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향한 문학산 제사터 - 해상제국을 꿈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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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향한 문학산 제사터 - 해상제국을 꿈꾸었나
  • 편집부
  • 승인 2021.07.0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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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집담회(끝) - 공간과 사람이 만든 미추홀의 생태 / 발제 - 천영기 미추홀학산문화원 자문위원

 

 <발제> 건국 신화소를 품은 미추홀; 미추홀 경관 개략

                                                                 - 천영기 미추홀학산문화원 자문위원

 

승학산 남쪽 아래 문학초교 원 도호부청사와 재현된 도호부청사, 인천향교 등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승학산(123m) 남쪽 아래 원 도호부청사(문학초교 자리)와 재현된 도호부청사, 인천향교, 인천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등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문학산 정상, 파노라마

제가 직접 문학산, 수봉산을 다니면서 현장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중심으로 발제한다.

문학산에 올라보면 문학산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산 정상에서 봤을 때 북쪽은 미추홀, 남쪽은 연수구, 동쪽은 전망대로 사방이 다 보이고 맑은 날에는 덕적도까지 보인다. 사방이 360도로 완벽하게 열려있고 서울까지 들어가는 길이 보이는 조망권을 갖고 있다. 비류는 왜 문학산에 도읍지 정했을까...

이곳을 도읍지로 정한 중요한 이유는 소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비류도 해상제국 을 꿈꾼 것 같다.

 

봉수대 배꼽산
정상 부위 봉수대가 배꼽을 닮았다.

문학산의 높이는 233m인데 미군이 주둔하면서 16m 잘려나가 217m로 줄어들었다. 옛 사진에 문학산 정상에 봉수대가 보이는데 꼭 배꼽의 형상이다. 이 봉수터와 안관당 제사터 흔적이 사라진 것도 주둔한 미군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산 제단터
문학산 제단터

서쪽 문 왼쪽으로 최근 제단터가 발굴됐다. 산중턱 기와집이 있었는데 이곳까지 기와 등을 지고 올라온 것을 보면 개인은 아니고 관청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제단터는 한나루, 능허대를 향해있다. 바다를 향한 제단이다. 해상으로 뻗어나려 한 흔적들로 보인다. 제사터는 항해 안전을 기원하지 않았을까.

 

배바위
배바위

문학산 고마리길 배바위의 설화를 확인할 수 있는 바위가 최근 발견됐다. 문학산 북쪽과 수리봉 사이에 위치해있는데 등산길과 빗겨나 있어 발견하기 어렵다. 옆에 풀들이 많이 자라기 때문이다. 태초에 조물주가 장차 바닷물이 문학산까지 치밀어 올라 올 것을 예상하고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1950~60년대까지 얘기되다가 5,60년 이상 잊혀졌었는데, 그 배바위를 찾아낸 것이다. 지금은 구청의 안내판도 있다. 백제 건국신화와 연결할 수 있는 바위로  흥미를 끈다.

 

별리현(좌)과 삼호현
별리현(좌)과 삼호현

백제를 오가는 사신들이 왕래했던 별리현(비루고개)는 만수동에서 부평으로 길이 이어진다. 사신으로 가던 이들을 배웅했던 가족들은 이 별리현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나루로 이어지는 삼호현(사모지고개)에서 이별했다.

 

기자제의터 남근석( 좌), 우물터(우)
기자제의터 남근석( 좌), 샘물터(우)

기사제의(祈子祭儀) 터로 추정되는 바위터도 발견할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노동력이 필요하기에 자식을 비는 남근석이 보인다. 바위 옆 공터에 제를 지낼 공간도 있으며, 선돌(경계석)로 둘러싸인 샘물터의 흔적도 그대로 남겨져 있다. 기사제의 터도 문학산 서쪽의 제단터와 방향이 일치한다.

 

중바위
중바위
장군바위
장군바위

 

주안동 고인돌(좌)과 문학동 고인돌
주안동 고인돌(좌)과 문학동 고인돌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학익동 일대에서 고인돌 7~8개를 발굴했다. 그 과정에서 고인돌 2개는 최근까지 정처없이 옮겨 다녔다. 학익동 고인돌1은 청량산 밑에, 2는 학익동 구치소 안에 있어서 사람들이 몰랐다. 지금은 시립박물관에 있는데 새로 짓는 박물관이 완성되면 또 다시 이전해야할 운명이다. 문학동 고인돌과 주안동 고인돌은 제단 형식인데 무덤이 아닌 덮개돌로 성혈(星穴)이 많다. 문학동 고인돌은 수봉공원에 있다가 다시 온 것이다.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선사시대 문학산을 중심으로 거대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전 기념탑
참전 기념탑

수봉산 공원은 호국공원으로 불릴 만큼 전쟁 관련 기념탑들은 모두 와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 기념비도 있어야 겠다.

