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에 걸쳐 응시한 과거시험, 모범답안
상태바
7대에 걸쳐 응시한 과거시험, 모범답안
  • 허경진
  • 승인 2021.08.31 0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16) 삼백년 넘게 간직한 과거시험 참고서, 답안지 - 허경진 / 연세대 명예교수
[인천in]은 잊혀진 인천의 실학자 소남 윤동규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특집 기획기사는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 송성섭 박사(동양철학)가 집필합니다.

 

소남 윤동규 자신은 일찍이 과거시험 공부를 중단하고 성호 문하에 드나들며 실학 연구에 몰두하였지만, 그의 아버지 윤취망은 25세 되던 1699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취망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항렬인 취빙(1679년 생원시), 취리(1679년 진사시), 취일(1723년 생원시), 취함(1713년 문과)과 소남의 사종동생 동벽(1754년 진사시) 등이 인천 도림동에 거주하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가운데 윤취일은 성호 문하에서 소남과 함께 공부한 선배이기도 하다.

과거시험 문제는 넓은 범위에서 출제되었고, 정해진 시간에 많은 분량의 답안지를 제출해야 했으므로, 응시자들은 예상문제를 정리하여 답안지를 쓰는 요령을 연습하였다. 소남의 종가에 후손들이 공부하던 십여 권의 과거시험용 교재들이 전해지는데, 선조들의 답안지도 물론 후손들에게 훌륭한 모범답안이 되었다.

 

- 7대에 걸쳐 이백년 동안 응시하였던 시험답안지

윤동규 종가에는 아버지 취망의 시권(試卷)부터 손자 신, 증손자 극배를 비롯하여 석구, 지수에 이르기까지 7대 이백년에 걸친 시권이 보관되어 있다. 이 가운데 극배의 손자인 석구는 1885년 진사에 합격하였고, 석구의 아들 지수는 시험공부 삼아 열심히 시를 짓다가 갑오개혁(1894) 때에 과거제도를 폐지하면서 진사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없어졌다. 지수의 시권은 신묘년(1891) 8월에 제출했던 것이니 거의 마지막 시기의 답안지인 셈인데, 지수는 종손 형진의 증조부이다.

 

소남 종손의 증조부 윤지수의 마지막 시권
소남 종손의 증조부 윤지수의 마지막 시권

 

시권은 응시자가 구입하여 검사관에게 제출한 다음, 종이 질이나 크기가 규격에 맞는지 확인하고, 도장을 찍어서 돌려주었다. 응시자가 답안을 써서 제출하면 채점이 끝나서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합격자에게만 채점한 성적이 쓰여 있는 답안지를 돌려주었다. 불합격자의 답안지는 폐기처분하거나 재생하여 활용하였다. 종가에 한 사람의 시권이 여러 장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시험에 응시하였기 때문이다.

소남의 맏아들 이름은 광로(光魯)인데, 소남이 『논어』를 공부하던 시기에 태어났다고 하여 노(魯)나라라는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 13세부터 글을 잘 짓더니 20세에 문장이 크게 이루어져 향시(鄕試)나 향교에서 이름났다. 공도회(公都會)에서 시험을 치를 때에 처음에 장원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공도회는 각도의 감사가 관내의 유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소과(小科) 초시(初試)인데, 보통 6개월마다 교생(校生)을 선발하여 한곳에 모아 놓고 문관을 파견하여 강론(講論)이나 제술(製述) 등을 실시한 뒤에 성적이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인천에 살던 광로가 장원한 공도회는 1745년 경기감영에서 시행되었는데, 사헌부 지평(정5품) 구윤명(具允明)이 시험을 주관하고, 「감송소금사(感送蕭琴士)」라는 제목을 출제하여 부(賦)를 짓게 하였다. 광로가 이 시험에서 삼상(三上)의 높은 성적으로 장원하여 유명해졌다. 경기도 공도회에서는 제술(글짓기) 합격자 3명을 이듬해 진사 복시(2차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광로가 제출한 답안지는 한 구절이 여섯 글자로 된 산문시로, 송나라 성리학자 진덕수의 『서산문집』에 실려 있는 「소장부에게 지어주는 서[贈蕭長夫序]」를 제목으로 삼은 작품이다. 과거시험 응시생들이 주로 읽어보는 『사문유취(事文類聚)』에 실려 있어, 예상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소장부(蕭丈夫)라는 사람은 거문고의 명인인데, 주자의 문하에서 진덕수와 같이 있었다. 진덕수가 지어준 서(序)는 “지금은 전아한 옛 음을 연주하는 사람이 없는데, 이 소장부가 홀로 이 옛 음을 지키고 변하지 않았다”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서가 끝나는 부분에 진덕수가 소장부와 술 마시며 지어준 시가 실려 있다.

구윤명이 공도회 응시자들에게 이 문제를 출제한 의도는 “진덕수의 입장에서 소장부를 보내며 느낀 감흥을 대신 풀어보라”는 것이다. 광로가 오백년 전 진덕수가 되어 제출한 답안지가 구윤명의 마음에 들어 삼상(三上) 장원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소남이 아들 부부에게 살림을 맡겨 광로가 생계를 유지하느라 고생하다가 8년 뒤에 병이 들었으며,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광로가 과거시험 답안지를 잘 쓰고도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이 답안지를 수집하여 『선고(先稿)』라는 책을 편집하였다.

 

윤광로의 유고집 『선고』 첫 장에 “을축년(1745) 도회. 삼상(三上) 장원. 구윤명 심사”라고 밝혔으니, 28세에 지은 과부(科賦)이다.
윤광로의 유고집 『선고』 첫 장에 “을축년(1745) 도회. 삼상(三上) 장원. 구윤명 심사”라고 밝혔으니, 28세에 지은 과부(科賦)이다.

 

- 합격자에게 나누어 준 동기생 명부 방목

방목은 과거시험 합격자명부인데, 생원시와 진사시 명부는 사마방목, 문과 합격자명부는 문과방목이다. 첫 장에는 시험장소와 시험관의 이름 및 직위를 쓰고, 본문에는 생원시 1등부터 성적순으로 합격자의 이름, 자(字), 생년 간지, 본관, 거주지, 부친의 이름과 벼슬을 기록하였다.

소남 종가에는 진사시와 생원시 합격자 명부인 『사마방목』이 십여 권 소장되어 있으니, 그 숫자 만큼의 합격자가 배출된 셈이다. 이 가운데 윤극배가 경오년(1810) 진사시에 합격하여 받은 『경오사마방목』 표지 뒷장에 “윤진사 극배 댁”이라 적혀 있어 주인을 알 수 있고, ‘윤극배’ 명단에서 구경하(具慶下)라고 쓴 것을 보면 부모가 모두 살아있는 동안에 합격한 사실도 알 수 있다. 자시하(慈侍下)는 어머니만 살아 계시고, 엄시하(嚴侍下)는 아버지만 살아 계시며, 영감하(永感下)는 부모가 모두세상을 떠난 뒤에 합격한 경우이다.

 

『경오사마방목』 표지 뒷장. 윤진사 극배 댁
『경오사마방목』 표지 뒷장. 윤진사 극배 댁

과거시험 합격자가 많지 않은 인천에서 이만한 분량의 과거시험 참고서, 시권, 교지 등을 삼백년 넘게 간직한 종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소남의 종가에서는 생원과 진사를 대대로 배출한 것만으로도 양반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