은 한 사람을 어질게 하여 그로써 뭇사람의 어리석음을 깨치거늘, 세상은 도리어 자신의 잘난 점을 뽐내어 남의 모자라는 곳을 들추어내는구나. 하늘은 한 사람에게 부를 주어 그로써 뭇사람의 곤궁함을 건지게 하거늘, 세상은 도리어 자신이 가진 바를 믿고 남의 가난을 깔보니 진실로 천벌을 받을 백성이로다‘(조지훈 옮김)

이 한탄의 글에서 혹 그 한 사람은 창조주가 보낸 구원자이고, 세상은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 찬 채 그분의 은혜를 모르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붙임

菜根譚 前集 218編

天賢一人 以誨衆人之愚

而世反逞所長 以形人之短

天富一人 以濟衆人之困

而世反挾所有 以凌人之貧

眞天之戮民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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