인천에서 각 구를 통털어 문화예술단체가 많은 곳은 단연 미추홀구다. 1970년대 신도시가 된 남구로 이전해왔다가, 1990년대 남동구로 뻗어나갈 때도 문화예술단체는 남구에 머믈렀다.

미추홀구에 밀집한 문화예술단체 벨트 어떻게 엮어갈 것인가힘의 상징인 해상제국 꿈꿨던 비류 백제는 문화벨트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과제다.

 

집담회를 진행한 박성희(사회), 천영기(발제), 김민수(토론), 김상태(좌장), 장정구(토론), 조지형(토론), 양지원(진행) . <좌로 부터>

 

<토론> 장정구 인천 환경특별시 추진단장(인천녹색연합 정책위원장)

해상제국의 꿈이었던 미추홀의 과거 스토리에 공감한다. 미추홀이 예전에 바다를 꿈꾸었으나 지금은 바다를 잃어버렸다. 현재 수도 서울이나 개성은 바닷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강, 예성강이라는 강이 도읍지에 늘 있었다.

과거에 바다를 꿈꾸며 인천의 중심답게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다른데 예전에는 서구까지도 부평이었다. 과거를 얘기할 것이면 행정구역을 넓혀 함께 생각해야 한다. 확장성을 생각해서 문화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산은 중요한데, 미추홀구에 있는 문학산성만은 중요하지 않다. 문학산성은 전쟁시, 유사시에만 쓰였다. 

문학산 밑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다(연수구 청학동). 느티나무는 나라의 안녕을 기원한 곳이다. 계양산, 문학산, 소래산에도 큰 나무가 있다. 소래산 밑 장수동에는 은행나무가, 계양산 밑에도 계양도호부 밑에 큰 나무 있다. 자치구간 이야기를 같이 하지 않으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좁아진다. 승기천은 사실 미추홀구에 법적으로 포함되지 않는 하천이다. 지금은 연수구에서 흐른다. 행정적으로 미추홀구가 아니지만 국한되어 얘기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생각을 확장하면 해상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백령도에 심청각, 인당수 이야기도 볼 수 있다. 

학익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바다로 가고 있는 하천이다. 골든 하버 국제여객터미널과 연결된다. 미추홀은 여전히 바다로 가는 길이 열려있다. 그러나 지금은 무관심하다.

안타깝게도 미추홀구는 인천에서 가장 메마른 공간이다. 가장 작은 동구와 미추홀구만 법적으로 하천이 없다. 도심의 활력을 위해서 하천 복원이 필요하다. 일단 관심부터 필요하다.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 알려야 한다.

미추홀구민이 사는 공간이니 미추홀구 사람들이 먼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그걸 통해서 행정행위가 일어나기 위한 주장이 필요하다. 구청과 시청에 전달되어 도시의 활력 불어넣을 과정으로 갈 수 있다. 지금 민원에 의해서 용현 갯골수로도 매립 중이다. 하천 복원의 필요성도 민원으로 알려야 관청에서도 관심을 갖게 된다. 

장정구 단장

 

 

<토론> 조지형 전남대학교 교수(국어교육과)

문학산은 미추홀구에 있다고 해서 단지 미추홀구에만 의미 있는 장소는 아니다. 옛 행정구역 단위에서 인천의 중심지는 문학산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비류가 건국한 '미추홀국'의 이름에서처럼 인천의 지리적 정체성은 바다(물)와 산이 조화를 이룬 곳으로, 이때의 산은 바로 문학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산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추홀구뿐만 아니라 인천의 인문지리, 심상공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인천부의 진산은 소래산이었지만, 이는 봉수 체계의 문제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지, 실제로는 문학산이 관청, 향교, 서원, 산성 등을 품은 진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전까지는 문학산과 그 일대가 인천 지역민들의 삶의 중심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산을 빼놓은 인천의 역사적 정체성은 성립하기 어렵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산은 자연 생태를 간직한 핵심 장소이기도 하다. 즉 문학산은 인천의 역사-생태의 핵심 장소인 셈이다.

우리 인천시민이든 외부 지역 사람이든 ‘인천’은 개항으로 대표되는 근대도시라고만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인천이 근현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인천은 2천 년 전에 ‘미추홀국’의 도읍지였던 역사 도시였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곳이 도읍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지리적 이점 때문이며, 이곳을 기점으로 바다를 거쳐 대외적으로 진출하려는 진취적인 기상을 펼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가거지’ 즉 살만한 곳을 정하면서, 비옥한 토지, 어염지리, 교역, 해운-하운 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문학산에서는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이 여러 기가 발견되고, 비류국의 도읍지로까지 정해졌다는 것은 예부터 이곳 인천이 “살만한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백제 건국신화에 드러난 온조와 비류의 국가 경쟁에서 패배한 역사도시라고만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백제가 전성기를 구가하였을 때에는 인천을 중심으로 산동, 요서, 일본으로 진출한 해양국가 모델을 실천하였을 때이다. 아울러 당나라가 백제 멸망을 위해 수군을 보낼 때 중간 기점이 바로 인천 앞바다였으며, 러일전쟁의 두 번째 전장이 또한 이곳 인천 앞바다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전황을 급격히 변화시킨 곳도 바로 인천 앞바다이다.

과거 도읍지로서의 문학산, 대외교역의 창구 능허대(한나루) 등의 역사 유적에 주목할 때, 현재의 항구와 공항을 통해 동북아시아를 넘어 세계와 소통하려는 인천의 정체성이 거듭 확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 건국신화소를 품은 인천의 문학산과 바다를 떠올릴 때, 현재의 문학산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생태 문화적인 요소에 주목할 때, 미추홀구도 인천도 그 미래 비전을 연계하여 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지속가능한 또 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창출할 수 있는 미래 도시의 모델은 역사, 문화, 생태를 간직한 도시입니다. 미추홀구, 인천의 유산인 문학산, 바다, 수봉산, 승기천이 바로 이러한 미래를 가능하게 해 줄 핵심요소인 것이다.

조지형 교수
조지형 교수

 

 

<토론> 김민수 - 도시상공업연구자네트워크(준) 연구원

미추홀구는 인천의 원도심이자 문학산이라는 고대 역사적 신화와 연관된 문화자원도 가지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 청사가 자리잡은 이래로 인천의 중심이라는 장소감도 가지
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송도, 서·북부권 개발사업 등으로
인한 원도심 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실례로 인천 시 빈집의 현황을 구별로 살펴보
면 미추홀구가 859채로 가장 많았고, 이어 중구 672채, 부평구 661채, 동구 569채로 나타났
다. 인천의 대표적인 원도심 미추홀구, 중구, 부평구, 동구의 빈집 비중이 전체의 69.3%(2,759채)를 차지했다.)
이처럼 한 지역이 낙후되면 정주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지역의 공동체성의 저하로
이어진다. 공동체성의 저하는 지역의 소속감 및 애착에 결여로 이어지며 장소감 형성을 방해
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미추홀구는 2018년 구 명칭을 남구에서 미추홀구로 바꿨다.
이는 인천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장소를 브랜딩하여 낙후된 이미지를 개선
하려 하려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화적 역사로 장소 이미지를 재구축하고 장소 마케팅을 하는 시도만으로는 한계가
많다. 무엇보다 고대 역사가 현재의 맥락에서 구민들에게 어떻게 공통의 장소감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천의 중심이라는 장소 이미지(미추홀)와 현재 낙후된 원도심의 상황이
너무 괴리가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신화적 역사보다는 오히려 지금 구민들이 경험하고 있
는 다수의 장소 정체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정체성이 구성되는 방식을 더욱 신중하
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미추홀구의 장소감과 장소 정체성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신
화적 역사가 아니라 현재 구민들 삶과 이들이 만들어가는 일상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미추홀구에서 진행하는 빈집 프로젝트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거주민들이 떠난 빈집에 박물관, 도심농장, 창업 공간을 제공해 주민들의 약해진 관계를 새롭
게 이으며 지역의 장소감과 공동체성을 재구축한다.

특히 도화동 일대 방치된 빈집에 ‘쑥골마을 박물관’을 조성해서 지역의 공유된 역사를 재조명하며 장소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했다. 더불어 빈집에 평생교육관을 조성해 주민들의 관계의 끈을 다시 만들고 있다. 또한 ‘빈집은행’ 사업을 진행하며 도심농장과 같은 일자리 창출로 지역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이렇게 지역의 약한 고리를 두텁게 잇고 다양한 문화적, 경제적 실천을 펼치는 과정은 미추
홀구의 새로운 장소를 구축하는 과정이며, 주민들이 지역을 긍정적으로 경험하고 체득할 수
있는 장소애와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장소 기반 문화생태를 구축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 만들기 역시 유심히 살피며 진행할 필요가 있다. 소위 도시재생이 전국
적으로 확산되면서 비슷한 종류의 커뮤니티 공간, 청년 창업 공간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상황과 맥락을 살피지 않고 다른 지역의 사례를 모방하는 일종의 동형화는 지역의 장소 정체성과 괴리되며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역 활성화와 새로운 장
소 정체성 구축에 커뮤니티 공간과 청년 창업 공간이 모범 답안처럼 제시되는 상황은 오히려
지역 색을 없애며 주민들과 청년들을 동원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없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현재 미추홀구가 낙후된 지역을 새로운 장소 정체성으로 구성하려는 일련의 실천들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는 위해서는 지역의 주민들의 관계와 문화적, 경제적 생태계 등을
더욱 유심히 살펴야 한다. 다양한 주민 커뮤니티 공간, 창업 공간 등은 주민들이 참여와 지자
체의 지속적인 지원, 그리고 지역의 문화, 경제 생태계와 접합되지 않는다면 다른 지역에서
보듯이 실험으로 그칠 위험이 많다.

김민수 연구원
김민수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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